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 열쇠니까 당연한거지 ㅋㅋㅋㅋ
-개당 10골드라니까 내 용병플레이가 존나 초라하게 느껴짐
-지금 겜하는 애들 슬슬 금화 처음 만져볼텐데
-어디에든 사용하니까 계속 리젠되는 거 아니겠슴?
-그래서 오늘 뱅송은 여기까지?
“음, 오늘 방송은 여기까지. 솔직히 불침번 서면서 몇 시간 동안 노가리만 까는 방송을 보고 싶지는 않지? 그런 부분은 나 혼자서 넘기면 되니까.”
그렇게 차근차근 올라온 25층의 한구석에서 한세아가 스튜를 호로록 마시며 방송을 종료한다. 아침과 점심은 몸을 움직여야 하므로 건더기가 없는 묽은 수프에 빵, 저녁은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 고기가 잔뜩 들어 있는 걸쭉한 스튜.
가정의 손맛이라 해야 할 것 같은 아이린의 요리를 먹으니 뱃속으로부터 퍼져나가는 온기가 따스하게 몸을 데운다. 칭호는 ‘예비 성녀’면서 요리는 1★요리사에 비등할 정도라니. 물론 수프와 스튜라는 한정된 메뉴에 한정된 이야기지만.
신전에서 아이들을 위해 요리를 거들다 보니 대량으로 끓일 수 있는 음식에 익숙해진 걸까. 다른 일행들도 행복한 얼굴로 스튜의 고깃덩어리를 옴뇸뇸 씹어 삼키는 게 보인다.
“생각보다 의뢰가 빨리 끝났네. 동굴 버섯들도 군락이 있을 줄이야. 초원이나 숲까지는 익숙하지만, 동굴은 공부를 좀 더 해야겠어.”
“애초에 이런 거대한 동굴은 쉽게 접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니까요.”
“바깥의 몬스터를 흉내 냈다는 건, 탑 바깥에도 이런 커다란 동굴이 있다는 뜻이겠죠? 그건 조금 궁금하네요.”
“듣기로는 왕국의 남부 어딘가에 이런 거대한 동굴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모험가들이 그 안에서 광석이나 채취할 수 있는 게 있는지 탐색하느라 꽤 떠들썩했다죠.”
“헤에, 진짜로 있는 장소로군요. 역시 여신님의 말씀대로….”
연금술사에게 받은 발광이끼와 야광버섯 따위의 채집 의뢰를 생각보다 빨리 끝마쳐서 기뻐하는 그레이스와 거대한 동굴에 호기심을 느끼는 아이린과 케이든이 식사하며 도란도란 담소를 나눈다.
그러던 중 방송을 종료한 한세아가 슬그머니 그레이스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속삭인다. 방송을 끈 한세아와 그레이스의 조합이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 속닥속닥 이야기를 나눈 그레이스가 아이린에게 스튜를 한 그릇 더 받더니 이쪽을 향해 걸어온다. 이쪽을 등진 척하지만 다시 카메라 드론을 꺼내든 음흉한 한세아와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나를 향해 다가오는 뺨이 발갛게 달아오른 그레이스.
‘생각보다 진심이네, 저거.’
어째서 한세아는 이 게임에서 커플링에 저리도 진심일까. 동영상 사이트에 올라온 그녀의 과거 영상을 보면 딱히 누구와 누구를 이어주는, 그런 부류의 덕질은 하지 않던 것 같은데. 가상 현실 게임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드라마 같은 거라 생각하나?
수상할 정도로 나와 그레이스를 이어주는 데 진심인 한세아. 이렇게 대놓고 움직이니 슬슬 아이린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챈 모양이다. 스튜를 떠 준 다음 한세아의 옆에서 이쪽을 대놓고 쳐다보고 있으니까.
관심이 없다 할지, 무뚝뚝함을 연기하는 중인지 모를 케이든만이 검을 손질하고 있을 뿐. 두 관객의 시선에 용기를 얻은 그레이스가 내 옆에 털썩 주저앉는다.
“벌써 다 먹은 건 아니지, 롤랑?”
“다 먹었어도 같이 앉아 있을 순 있지.”
“그래? 그러면 괜히 한 그릇 더 받아 왔나?”
“배부르면 덜어 줘, 나눠 먹으면 되니까.”
울퉁불퉁한 동굴 바닥에 쿠션으로 사용하기 위해 깔아 둔 두꺼운 모포 위에 앉아 이미 깨끗하게 비워버린 스튜 그릇에 그레이스가 들고 온 스튜를 나눠 받는다. 나란히 앉아 음식을 나눠 먹기만 하는 단순한 모습이지만 관람객들에겐 조금 의미가 다른가 보다.
