케이든, 아니 검의 공녀 케이티 웰즐리.
북부 대공의 딸로서 언니에게 대공 자리를 밀어주기 위해, 정확히는 정치와 엮이기 싫어 가문의 보물로 남장을 하고 가출을 감행한 여인. 남성용 셔츠 위로 은근히 드러난 굴곡이 세 사람에 비해 덜하다지만 미녀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검술로 의해 단련된, 마치 모델과도 같은 늘씬하고 날렵한 은발 벽안의 슬랜더 미녀.
“어, 케이든 씨가, 아니 케이티 양이, 그러니까 저주에 걸리신 게 아니라는 거죠?”
“네, 저는 원래 여자입니다….”
그것도 과도한 신성력 세례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으니 시청자들이 더욱 열광할 수밖에. 물론 채팅창이 난리가 나든 말든 정작 당사자는 심각한 표정이다.
“어떤 사정이 있어 가문의 보물을 통해 모습을 변화시키고 모험가 생활을 이어나가는 중이었는데, 어째서….”
그 모습은 마치 잘못을 저지르고 부모님의 귀가를 기다리는 듯한 사춘기 소녀의 표정. 골렘에서 내린 순간 원하지도 않았는데 남장이 풀렸다는 것은 가문의 보물인 변장용 마도구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뜻이다.
당연하게도 고장이 났거나 마력이 다 닳았거나 하는 등, 안 좋은 일이 생겼겠지. 갑자기 마도구가 혼자 업그레이드되면서 마법이 중단될 리 없으니까. 전투의 열기 때문인지 긴장감 때문인지 식은땀 한 방울이 케이티의 새하얀 이마 위에서 또르르 굴러떨어진다.
참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커다랗고 둥그런 아가리에 칼이 푹 박혀 죽은 자이언트 웜의 시체가 사라지지 않아 그 넓고 깨끗한 공동이 녀석의 질척한 체액으로 더럽혀지는 것도, 가동을 멈춘 골렘에서 뛰어내린 케이든이 케이티 웰즐리가 되어버린 것도, 명백히 수리해야 하는 골렘들을 사용하지 않고 클리어해 버린 것까지.
일을 해결할 땐 차근차근 하나씩 해결을 해야 할 필요가 있듯이 순서를 나눠야 했다. 죽어버린 웜과 가만히 있을 정비소보다는 반쯤 패닉 상태에 빠진 케이티 웰즐리를 달래 놔야 이야기가 진행 될 것 같네.
“이게, 어, 어째서…?”
“그렇군요, 케이든 씨가 아니라 케이티 양이었다니.”
한세아 또한 같은 생각을 했는지 나 대신 그레이스와 아이린에게 지난번 축복받은 숲에서 만난 대공 이야기를 꺼냈다. 근데 너, 이야기를 듣지 못한 거 아니었어? 비밀을 아는 건 나뿐이라는 설정이었는데 네가 설명을 하면 어떻게 해.
그래도 다행인 점은 케이티가 목걸이를 들고 패닉에 빠진 상태였다는 점. 짠해좌로서 좀 더 많이 갈궈야겠다고 생각을 하며 케이든, 아니 케이티를 바라보니 한세아가 자신의 비밀을 샅샅이 알고 있다는 건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하긴, 가출 소녀가 들고나온 가문의 보물이 망가졌는데 놀랄 수밖에.
케이티 웰즐리가 들고나온 마법 갑옷은 그래도 선조들이 물려준 물건인 만큼 낡고 오래된 갑옷. 수리하며 업그레이드가 가능한 장비다. 하지만 저 목걸이형 변장 마도구는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무슨 일이야, 대체?”
“로, 롤랑? 혹시 마, 마탑에서 마도구를 전문으로 다루는 마법사랑 알고 지내?”
때문에 목걸이를 계속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무언가에 매달리듯 내게 와락 달려든다. 무뚝뚝한 모험가 코스프레고 나발이고 일단 눈앞의 위기부터 해결하겠다, 이거지. 얼마나 다급한지 말투까지 바뀐 상태.
그 간절한 모습에 슬쩍 한세아에게 눈짓했다. 게임 시스템을 이용하며 시청자의 질문으로 만들어진 짝퉁 천재 마법사지만 아이템 효과 창 정도는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그제야 케이티 또한 한세아가 마법사라는 걸 떠올렸는지 후다닥 달려간다.
