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찻길 옆에서 기차가 지나가는 걸 느끼면 이런 기분일까. 엉뚱한 소리지만 기찻길 옆 오막살이라는 동요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돌을 긁는다기보단 통로를 박살 내는 굉음이 사라진 뒤, 그레이스의 탐색 범위 안에서 그 어떠한 소음이 들리지 않을 때까지 우리는 우두커니 통로에 서 있었다. 들려오는 굉음이 너무 커다란 것도 있었고, 그레이스의 표정이 그만큼 심각하기도 했기에.
그렇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고 나서야 진입하게 된 동굴의 공터.
“세상에….”
“이게 동굴뱀의 흔적일 린 없지? …그렇지?”
공터는 동굴의 공터라는 말보다는 멸망한 세상의 폐허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게 어울리지 않는다면 지진 속에서 붕괴하거나 철거 중 찌그러진 지하실이라는 표현을 덧붙여도 좋겠네.
종유석도 석순도 사이좋게 박살이 나서 돌조각이 된 공터. 마치 물길을 트듯 그 딱딱한 돌바닥에 길쭉한 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거, 마석이… 다 박살이 났네.”
“마석이 이렇게 부서질 수 있는 물건이었나?”
“마력이 응집되어 돌처럼 생긴 거라 단단하긴 해도 부서지지 않는 건 아니야.”
심지어 고블린과 동굴거미였던 마석은, 녀석의 몸뚱이에 깔리기라도 했는지 종유석 파편 사이에 섞여 금이 가거나 잘게 부서진 상황. 그 압도적인 파괴의 흔적에 우리 일행들은 말을 잃었다.
아니 시발, 장님뱀은 그냥 마력 때문에 육체가 강화된 아나콘다 크기의 뱀이라고.
이렇게 동굴 바닥과 벽면을 갈아버리는 굴착기 트랜스포머가 아니라.
그 충격적인 파괴의 현장을 목격한 뒤, 우리 일행들은 조용히 거점으로 삼았던 막다른 길로 돌아왔다. 녀석이 아무리 강인하고 거대하다 해도 벽을 뚫고 등 뒤에서 나타날 리 없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일단 녀석의 흔적을 보니 내가 막아 세울 순 있을 것 같긴 한데… 우리 일행들이 딜을 넣을 수 있긴 할까? 덩치가 저 정도면 검사인 케이든은 외피에 흠집도 못 낼 것이고, 그레이스의 화살도 성인 남성에게 박힌 이쑤시개 수준일 것 같은데.
그나마 기대할 수 있는 데미지는 한세아의 마법인데 동굴거미와 흡혈박쥐를 방해하기 위한 바람 계열의 마법을 배운지라 화염이나 뇌전 마법보다는 깡 데미지가 약한 상황.
“…저 녀석, 동굴뱀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냄새는 잘 못 맡는 것 같죠?”
“그러네. 공터 바로 옆 통로에 우리가 있었는데 고블린과 동굴거미만 박살 내고 지나갔잖아. 이 녀석은 후각이 아니라 청각이 예민한가?”
“바닥을 갈아 버린 흔적이 완전히 일직선인 것도 이상합니다. 평범한 뱀이라면 자국이 구불텅 휘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압도적인 흔적을 봤지만, 여신에게 사명을 받은 우리 일행들이 겁을 먹고 물러설 리 없나 보다. 그레이스를 필두로 다양한 의견을 이야기하는 일행들. 거기에 녀석의 모습을 확인하지 못한 상태인지라 포인트를 배팅한 한세아의 시청자들도 활발하게 의견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자국이 일자로 나 있으면 진짜 굴착골렘 같은 거 아님?
-뱀 대신 웜 종류일수도 있지 앞뒤로 꾸물꾸물 움직이면 일자로 자국이 남고
-판타지에 자주 나오는 자이언트 웜 같은데 청각이 예민한 것도 진동 탐지인거임
-이거 포인트 도박 제 3의 선택지 나와서 흐지뷰지 되는거 아닌가 싶네
-아니 근데 저건 어케잡을건데 자국 너비만 봐도 존나큼;;
지금까지 중형 몬스터만 보다가 처음으로 대형 몬스터를 보니 정신이 번쩍 든 모양. 그 덕에 채팅창은 다시 1번이 맞네 2번이 맞네 자신만의 추측을 내밀며 혼란스럽게 달아올랐다. 한세아가 처음 본다는 것은 세계 최초로 등장했다는 뜻과 거의 비슷한 이야기니까.