등 뒤에서 어머어머, 히야- 하는 의미 불명의 감탄성이 조금씩 들려오거든. 그러거나 말거나 그레이스는 팔뚝과 팔뚝이 마주 닿는 거리에서 천천히 숟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고개만 돌리면 숨결이 닿을 거리, 스튜의 고소한 내음 사이에서 달짝지근한 체향이 느껴질 그 가까운 거리감에서 스튜의 온기와는 다른 따듯함이 느껴진다. 스튜를 먹기 위해 팔을 움직일 때마다 살짝 불편함이 느껴질 정도지만, 그레이스는 그 불편함조차 마음에 드나 보다.
“…마왕이라는 녀석 말이야, 강하겠지?”
“그야, 강하겠지.”
느긋한 침묵 속에서 그레이스가 대화의 주제로 선택한 것은 마왕.
아무래도 다 같이 여신을 만났다는 생각에 사명감 같은 게 생기기라도 한 걸까. 그레이스의 안에서는 우리 파티가 탑을 모험하는 게 아니라, 마왕을 무찌르고 세상을 구하는 게 디폴트 값으로 정해진 것 같았다.
스튜 그릇을 탄탄한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선 손가락을 꼬물거리더니 말을 이어나가는 그녀.
“뭐라고 해야 할까, 현실감이 없네.”
“음?”
“얼마 전까지는 화전민 마을 출신 사냥꾼으로 탑의 저층에서 고블린을 사냥하네, 마네 이런 거로 파티의 리더랑 싸우고 있었잖아.”
“아, 그때 그… 여검사.”
“그런데 지금은 여신님을 만나서, 신성력으로 축복을 받고 마왕이랑 싸울 준비를 하고 있다니. 누군가가 내게 예언이랍시고 이런 걸 말해주었다면 마을에 가끔 오는 사이비라 생각하고 쫓아냈을 텐데.”
그렇게 느릿하게 이야기를 하면서도 쉴 새 없이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이 거슬려 조용히 손을 잡아 주자 조용해진 그레이스. 술이 들어갔을 땐 옷을 벗어 던지며 육탄공세를 펼치더니, 맨정신일 땐 참 소녀다운 모습을 보여주는구나.
마음 같아서는 나도 진도를 더 빼고 싶지만… 머리 위에 떠 있는 카메라 드론과 등 뒤에서 맹렬히 시선을 보내오는 두 관객이 조금 거슬리네.
25층을 지나 26, 27, 28… 탑의 층수가 오르며 적이 조금씩 강해지고 더 큰 무리가 등장하기 시작했지만 역시나 한세아의 탑 등반은 순조로웠다.
많으면 서른 마리가량 나오던 고블린과 코볼트가 사십을 넘어 오십 마리씩 몰려다니고, 동굴 거미의 껍질이 화살을 튕겨 낼 정도가 되었다지만 점차 탑에 숙련되는 일행들의 솜씨는 그 정도의 고난은 쉽사리 이겨 낼 정도가 되었으니까.
수가 많아져 봐야 차근차근 정리하면 될 일이고, 껍질이 튼튼해진다 해도 입안까지 강인해지지는 못한다. 한세아의 마법 숙련도부터 그레이스의 궁술과 케이든의 검술이 나날이 늘어 중급 모험가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을 수준이 된 나날들.
‘연예인들은, 참 대단한 사람들이었구나.’
그런 평온한 일상 중 내게 닥쳐온 고난이 있었으니, 바로 사생활 침해다.
그레이스를 언니라 부르며 친밀하게 대한다 해도 한세아에게 있어 그레이스는 결국 게임 속 NPC. 애착을 두고 친밀하게 행동하며 하나의 인격체처럼 대해준다 해도 진짜 사람을 대하는 것과는 다르다.
깔보고 무시하거나 마음대로 막 부려먹는다는 뜻이 아니다. 한세아가 자신의 욕망에 좀 귀찮을 정도로 솔직해졌다는 뜻이지.
현실에서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였다면 무례한 게 아니냐고 따지고 들 수 있을 법한 행동들. 데이트를 몰래 뒤따라오고, 술을 마시고 함께 여관방을 잡도록 유도하는 등의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언니, 이번 주말에는 정비도 할 겸 모험을 쉬자고 해 볼까?”
“모험을 쉬자니……, 아?”
