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치가 커지고 재질이 단단해진 만큼 주먹도 훨씬 묵직해졌지만, 그래 봐야 마력을 통해 강화된 게 아닌 질량만을 담은 골렘의 주먹.
반사 데미지가 터지지 않도록 가볍게 손목 부분을 잡아서 막아버리자 움칫거리며 팔을 빼내려고 발악한다. 물론 아무리 안간힘을 써 봐야 내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한 일. 마력으로 육체를 강화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마력을 연료 삼아 움직이는 골렘이니까.
“아이 중에, 장난감 인형이나 목각 병정의 팔다리를 망가트리는 짓궂은 녀석들도 있거든요.”
“장난감치고는 좀 크긴 해도, 이야기를 들으니까 좀 비슷해 보이네.”
힘은 내가 더 강하다 해도 골렘 자체의 덩치가 있으니 자세가 제한된다. 그러니 선택한 방법은 비틀어 버리는 것.
붙잡은 골렘의 오른 손목을 양손으로 힘주어 잡고 한 방향으로 돌리고, 또 돌린다. 마치 나사를 풀거나 음료수의 병뚜껑을 따듯 까드득까드득 거북한 금속음을 들으며. 무술을 아는 사람이었다면 제 어깨가 박살이 나는 걸 막기 위해 벽을 박차고 몸을 회전했겠지.
하지만 상대는 골렘.
“저게 저렇게 떨어지네.”
“하나 떼어냈으니 들고 가서 살펴봐.”
제 어깨가 180도를 넘어 360도 뒤틀려 결국 끊어질 때까지 다른 쪽 주먹을 내지를 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반항이랍시고 내지른 주먹 또한 똑같은 절차를 밟았고.
바위 골렘과는 다르게 정성을 들여 조립했는지 뜯겨 나간 어깨 부분에서 무언가 기어 같은 게 보인다. 문제는 힘으로 뒤틀어 뜯어낸지라 볼트와 너트인지 축에 끼워진 기어인지 알아볼 수 없다는 점.
“…한나, 그거 인벤토리에 들어가?”
“어? 들어갈 것 같기는 한데. 그건 왜?”
“강철 골렘은 팔다리의 관절부에 기계 장치가 달린 것 같아서. 팔은 망가트렸으니까 다리는 조금 곱게 떼어서 마탑에 팔아볼까 했지.”
“…사람이 성공하려면 저렇게 악착같이 살아야 하는구나.”
-몬스터를 사냥하고 전리품을 파는 게 아니라 산채로 팔다리를 떼어서 팔아?
-골렘인데 산채로가 맞나?
-몬가 다르다는 건 알아차렸는데 다르니까 팔겠다는 발상은 시발 ㅋㅋㅋ
-저렇게 알뜰하게 사니까 금화를 잔뜩 모아둔거지
-몬스터가 마석 대신 시체를 남겼으면 뭘 팔았을지 궁금해지네 진짜 ㅋㅋㅋㅋ
내 말에 일행들이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입을 떡 벌리고 나를 쳐다본다.
몬스터가 남긴 거면 그게 부산물이지, 뭘.
팔다리를 전부 잃은 강철 골렘이 구슬픈 소리를 내며 바닥을 나뒹군다. 떼어 보고 나니 확실히 바위 골렘과 다르다는 게 느껴지네. 바위 골렘이 돌덩이에 팔다리를 붙여둔 모양새였다면 강철 골렘은 외형은 비슷해도 관절부에 기어와 축이 존재하는 걸 알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몸통도 뜯어내서 강철 골렘의 마석을 바위 골렘의 마석과 비교하고 싶었지만… 이 뒤에 황금 골렘이 나온다고 하니 그건 참아야겠지.
“바위 골렘도 튼튼했는데, 이건 훨씬 더 단단하군요.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검객이라면 흠집도 못 낼 것 같습니다.”
“우왓, 무거워…!”