바깥세상에서 용병이나 기사의 종자 등 다양하게 게임을 즐기는 사람이 있다 해도 이런 대형 몬스터는 쉽사리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오우거든 웜이든 와이번이든 대형종은 말 그대로 커다래서 사람들의 눈을 피하는 게 불가능하거든.
그렇게 위치가 드러난 대형종은 모험가와 기사단이 나서서 싸그리 토벌했다. 왕국 내부의 곡창지대에 키 5m짜리 식인 거인이 농노를 잡아먹고 다니는 데 그 어떤 영주가 그걸 내버려 두겠어. 방치를 하는 순간 매일 전 재산의 1%씩 사라지게 만드는 괴물을.
“롤랑, 대형 몬스터를 사냥할 방법이 있어?”
“대부분 비좁은 장소나 함정으로 유인해서 사냥하는 편이지. 그편이 피해가 적고 손쉬운 방법이니까.”
“함정…은 무리일 것 같고. 녀석이 소리에만 반응하고 시력이 없다면 비좁은 통로에 머리를 처박게 할 수 있으려나?”
“일단 녀석의 모습을 확인하는 게 우선일 것 같습니다. 이렇게 추측만 해 봐야 정답을 찾아낼 수 없을 것 같군요.”
그러다 나온 케이든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거리는 일행들. 겁이 나서 탑 밖으로 도망칠 게 아니라면 굉음의 주인공을 마주해야 한다는 의견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의견을 뒷받침해 주는 것은 나에 대한 믿음.
파티의 탱커가 감당할 수 없다면 아래 계층으로 후퇴해 더욱 성장하는 게 정석적인 방식이지만, 태생 6★ 상급 모험가가 탱커로 있는 파티라면 정석에서 벗어나 조금 욕심을 내도 되는 것이다.
“롤랑, 막을 수 있지?”
“물론. 막는 건 확실히 해 줄 테니 녀석을 어떻게 죽일지 고민하는 게 좋을 거야. 저렇게 큰 놈은 급소를 찾는 것도 일이니까.”
차라리 오우거나 와이번 같이 명백히 인간이나 짐승의 모습을 한 녀석은 대형종이라 해도 어디 한 부위를 박살 내고 넘어트려서 심장이나 뇌를 파괴할 수라도 있지. 저런 길쭉한 놈은 나 혼자서 잡기에는 곤란한 면이 많다.
뇌가 너무 작거나, 입 쪽이 아니라 뒤쪽에 급소가 있거나 하면 주둥이부터 온몸을 차근차근 갈아버리며 나아가야 하니까.
‘…뱃속에 들어가면 반사딜로 죽일 수 있으려나?’
문득 쉬워 보이는 꼼수가 떠올랐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생명체의 체액과 위액으로 범벅이 되는 걸 원하는 사람은 없듯 나 또한 꺼려지는 게 당연한 일. 될 수 있으면 그냥 철퇴로 때려죽이고 깔끔하게 마석만 얻고 싶다.
“그럼, 가 보자.”
※
그렇게 시작된 30층의 탐색.
보스를 어떻게 죽일지 고민하던 우리들의 눈앞에는 명백히 이질적인 공간이 나타났다. 벽면의 패널에 마력을 주입하지도 않았는데 어느 순간 통로가 반들반들하게 다듬어져 있는 것이다.
마치 탑의 동굴 통로와 골렘이 나오는 미로 통로를 반씩 잘라서 붙인 모양새. 그 수상쩍은 복도를 지나칠 수 없어 우리는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 통로, 골렘이 나오던 미로와 똑같아.”
“이 너머에도 골렘이 있을까요? 그러니까, 그 말을 하던 황금색 골렘 같은 녀석 말입니다.”
실제로 동굴과 미로를 절반씩 섞어 놓기라도 했는지 몬스터 하나 없이 고요한 통로. 골렘을 찾아다녔던 기억에 일행들의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진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그 정체불명의 굉음도 없고, 몬스터의 소음도 없으니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급해지는 것이다.
아나콘다 크기의 장님뱀 대신 동굴 통로를 다 분쇄해버리는 대형종이 등장하지를 않나, 종유석과 석순이 가득해야 할 울퉁불퉁한 동굴 대신 반들반들한 미궁의 벽이 나타나지를 않나. 10층, 20층과는 전혀 다른 30층의 진행에 시청자들이 지칠 줄도 모르고 채팅을 난사하기 시작한다.
-아니 메인퀘도 안나오고 머 짐작가는게없네
-그 커다란놈이랑 만나야 퀘스트 시작되는 거 아님?
