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몇 곳은 신분 검사도 해.”
“세상에, 귀족이 아니면 받지 않는 곳인 거야?”
음식과 식당 이야기로 잠시 이야기를 나눈 한세아가 다시 그레이스를 향해 돌아간다. 뒷모습만 봐도 가벼운 발걸음은 탑에서의 모험으로 벌어들인 수익 때문은 아니겠지. 개선장군이라도 된 마냥 의기양양하게 걸어가는 한세아와 환히 웃으며 반겨주는 그레이스.
저 정도면 그냥 내게 데이트 신청을 해도 거절할 일 없이 받아 줄 텐데, 여자의 마음은 언제나 복잡한 모양이다. 언젠가 한 번쯤은 내가 먼저 권해봐야겠는데.
※
짧게 잠을 자다 불침번을 서고 다시 잠을 자야 하는 중간 불침번은 체력이 든든한 내가, 체력이 가장 약한 마법사 한세아가 초번을,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게 습관인 아이린이 말번을.
한세아, 그레이스, 나, 케이든, 아이린 순으로 이어지는 불침번 끝에 어둑한 동굴 속에서 아침을 맞이한 우리는 골렘의 마석과 의뢰를 받은 채집 물품들을 바리바리 챙겨 탑 밖으로 나갔다.
슬슬 20층의 후반대에 진입하니 되돌아가는 것 또한 일이네. 초원과 숲과 달리 이리저리 돌아가는 길을 통해 나가야 하니 같은 층수라 해도 이동에 시간이 더 걸린다. 한세아가 마력 마킹인 척 미니맵을 켜지 않았더라면 탑 밖을 나서자마자 휘영청 떠오른 달밤을 맞이할 뻔했어.
“앞에 고블린 무리가 있는 것 같은데… 무시하고 지나칠까? 조금 돌아가더라도 전투를 피하는 게 더 빠를 것 같아.”
“그래요, 언니. 그러면… 좀 더 가다가 오른쪽 길로 빠지면 되겠다.”
그래도 유능한 탐색꾼 그레이스가 몬스터의 기척은 귀신같이 알아차려서 다행이다. 이거, 파티에 도적을 넣은 플레이어들은 후회 좀 하겠는데? 후반에 도적이 힘을 써야 할 함정 따위가 나오지 않는 이상 궁수의 성능이 너무 우월하다.
그레이스가 몬스터의 위치를 파악하면, 즉시 마법을 쓰는 척 미니맵을 열고 경로를 수정하는 한세아. 뒤풀이 파티에 대한 기대감 때문인지 발걸음이 참 가벼워 보인다.
어차피 의뢰도 전부 끝마쳤겠다, 피할 수 있는 몬스터는 전부 피하고 최소한의 전투로 길을 뚫으며 아래로, 다시 아래로. 동굴의 눅눅한 공기를 마시다 말고 숲의 상쾌한 공기를 맡으니 기분이 좋아진다.
“흐으, 여기만 오면 긴장이 탁 풀려.”
“여기도 탑 안쪽이긴 한데요….”
나 말고 다른 일행들도 그런지 다들 자연스럽게 기지개를 켜며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어둑한 동굴에서 나와 햇빛이 찬란한 숲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니 입꼬리가 꿈질거리는 일행들.
몬스터 또한 드물어져 평화로운 상황이 되자 궁금하다는 듯 한세아가 작게 중얼거린다.
“20층의 게이트에서 21층의 통로로 향하는 길은 몬스터가 거의 없지 않아? 기분 탓인가…?”
“아무래도 숲의 몬스터들은 대부분 짐승형이라 그런 것 같다. 사람의 인기척이 너무 자주 느껴지니까 짐승형 몬스터들은 멀어지고, 오크 사냥꾼도 부담을 느끼는 거지. 물론 새로 생겨난 놈들은 모험가들에게 덤벼들겠지만.”
“지금처럼? 저 앞의 수풀 더미에 이끼늑대가 웅크려 있네.”
한세아의 질문에 내가 대답을 해 주자, 가볍게 대꾸하는 그레이스. 생각보다 거리가 가까운 걸 보니 아무래도 방금 생겨난 따끈따끈한 이끼늑대인가보다. 마음 같아서는 무시하고 지나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방금 태어난 녀석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모양이다.
크흥, 깨엥―!
맹수의 본능으로 목덜미를 노린 회심의 일격의 대가는 당연하게도 패시브의 반사 데미지. 수풀에서 뛰쳐나와 마석으로 변한 이끼늑대를 주워든 뒤 우리는 탑 밖으로 나왔다.