바위 골렘과 강철 골렘의 몸체는 고이 복도 벽에 기대어 세워두고, 떼어낸 팔다리는 일행들의 장난감이 되었다. 칼로 쿡쿡 찔러보는 케이든부터 인벤토리에 집어 넣어주려는 듯 들어 올리다 화들짝 놀라는 그레이스까지.
한세아 또한 으스러진 강철 골렘의 팔을 인벤토리에 낑낑대며 집어넣은 뒤 다리 부분의 관절을 관찰하며 시청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10분이라는 시간은 얼핏 보기에 짧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텅 빈 복도에 서서 보내기에는 좀 긴 시간이니까.
“바위 골렘은 그냥 돌덩이더니, 이건 되게 복잡하고 정교하게 만들어놨네. 황금 골렘 상대로도 10분 버티면 막 마법사 보스 같은 게 나오려나? 아, 골렘은 연금술사 쪽이려나?”
-몰?루 그건 마법사 겸 연금술사인 니가 알아야 하지 않을까?
-마탑이랑 연금술 테크 탔다고 해도 골렘은 한참 멀었지
-양키 애들이 골렘으로 메카물 만들겠다고 프로젝트 시작했는데 5년 걸릴 듯?
-주직업 마법사 부직업 연금술사 골라놓고 그걸 우리한테 묻네 니가 1위야
-정석적으로는 연금술인데 게임에선 게임사 맘대로지 머
그렇게 느슨하지만, 긴장을 완전히 풀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10분.
그토록 기다리던 황금 골렘이 복도 저 너머에 등장한다.
잔뜩 흥분했던 모험가 청년의 말대로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시커멓고 매끈한 복도의 벽에 마력 회로가 좌르륵 새겨진다. 바위 골렘이 대충 2m, 강철 골렘이 2.5m 정도 되어 보인다면 저건 4m는 되어 보이네.
강철 골렘보다는 확연히 거대하지만, 전에 만났던 오우거보다는 좀 작아 보이니까. 저 커다란 몸뚱이가 정말 황금이면 팔다리를 뜯어버리는 것으로 골드를 양산할 수 있겠지만… 그건 게임사가 막았으려나.
“일단, 저놈 상대로도 10분을 기다려 볼까? 저 다음 녀석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러자. 어차피 골렘을 부수는 건 10분이 지나서도 가능하니까.”
어둠 속에서 위압적으로 번들거리는 황금색 몸체. 다른 골렘들처럼 똑같이 느릿하지만 배는 커진 덩치 때문에 복도를 쿵쿵 울리는 발소리. 간만에 거인종 비슷한 놈을 상대하니 손이 근질거리는 게 느껴진다.
물론 21층에서 등장한 놈이라는 걸 생각하면, 반사 데미지 서너 대 정도에 박살 날 수 있으니 조심해야겠지.
미로 안에서 찾아다니는 데 1시간, 기다리는 데 20분이 걸린 귀한 몸이다. 실수로 죽였다가는 또 몇 시간이고 동굴 벽을 살펴보며 돌아다녀야 해. 그리 생각하며 방패도 치우고 황금 골렘의 주먹을 받아 낼 준비를 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저거, 잔해만 팔아도 엄청 비쌀 것 같지 않아?”
“아, 나도 그 생각 했는데.”
등 뒤에서 들려오는 그레이스와 한세아의 잡담을 들으며 느릿한 황금 골렘의 앞으로 마중을 나갔다. 목과 머리가 없이 몸통에 팔다리만 붙여둔 납작 널찍한 모양새는 그대로지만 덩치가 4m에 가깝다 보니 훨씬 더 올려봐야 하네.
덩치가 커지고 몸체가 황금으로 바뀌었다 해도 안에 내장된 전투 프로그램은 변한 게 없는지 똑같이 오른손을 위로 번쩍 치켜드는 녀석. 천장에 닿을 정도로 높게 치켜든 손이 바람을 가르며 내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고―
“…음?”