지금 저 모습만 봐도 그렇다. 상급 모험가의 초인적인 감각을 조금 얕잡아 보는 것인지, 아니면 들켜도 밀어붙이겠다는 심보인지 대놓고 쑥덕쑥덕 작당 모의를 하는 두 사람. 내게서 조금 먼 곳에서 쑥덕거릴 뿐이지 아이린과 케이든에는 숨길 생각도 없는지 아주 대놓고 머리를 맞대고 있다.
네 명 중에서 두 명이 그러고 있으니 나머지 두 사람이 호기심을 느끼는 건 당연한 절차. 친목회를 위한 술자리를 가지려 할 때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게 된 아이린도, 무뚝뚝한 척하지만 속마음은 중2병 소녀인 케이든도 슬금슬금 귀를 기울이는 게 보인다.
수줍어하면서도 내빼는 일은 전혀 없는 그레이스와 일단 무슨 핑계를 대더라도 나와 그레이스를 같이 있게 하려는 한세아의 조합. 이걸 고난이라 표현한 것은 내가 그레이스를 싫어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이 씨발 카메라 때문이지.
‘차라리 방송을 켜….’
한세아는 프로 방송인이다.
게임에서 승부욕을 느끼는 것과 비슷하게, 방송에 있어서는 꽤 진심인지 전문가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그녀. 어여쁜 미모를 믿고 마네킹처럼 서 있는 게 아니라 망가질 땐 망가지고, 들이받을 땐 시청자도 받아버리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지.
그렇기에 방송이 켜져 있는 동안 나는 카메라로부터 안전하다. 문제는 방송이 끝난 뒤, 지루한 부분을 혼자 넘기겠다며 시청자들에게 비밀로 하는 상황. 촬영해야 할 게 없으니 카메라 드론이 스토커처럼 나를 따라다니니 귀찮아 죽겠어.
딱히 한세아가 나를 계속 관찰하는 건 아니다. 내 옆에는 카메라 드론을 띄워 두고, 그레이스의 곁에는 자신이 자리하는 효율적인 동선이지. 대신 그 덕에 사주경계를 핑계로 등 돌린 채 몰래 인터넷을 할 때마다 손가락을 숨겨야 한다는 불편함이 생겼다.
“롤랑, 어때? 내일 모험이 끝나면 지난번 못했던 뒤풀이를 하자.”
“나야 좋지. 생각해 둔 가게라도 있어?”
팔짱을 끼고 카메라 드론에 보이지 않을 각도로 열심히 웹서핑하고 있으니 인벤토리 정리를 하며 그레이스와 수다를 떨던 한세아가 내게 다가온다. 목적은 벌써 두 번이나 취소되어 버린 친목회 술자리.
첫 술자리는 한세아가 용병과 얽히며 모험가의 술 파티 비슷한 게 되어버려서 미뤄졌고, 두 번째 술자리는 아이린까지 함께 와서 이동하려다 골렘에 대한 제보를 듣느라 자연스럽게 취소되었지.
슬쩍 시선을 돌려보니 저 멀리서 내게 반짝반짝 빛나는 시선을 보내오는 세 명. 그레이스야 그렇다 치고 아이린과 케이든까지 꽤 기대하는 걸 보니, 다른 의미에서의 기대감이 좀 보인다.
뭐, 동료와 함께 하는 술자리에 대한 로망이라든가 모험가답게 모험이 끝나고 다 함께 마시는 술 한잔에 대한 로망 같은 것들이 있겠지.
“일단 운수 좋은 놈팽이로 가자는 말이 나왔어. 근방에 있는 식당 중 요리가 제일 맛있다 그러더라고.”
“비싼 만큼 값어치를 하는 곳이니까.”
운수 좋은 놈팽이보다 맛있는 술과 음식을 찾으려면 모험가를 상대로 장사를 하는 여관이 아니라, 격식 있는 레스토랑을 찾아야 할 수준. 여급들이 대놓고 몸을 파는 창녀라는 점이 아이린에게는 조금 꺼림칙하겠지만… 다 함께 즐기는 뒤풀이 회식에서 맛없는 음식을 먹는 것보단 낫겠지.
애초에 신전이 있는 도시에서 버젓이 모험가를 상대로 대놓고 매춘을 하는 것만 봐도 불법이라든가 신성 모독의 영역은 아니다.
“그러면, 운수 좋은 놈팽이로?”
“그래. 그보다 맛있는 집을 찾으려면 어디 격조 높은 레스토랑에 가서 와인잔을 기울여야 할 거다.”
“드레스 코드에 맞춰서 값비싼 정장과 드레스 같은 걸 입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