“어, 저기… 내부의 마력 회로가 아예 사라져버려서 복구는 불가능할 것 같은데요?”
“……히엑.”
물론 케이티가 듣게 된 것은 깔끔한 사망 선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더니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은 뒷모습을 바라보다 슬쩍 한세아의 방송 화면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빛바랜 고대 오로라의 정수]
한때 일국의 보물이었던 마도구.
북부의 험난한 산맥에서 마력이 응집되어 만들어진 보석으로 만들어졌으나,
모종의 사유로 내부에 새겨져 있어야 할 마력 회로가 소실되었다.
그래도 보석으로서의 값어치가 사라진 것은 아닌 듯하다.
마치 퀘스트 창이나 퀘스트 아이템처럼 목걸이 설명이 딱 떠올랐거든.
-어떻게 캐릭터 퀘스트가 가출소녀 ㅋㅋㅋㅋ
-몬스터에게 고향이 위협받은 눈나 vs 들고 나온 귀중품 깨먹은 가출소녀
-이게 북부의 매콤함인가? 날이 추워서 그런지 많이 매운걸 드시네 대공님
-이건 머 별을 늘리는 게 아니라 정신 연령을 늘리는 건가?
-이 집 퀘스트 맛있게하네 북부잼민이 아빠한테 혼나러가즈아
…아무래도, 진짜 캐릭터 퀘스트가 맞나 보네.
※
“그렇, 군요…. 내부에 마력 회로가 남아 있지 않다니….”
“그, 괘, 괜찮지 않을까요? 한나 양 말대로라면 회로가 사라진 거지 내부가 망가진 게 아니니까요! 이 마도구를 만든 마법사분에게 가서 부탁한다면 고칠 수 있을 거예요.”
“그, 엄청 오래된 물건이라… 동화 같은 이야기긴 하지만, 왕국을 마음에 들어 한 드래곤이 만들었다는 전승이….”
“어, 으음….”
축 늘어진 케이티가 불쌍했는지 필사적으로 달래주려던 아이린이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문다. 그냥 좀 비싼 마도구라고 생각했나 본데 설정상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왕국의 보물이자 북부 대공 가문이 받은 하사품이다.
고작해야 떠돌이 오크 몇 마리와 숨바꼭질을 하다 사라진 소녀의 이야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무거운 스토리. 이걸 무겁다고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퀘스트의 스케일이 다른 건 확실하다.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케이든의 모습이 그녀의 모성애라도 자극했는지 뭐 좀 해보라는 듯 아이린이 내게 간절한 눈빛을 보내온다. 아니 근데, 난 몸 쓰는 게 특기지 저런 건 해결 방법이 없는데….
“저기, 고칠 방법이 없다면 이유부터 알아내는 게 어때? 이 커다란 시체가 사라지지 않는 것도, 골렘에서 내리자마자 마도구가 고장이 난 것도 다 엮여 있는 것 같은데.”
“음, 확실히 여기서 저 마도구를 어찌할 방법은 없을 테니까.”
절망스러워하는 케이티와 그걸 달래주는 아이린, 캐릭터 퀘스트를 확인하는 한세아가 정신줄을 놓고 있을 때 그레이스가 정석적인 의견을 꺼내 든다.
하기야 지금 클리어할 수 없는 캐릭터 퀘스트보다는, 진행 중인 시나리오 퀘스트를 우선시하는 게 플레이어로서 당연한 이야기. 고장 난 목걸이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한세아와 함께 커다란 자이언트 웜의 시체로 다가갔다.
마석으로 변해 사라지지 않은 커다란 놈. 대충 아가리 지름이 4m는 될 것 같고, 길이도 15m는 훌쩍 넘을 것 같네. 슬쩍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아나콘다가 평균적으로 4m쯤 된다고 하니 거의 4배 크기인 건가.
“껍질은 돌조각이 붙은 건지, 돌처럼 느껴지는 건진 몰라도 엄청 딱딱하네. 하긴, 그러니까 골렘의 검도 버텨낼 수 있는 건가.”
“이빨이 너무 많아서 징그럽네요. 시체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건 여신님의 피조물이라는 뜻일까요?”
“와 씨, 크긴 하네. 이 정도 크기면 우리 파티원 다섯 명은 한입에 삼킬 수 있었겠는데.”