퀴퀴하고 눅눅한 동굴의 공기와 상쾌한 숲의 공기에 이어 코에 파고드는 건 갓 구워진 고소한 빵의 향기. 게이트 주변에 요깃거리를 들고 온 모험가가 있는지 어둑하게 지는 해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배가 고파진다.
“의뢰부터 빨리 완료하고, 바로 여관으로 가자.”
한세아의 말에 한마음이 되어 고개를 끄덕거린 여자들. 전투를 최소화해서 그런지 다들 쌩쌩한 것 같네. 1박 2일의 모험을 끝마쳤으니 남은 것은 정산과 뒤풀이뿐.
엘리스는 쉬는 날인지 얼굴이 낯선 접수원에게 두둑한 은화 자루를 받아 운수 좋은 놈팽이 여관으로 향했다. …귀신같이 따라붙은 카메라 드론과 함께.
대체 내 얼굴을 왜 저렇게 찍는 거야.
언제나처럼 운수 좋은 놈팽이 여관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여급이 예쁘고 음식이 맛있으니 주머니에 여유가 있는 모험가는 무조건 여길 오게 되어 있거든. 거기에 그 예쁜 여급들이 흥미로운 모험담만 있으면 서비스를 팍팍 주니 다른 곳에 갈 이유가 없다.
“다섯 명, 자리 있나?”
“어서 오세요! 다섯 분이라면, 저기 구석 테이블 하나 마침 비네요. 구석 자리로 괜찮으시겠어요?”
재수가 없었다면 꽉 차서 조금 기다려야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운이 좀 따라줬는지 마침 딱 비어버리는 구석의 큰 테이블. 술에 얼큰하게 취한 모험가들이 뿔뿔이 흩어지며 누군가는 가게 밖으로 나가고, 다른 몇 명은 여급과 함께 2층으로 올라간다.
그렇게 빈 자리에 안내를 받아 착석하는 일행들. 왁자지껄한 주변 분위기에 어느 정도 동화되었는지 다들 양 뺨이 살짝 상기되어 있는 게 보인다.
분위기에 취한다는 말이 있고 전염된다는 말이 있듯이 밝고 활기차고 미소로 가득 찬 공간에서 뜨끈한 온기에 몸을 녹이니 다들 헤벌쭉 입꼬리가 가벼워진 상황. 어둑하고 퀴퀴한 동굴과 비교하자면 이곳은 천국에 가깝지 않은가.
“주문은 뭘로 하시겠어요?”
“다들, 술 마실 거지?”
취향에 따라 로스트 치킨에 스테이크 등 든든하게 배를 채워 줄 음식을 시키고 각자 시원한 맥주 한 잔씩. 회식에 어울리겠다는 마음인지 아이린도 주저 없이 술을 시킨다.
일행에 여자가 셋 있어도 나와 케이든이 마음에 들었는지 주문을 받은 여급이 과장되게 골반을 씰룩 샐룩 흔들며 주방으로 향한다. 물론 저 여급에게는 미안하지만, 저 유혹에 넘어갈 사람은 우리 일행 중 없겠지.
나야 오늘은 그레이스와 함께할 확률이 엄청나게 높고, 갈색 곱슬머리 청년은 사실 남장 중인 은발 벽안의 미소녀니까. 서양 포르노 배우에 버금갈 저 풍만한 골반 흔들기도 옆 테이블 모험가들의 마음을 뒤흔들 뿐, 우리 테이블에는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우리 리더가 건배사라도 하는 건 어때?”
“에이, 언니!”
물론 눈길을 잡아끄는 건 부정할 수 없어 잠시 시선을 주는 동안 웃고 떠들며 이야기를 나누는 일행들. 워낙 손님이 많아서 그런지 미리 구워둔 것 같은, 적당히 따듯한 음식이 나오자마자 한세아가 맥주잔을 번쩍 치켜든다.
역시 구독자 수가 수십만 명인 사람은 끼가 다르다고 해야 할까, 그레이스의 말에 내빼는 척하더니 술잔을 잡자마자 일말의 주저도 없는 모양새. 모르는 NPC들에게 한턱낸다는 말은 꽤 어렵게 꺼냈던 것 같은데 일행들 앞에서는 입이 가벼워지나.
“늘 순조로운 우리들의 모험을 위하여!”
“아하핫! 한나, 방금 되게 모험가 아저씨 같았어!”
“아, 진짜! 언니가 하라고 그랬으면서!”
