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7화 (117/175)

30층을 노리는 베테랑들이 골렘에 대한 주의 사항까지 엘리스에게 다 전해 듣고선 방심을 해서 당했을 리는 없으리라. 그렇다면 우리 파티가 겪지 못한 이상 현상이 있었다는 건데….

 “와, 저거 약간 떡밥인가? 슬슬 골렘이 위험해진다든가, 골렘에 숨은 기믹이 있다는 서브 퀘스트식 떡밥. 근데 미로를 그렇게 걸으면서 짧으면 십 분, 길면 한 시간씩 돌아다녀도 발견을 못 했는데 언제쯤 저 떡밥을 회수할 수 있으려나.”

-그래도 23층쯤 오니까 뭐라도 진행되나

-마석 기믹이 있는 건 알겠는데 대체 언제 써먹냐고오오ㅗㅗㅗㅗㅗ

-이대로 마석 백 개정도 모으면 롤랑 주머니 하나 털어먹는거 아니냐

-근데 빨간 마석이면 또 특이하다고 귀족한테 팔아먹는거아님?

-제발 25층에서 뭐라도 나왔으면 함

엘리스의 말을 들은 한세아 또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다. 미로에서 다른 몬스터가 같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꼭 1 미로 1 골렘이 유지되고 있었거든. 튼튼한 것 말고 위협적인 게 전혀 없는 골렘을 상대로 중급 모험가가 당했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초원이나 숲은 아름다워서 보는 영상미라도 있었지만, 동굴은 워낙 어둑하다 보니 피로감을 호소하는 시청자들.

물론 말은 저렇게 해도 본심은 조명 때문일 것이다. 실시간으로 A.I.에게 검열당하는 채팅창 말고 인터넷에서는 좀 더 적나라한 본심이 적혀 있었으니까. 예를 들어 횃불형 마도구가 너무 어두워서 일행들의 출렁임이 안 보인다든가, 반대로 어둠 속에서 출렁이니 착시 때문에 오히려 좋다는 의견의 대립 같은 거.

…참 한결같은 새끼들이야.

이쯤 되면 한세아의 방송은 세계 최초로 스토리를 진행하는 방송이라 시청자들이 모인 것인지, 방송하는 사람 중 동료 NPC가 제일 예뻐서 시청자들이 모인 건지 궁금해질 지경.

-한 25층에서 중간 보스 나오고, 모은 마석에 따라 기믹이 막 바뀌나?

-21층에서 실종이라는 거 보면 골렘 중에서 특이 개체가 있는거 아님?

-바위 골렘 말고 막 황금 골렘 이런걸 만나야 하는데 지금까지 재수가 없어서 못 만났나?

-캐릭터 가챠운에 전부 다 써서 퀘스트 진행 망한거 신빙성 있네 ㅇㅇ

-여기서 한세아의 나운없어도르가 이렇게 증명된다고?

 “아니, 저놈의 도르도르 때문에 돌아버리겠네. 나 히어로즈 크로니클 시작하기 전에는 그렇게 똥손이니 똥촉이니 놀려대던 사람들 맞아? 거의 뭐 가스라이팅 수준으로 한세아는 운이 없다, 똥손이다 하더니 인제 와서 난리야.”

그런 감상을 하며 고민하는 척 슬쩍 채팅창을 보니 온갖 추측이 다 튀어나온다.

그나마 마음에 드는 가설은 25층 중간 보스설. 스펙이 이상하리만치 강한 보스 몬스터를 클리어한 기믹이나 모아 온 아이템으로 약화하는 건 RPG에서 꽤 자주 있는 패턴 아니겠는가.

설마 시청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너무 운이 없어서 23층까지 오는 열댓 번의 전투 동안 이벤트를 귀신같이 놓쳤으려고.

……아니지, 진짜?

가끔은 그런 게 궁금해질 때가 있다.

낮은 확률로 성공하는 도박성 플레이를, 실패하기 위해 시도했는데 오히려 성공하는 경우. 확률과 무관하게 원하는 것이 절대로 나오지 않고 귀신같이 반대의 결과만 나온다면 운이 좋은 걸까 나쁜 걸까.

당첨을 원할 때는 늘 꽝에 걸리는데, 꽝에 걸려야 하는 순간 기적같이 당첨만 당하는 것. 어찌 보면 무조건 손해를 보는 상황이지만, 확률로 따지자면 한 자릿수 확률도 늘 뚫어버리는 기적의 손 아닌가.

 ―으아니, 나 혼자 하는 중인데 어떻게 전 재산을 다 처박아서 기물 하나가 안나와아아아악!!