자이언트 웜을 보고 있지만 정신줄은 놔 버린 케이티를 제외하고 한 마디씩 던지는 일행들. 죽어서 축 늘어진 시체의 아가리 높이만 4m니 위압감을 느끼기에는 차고도 넘친다.
기사형 골렘의 거대한 검이 아니었다면 검기로도 살가죽만 겨우 벗겨낼 법한 바위 피부를 툭툭 두들겨보자 손가락 마디 마디로 느껴지는 강한 반탄력. 기사형 골렘이 없었다면 중급 모험가 파티로는 상대할 수 없는 대형종 몬스터가 맞았다.
이거 잡으려면 30층의 모험가 수십 명이 연합해서 함정을 파야 가능하겠는데.
‘…이게 한 명이 잡을 수 있는 보스 몬스터가 아닌 것 같은데. 골렘이 마도구의 마력을 빨아 먹기라도 한 건가?’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세계의 몬스터들 또한 마나를 가지고 있다. 평등한 여신의 피조물인지라 몸 안에 마나가 깃들기 때문이다. 탑 바깥의 뿔늑대가 죽어서 마석으로 변하지 않는다고 해도 가죽과 뿔을 노리는 모험가들이 존재하는 이유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이런 대형종 몬스터는 거죽이 두껍고 튼튼한 것뿐만 아니라 자연스러운 육체 강화 능력까지 존재한다. 대형종 몬스터가 등장했다 하면 기사가 나서는 게 아니라 기사단이 우르르 몰려 가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거지.
당장 태생 6★인 나도 성체 오우거 한 마리 잡으려면 전력으로 망치질을 해서 팔다리를 부숴 놓고 넘어트려 골통을 깨부숴야 하니까. 게임식으로 말하자면 고작 탱커 한 명이 파티 단위의 레이드 몬스터를 솔킬 내는 불합리한 상황이긴 하지만.
그래, 레이드 몬스터.
대형 몬스터는 파티 단위의 협력을 요구하는 레이드 몬스터다. 고작해야 덩치 좀 커다란 기사형 골렘 혼자서 손쉽게 때려죽일 수 있는 스펙이 아니라고. 맞서 싸울 순 있지만, 우리가 격납고를 살펴보는 동안 혼자서 죽일 수준은 아니다.
거기에 격납고 안에는 명백히 딜러형 골렘이라고 주장하듯 망가진 거대한 활 따위가 있었잖아.
“시체는 사라지지 않는 것 같고, 롤랑이 말하기론 남부 사막에서 등장하는 몬스터가 맞다고 했으니까 격납고도 한 번 살펴보자.”
“그래, 한나 말이 맞는 것 같아. 이 골렘과 웜의 시체는 마탑에 넘기는 게 좋겠어.”
자이언트 웜을 둘러 보자고 한 것은 그레이스나 아이린이 무언가를 찾아낼 거라는 기대 때문이 아니었다. 당연하지만, 플레이어인 한세아가 무언가 발견하거나 시스템이 갱신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지.
하지만 아무런 소득 없이 격납고로 가자고 말하는 걸 봐선 자이언트 웜의 시체는 그냥 시체일 뿐이었나. 묘하게 아쉬움을 느끼며 점점 흘러내리는 끈적한 체액을 피해 다시 격납고로 향했다.
“…오, 격납고 벽면에 이런 장소가 있었군요?”
“한나 양이 격납고 내부 벽면에도 마력을 흘려 넣을 수 있다는 걸 찾아냈거든요.”
자이언트 웜의 시체 앞에서는 시무룩해져서 한마디도 하지 않던 케이티의 입이 열렸다. 토닥여주는 아이린의 손길이 효과가 있는 건지, 아니면 기사형 골렘에 푹 빠진 것처럼 이곳에도 호기심을 느끼는 건지 모르겠네.
-일단 고장난 골렘부터 수리하는게 맞을 듯?
-이미 보스 뒤져가지고 멈추는거 아닌가몰러
-그 선생님 카메라로 기계팔 말고 우리 북부잼민이 보여주세요
-잼민이라 하기엔 좀 많이 성숙한 것 같은데여
-하는 짓이 딱 잼민이니까 상관 없지 않을까?
그 새 케이티의 별명은 북부잼민이로 정해진 걸까. 포르노 걸, 롤랑센세, 눈나, 마망, 잼민이라니. 참으로 가슴이 옹졸해지는 라인업으로 열심히 기계 팔을 건드리며 격납고의 정비실을 탐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