연애 상담을 핑계로 붙어 다녀서 그런지 훨씬 친밀해진 듯한 그레이스와 한세아. 두 사람이 별것 아닌 농담을 던지며 깔깔 웃자 그 모습이 보기 좋았는지 아이린 또한 배시시 웃으며 맥주잔을 살며시 부여잡는다.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시청자들이 왜 방송을 안 켰냐며 사방팔방 땅바닥을 내리찧으며 울부짖지 않을까.
다음번 한세아가 방송을 키게 되면, 슬쩍 지난번 회식 자리의 이야기를 꺼내야지. 요즘 일과가 끝난 뒤 자꾸 카메라를 내게 붙여 귀찮게 한 사소한 복수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골려줄 수 없다면 시청자들을 이용할 수밖에.
“아무튼, 마시자!”
쨍―!
투박한 유리잔끼리 맞부딪치며 시원한 소리를 낸다. 물론 왁자지껄한 근처 모험가들의 고함에 가까운 수다 소리에 곧바로 묻혀버렸지만. 잔을 들어 올려 건배를 한 번 하는 사이에 벌써 몇 명의 과장 섞인 모험담을 듣게 되는지 모르겠네.
그것도 나와 관련된 이야기가 등 뒤에서 들려오니 귀가 좀 간지럽기도 하고.
“어, 골렘이, 돈이 된다 이 말이야!”
“21층 이야기죠?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술에 잔뜩 취한 뒷자리의 모험가가 낄낄 웃으며 잔을 들어 올린다. 벌써 거나하게 취했는지 얼굴이 잘 익은 대추처럼 붉은색이네. 턱수염에 맥주 거품을 잔뜩 묻힌 남자는 술잔을 쥐지 않은 다른 손에 조금 익숙한 물건을 들고 여급에게 제 모험담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강철 골렘의 어깨 기어를 든 채.
내가 매입하기로 한 건 바위 골렘의 마석뿐인데, 저 남자의 손에 들린 건 강철 골렘의 부산물. 우리 때문에 황금 골렘이 다시는 등장하지 않으니 어찌어찌 바위 골렘과 강철 골렘을 전부 사냥한 모양이다.
“21층의 동굴 벽을 자세히, 아주 자세―히 살펴보면은, 반들반들한 장치가 있단 말이야.”
“어머? 그런 게 있다고요?”
“그러엄! 그 뭐냐, 유명한 상급 모험가 양반이 아래층부터 싹싹 흩으면서 뭘 자꾸 찾아내잖아. 그 커다란 늑대나 오크 군대 같은 거. 동굴에도 그런 숨겨진 게 있다, 이거지!”
바로 뒷자리인 데다 목청이 커서 우리 테이블에도 그의 말이 들리는 상황. 깔깔 웃으며 술을 마시던 우리 일행들도 조용히 고기를 뜯으며 취객의 무용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다른 모험가의 입에서 우리 일행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 그게 모험가로서 명성을 체감하는 첫 번째니까. 개인 의뢰를 맡기겠다며 상인들이나 귀족들이 찾아오는 것과는 결이 다른 느낌이지.
“저거, 롤랑 이야기지?”
“손에 든 거, 강철 골렘의 잔해인가요? 꽤 실력이 있는 모험가인가 봐요.”
혹여나 뒤 테이블이 들을세라 목소리를 낮추고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는 일행들. 건배할 때까지 계속 무뚝뚝함을 유지하던 케이든도 지금만큼은 연기력이 부족한지 입꼬리가 움찔거린다.
등 뒤에서 이야기를 엿듣는 관객이 다섯 명이나 생겼다는 것도 모르고 입에서 침을 튀겨가며 이야기를 계속하는 턱수염 모험가. 시끄러운 여관 때문에 소리를 지르듯 이야기를 계속하니 목이 타는지 맥주를 반쯤 마시고, 반쯤 흘리며 벌컥벌컥 마신 뒤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아무튼, 그 장치에 마력을 흘려 넣으면 동굴이 요상하게 변하면서 덩치 커다란 골렘이 나오거든. 칼질을 백날 해 봐야 먹히지도 않는 커다란 골렘이 쿵쿵쿵, 막 다가온다고, 오오―”
그러나 그의 이야기가 끝까지 이어지진 않았다. 워낙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지 고개가 앞으로 꺾이며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으니까.
그 모습에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신 여급이 주변을 슬쩍 둘러보더니 남자를 부축해 2층으로 올라간다. 어지간히 골렘 이야기가 궁금했는지 몸으로 붙잡아 둘 생각인가. 금화를 두둑하게 만진 호구를 벗겨 먹을 겸 듣고 싶은 모험담도 들을 수 있으니 여급으로선 손해 보는 일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