또 다른 계획을 세우는 그레이스와 한세아가 발 빠르게 숙소로 빠져나가고, 아이린이 길드에 금화를 내는 나를 보며 다시 한번 내 주머니 사정을 걱정한 뒤 신전으로 향했다. 아직도 연기 중인 케이든은 말없이 사라진지라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볼 수 있게 된 인터넷 창.

시청자들의 채팅을 읽고 있으니 문득 궁금해져서 한세아의 과거 게임 동영상들을 살펴보았다. 가상 현실 게임이 나오기 전, 헬스 영상과 종합 게임을 올리는 그녀의 채널에서.

히어로즈 크로니클을 플레이하기 전부터 삼십만 명이 넘는 구독자를 지녔던 그녀의 채널. 콘텐츠가 아니라 복장에 따라 조회수가 열 배씩 차이 나는 걸 보면 그녀의 시청자들이 끈기와 집념에 가까운 한결같음을 자랑하는 걸 알 수 있었다.

 ―이게 말이 된다고 봐? 아니, 등장 확률이 15%라면서? 근데 20번을 굴려서 한 번이 안 나오면 이게 어? 이게, 음, 확률이 말이 되냐고!!

매트를 깔고 스트레칭을 하는 영상, 다른 여자 방송인과 합방을 하는 영상, 게임을 하다 샷건을 치는 영상, 밸런스 볼이나 폼롤러 위에서 균형 잡기를 하는 영상, 게임 대회에 나가 팀원들과 함께 방송하는 영상까지.

그중 눈길을 가장 끄는 건 몸매가 드러난 운동 영상보다는 사방으로 흩날린 키보드 자판과 그 위에서 오열하듯 머리를 박은 한세아의 썸네일. 검은 자판 위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마치 나뭇가지와 나무 열매처럼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일말의 주저도 없이 재생된 동영상 속에서 분을 이기지 못한 한세아가 양손으로 책상을 쿵! 내리치다 실수로 키보드를 으깨버린다.

 ―이게, 말이, 되냐아악! 아팟! 헤, 헤드셋 선 끊긴 거 아니지?!

키보드를 두드릴 생각은 없었는지 왼손을 붙잡고 끼약- 비명을 지르는 화면 속 과거의 한세아. 실수로 키보드를 내리치고, 아픈 손을 움켜잡고 벌떡 일어났다가 헤드셋의 줄이 뒤로 날아가는 의자에 걸려 휙 벗겨지고 난리가 났다.

내리친 키보드, 벌떡 일어나며 뒤로 날아간 의자, 의자에 끈이 걸린 헤드셋, 고통을 못 이기고 웅크린 한세아. 말로 표현하기엔 너무나 난잡한 화면 너머의 상황과 그 와중에 불운을 이기지 못하고 죽어버린 한세아의 게임 캐릭터까지.

왜 그녀의 별명 중 똥손이 포함되어 있었다며 시청자들이 놀리는지 알 것 같네. 예쁘장한 미녀가 얇은 옷차림으로 운동을 하는 영상의 조회수보다, 그 미녀가 키보드를 두드리다 책상 위를 개박살 내는 영상의 조회수가 높으니 말 다 했지.

그렇게 숙소에서 느긋하게 한세아의 흑역사 같은 동영상을 열심히 찾고 있으니 똑똑- 울리는 노크 소리.

 “저, 롤랑?”

 “롤랑, 안에 있지?”

지난번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함인지 이번에는 그레이스와 한세아가 함께 찾아 왔다. 뒤따라오다 사건에 휘말린 걸 보고도 아무 말 없이 술을 같이 마셨으니까, 내가 전부 눈치를 챘다고 생각하고 그냥 대놓고 밀어주려는 건가.

한세아의 방송인다운 철면피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지금 문을 열어주면 그 철면피스러움과 몸개그를 하며 자빠지는 모습이 떠올라 얼굴만 봐도 웃을 것 같은데. 크흠- 콧바람을 통해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웃음을 밀어 넣은 뒤 숙소의 문을 열었다.

 “오늘도 술, 음?”

 “맞아, 다 같이 마시려고. …다 같이라 해도 케이든 씨는 없지만.”

문 앞에 서 있는 건 역시나 장비를 내려놓고 가벼운 차림이 된 세 여인. 두 명인 줄 알았는데 묘하게 상기된 얼굴의 아이린 또한 함께 문 앞에 서 있었다.