-골렘 NPC가 퀘스트 줄지도 모름
-아 포인트 다 걸었는데 존나 쫄린다 진짜루
-슬슬 베팅 마감하는거 어떰? 힌트 더 보고 올인하는 놈 있을까봐 배알꼴려서 그럼 ㅎ
“너는 진짜 솔직하구나? 하지만 그 솔직함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슬슬 포인트 배팅 기능은 마감하겠습니다. 동굴 벽 다 갈아버린 장면 봤으면 슬슬 배팅했어야지, 안 그래? 아직 걸지 않은 기회주의자 겁쟁이들은 계속 구경이나 하라구~”
몬스터가 하나 없는 고요한 통로여서 그런지 곧바로 시청자들에게 입딜을 박기 시작하는 한세아. 그렇게 방금 들어왔네 알 바 아니네 시끄럽게 구는 시청자들의 채팅을 시야 한구석에 담으며 앞으로 계속해서 나아갔다.
그래도 골렘을 찾을 때처럼 한 시간씩 걸을 일은 없다는 듯 몇 번 직각으로 꺾이더니 나타나는 커다란 공터.
종유석과 석순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고 물웅덩이나 호수가 있는 동굴의 공터와 달리 천장도 벽도 통로도 완벽히 반들반들한 거대 공터는 일종의 물류 창고처럼 느껴졌다. 공터의 저 끝에 커다란 문이 잔뜩 있었으니까.
“저 문, 열어봐야겠죠?”
“안에 골렘이 있을 것 같긴 한데, 부숴서 열어야 하나?”
“정말, 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이질적인 장소네요.”
부자연스럽게 반들반들한 공터와 나란히 서 있는 길쭉하고 커다란 문들. 나는 물류 창고나 격납고 따위를 생각했지만, 그것도 현대인의 시선으로 볼 때나 그렇게 느껴지는 거지, 판타지 세상을 살아가는 NPC에게는 기괴하고 괴상망측한 장소처럼 보일 뿐인가 보다.
골렘 격납고라… 가능성 있지 않나?
마침 황금색 골렘의 부산물이 열쇠 모양 마석이잖아. 열쇠 모양의 퀘스트 아이템과 잔뜩 있는 문. 게임을 전혀 모르는 아저씨 아줌마를 데려와도 열쇠를 문에 꽃아 볼 것 같은 상황 아닌가.
“…누군가 먼저 이곳을 방문했나 본데? 문을 부숴보려고 시도했나 봐.”
“이건, 꽤 실력 있는 검사 같군요. 검에 명백히 마나를 담아 내리쳤습니다. 검기에도 흠집만 났다는 게 어처구니없긴 하지만….”
공터를 가로질러 마주하게 된 커다란 문들. 공터의 벽면에는 격납고의 셔터처럼 생긴 커다란 문이 무려 다섯 개가 나란히 닫혀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격렬하게 공격을 한 흔적까지.
상급 모험가 파티가 지나가다 발견이라도 했는지 흔적이 꽤 격렬하다. 얇은 실금이 아니라 돌벽을 깎아내고 정체불명의 금속을 갉아 낼 정도의 검흔이 잔뜩. 그 위에는 명백히 마법으로 공격한 것 같은 그을음 또한 잔뜩 있었다.
검기 담은 검으로 베어보고, 탱커가 둔기로 문과 벽면의 이음새를 후려치다가, 최후에는 마법사가 마력을 듬뿍 담아 공격 마법까지 썼지만, 표면만 살짝 긁어냈을 뿐인가.
공터에는 아무런 몬스터도 등장하지 않는 데다가, 30층 정도의 몬스터는 마력을 어느 정도 소모해도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출인 것 같다. 물론 그 자신만만한 공격을 전부 버텨낸 문은 끄떡없이 잠겨져 있을 뿐.
‘…열쇠 구멍을 찾아야 하나?’
“그레이스 언니, 벽면에 열쇠 구멍 같은 걸 찾아보는 게 어떨까요? 그 황금색 골렘이 남긴 마석 열쇠를 이 문에 써야 할 것 같아요.”
“음, 확실히 이 장소는 그 골렘이 튀어나온 곳과 비슷하게 생겼네.”
문 주변을 슬쩍 둘러보며 열쇠 구멍을 찾아봤지만, 시야 내에는 없었다. 그사이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아니면 시청자들이 훈수라도 뒀는지 그레이스에게 탐색을 부탁하는 한세아. 인벤토리에서 꺼낸 열쇠 모양의 마석을 본 일행들이 고개를 끄덕이고선 벽을 더듬어 나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