“뭐야, 뭐가 번쩍거렸는데?”
무언가 번쩍거리더니 후폭풍과 함께 황금 골렘의 팔이 처참하게 뭉개졌다.
“롤랑, 괜찮아?”
“…아무래도 주먹 쪽에 충격파와 관련된 마법진이 새겨져 있던 것 같은데.”
골렘이 주먹으로 나를 내리찍으면, 그 손목을 받치듯 잡아채는 것이 제압의 요령이었다. 날아오는 무언가를 손으로 잡아내는 것은 피격 판정이 아니라서 반사 패시브가 터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금 골렘을 상대로는 그게 불가능했다. 주먹을 막아 세우는 순간 골렘의 주먹에서 불빛이 번쩍거리며 무언가가 내 손바닥을 후려쳤거든.
무거운 걸 붙잡기 위해 마력으로 강화한 상태라 데미지를 입지는 않았지만, 잡기 판정이 피격 판정이 되어버린 것이 문제. 방어력만 무식하게 높고 체력은 낮다는 가설이 맞는지 반사 데미지를 받은 골렘의 오른팔이 손아귀 안에서 박살이 나 무너져 내렸으니까.
“저렇게 양팔이 없으면 발로 차려 들까?”
“그래도 팔 부분만 따로 부서져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새 미로를 찾아 동굴을 또 한참 돌아다녀야 했을 거야.”
그나마 다행인 점은 한세아의 말대로 쇼크웨이브 비슷한 걸 발사한 골렘의 양팔만 박살이 났다는 점. 아니었다면 또 몇 시간을 헤매야 할지 감도 안 잡힌다.
다른 의미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뒤 황금 골렘의 다리는 최대한 손상이 없도록 뜯어내려고 가까이 다가가자 걸음을 미적대듯 움직이는 녀석. 아무리 봐도 처음 등장할 때 보다 훨씬 보폭이 줄었는데?
수상함을 느끼고 슬쩍 다리와 몸통만 남은 골렘을 위아래로 쳐다보자 명백히 움찔거리는 녀석. 덩치가 크다 보니 흠칫거리기만 해도 드그극- 하고 커다란 다리가 바닥 긁는 소리가 난다. 그 모습에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일행들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챈 상황.
“저거, 반응이 이상하지 않아?”
“그러게요. 분명 바위 골렘과 강철 골렘은 팔다리가 다 떨어져 나가도 그저 앞으로 다가왔는데.”
수상함을 느낀 일행들이 무기를 쥐고 내 뒤에 모여들자 아예 발걸음을 멈춰버리는 황금 골렘. 앞선 녀석들과는 명백히 다른 모습에 일행들이 기대 반, 불안감 반 섞인 눈길로 녀석의 커다란 몸체를 올려다보았다.
《대화를》
“어멋?!”
“마, 말을 하네?”
《대화를 하자 인간들이여》
※
골렘이 말을 한다.
길드로 돌아가 엘리스에게 보고하면 또 술 처먹었냐고 한 소리 듣겠네. 아니, 뭐 판타지 게임 속 세상이니까 골렘이 말을 할 수도 있겠지. 입도 스피커도 없는 주제에 어떻게든 살겠다고 마력을 통해 소리를 전하는 모양새가 신기하긴 하네.
신기한 건 우리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는지 겁도 없이 골렘의 앞에 옹기종기 모인 모습이 인상적이다. 골렘의 키가 워낙 크다 보니 모여 있는 모습이 유치원생과 교사 같아.
“무슨 대화를 하자는 거야?”
《너희들의 정체에 대한 것이다》
21층의 서브 스토리인지, 아니면 탑과 관련 있는 메인 스토리인지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는 황금 골렘. 파티의 리더이자 플레이어인 한세아가 자연스럽게 골렘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자 모두가 귀를 기울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