내게도 살갑게 구는 만큼, 언니 동생 하는 사이가 된 여자들의 사이가 내 생각보다 끈끈한 모양. 여신교가 검소함과 청렴함을 가치로 내세운다 해도 완전한 금욕을 요구하는 걸 아니다 보니 두 사람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따라 나왔나.

낯을 가리고 소심하다 해도 이런 동료와의 술자리가 기대되는지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린. 각기 다른 세 미녀가 가벼운 옷차림으로 술이나 한잔하자는데 그 누가 거절할 수 있을까.

 “케이든은 왜?”

 “그, 숙소를 몰라….”

내 질문에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이는 한세아. 처음 만났을 때보다 친해진 데다 공녀의 비밀까지 알게 되어 나름 친밀감을 느끼고 있을 텐데 숙소도 모르는 사이라니. 이 정도라면 케이티 공녀가 생각하는 멋진 모험가 케이든은 무뚝뚝한 검사가 아니라 외톨이 검사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며 한 명이 빠졌지만, 술자리를 취소할 생각은 없어 보이는 일행들과 함께 숙소를 빠져나와 걷는다.

그레이스와 나를 이어주려는 극히 개인적인 취미 생활이라 그런지 방송은 켜지 않은 한세아. 지난번 소동이 일어난 운수 좋은 놈팽이 대신 다른 곳으로 자연스럽게 우리를 안내한다. 하기야 대놓고 여급이 몸을 파는 장소에 수녀를 데려갈 순 없긴 하지.

 “그래도 다행이네.”

 “다행이라니, 뭐가?”

 “오늘은 너희 꼬시려고 시비 거는 놈들이 없을 테니까.”

방금 전까지 한세아의 방송을 보다 와서 그런지, 어째 놀리고 싶어지는 기분이네. 슬슬 늘어나는 모험가들의 무리를 헤치며 길을 걷다 툭 던진 한마디에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이는 일행들.

한세아는 그걸 왜 말하느냐는 듯 나를 째려보고, 그레이스는 애써 웃음을 참으며 내 옆구리를 툭툭 두드린다. 그리고 그게 무슨 이야기냐며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내 소매를 톡톡 잡아당기는 아이린.

친해졌다고 해도 수녀답게 남자를 대하는 게 어려운지, 아니면 몸을 톡톡 두드리는 것보다는 소매를 잡아당기는 게 편해 습관이 된 건지 자연스럽게 내 왼쪽 소매를 잡아 쥔다.

 “지난번에 나랑 그레이스가 술을 마시러 간 적이 있었는데….”

 “아! 롤랑! 그거 진짜 말 할 거야?”

 “애초에 모험가 길드에도 소문이 쫙 났는데, 뭘.”

 “뭐, 뭣? 길드에 그게 소문이 다 났다고?”

 “돈주머니 들고 모험가에게 한턱냈는데 입소문이 안 날 리가 있나.”

게임 속이라 해도 부끄러움을 느끼는지 얼굴이 벌겋게 변한 한세아를 보고 대충 상황 파악을 한 아이린이 부드럽게 웃는다. 과정이 어쩔지는 몰라도 결국 한세아가 술집에서 원치 않는 유명세를 얻었다는 건 알 수 있을 테니까.

그레이스도 귀여운 동생을 놀리고 싶었는지 슬쩍 아이린의 곁에 달라붙어 나 대신 사건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한나가 혼자 술집에 들어왔는데, 도시 밖에서 온 용병이 한나 앞에 앉으면서 막…!”

 “아, 언니이!”

 “어머머, 어떤 남성분이셨나요?”

 “뭐, 딱 봐도 용병 같은 사람? 수염 덥수룩하고, 험상궂은 데다 껄렁거리는….”

제 이야기를 듣다못해 발 빠르게 앞장서버리는 한세아의 뒷모습을 보며 키득키득 웃는 두 여자. 그녀의 방송을 보던 시청자들도, 방송을 다시 보는 나도, 모험을 함께하는 그레이스와 아이린도 찰진 타격감을 느끼게 해 주다니.

한세아를 놀려 먹고 싶어 하는 건 역시 나만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그레이스와 아이린이 팔짱을 끼고 사이좋게 한세아를 뒤따라간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몇몇 모험가들이 우리 일행들을 알아보거나 미녀라서 관심을 가졌지만, 아이린의 수녀복을 보고 조용히 고개를 돌린다는 것. 모험가에게 작업을 거는 것과 수녀에게 작업을 거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니까.

그렇게 그림의 떡 보듯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일행들을 갑작스럽게 멈춰 세운 한 남자.

 “어라, 케이든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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