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력을 이용하는 초인과 함께하는 중이니 어찌 보면 타당한 질문이라 생각된다. 숲에서 오크 사냥꾼이 귀찮아 나무와 함정을 함께 몸으로 박살 내며 앞으로 달렸던 것처럼 미로도 그렇게 뚫어버릴 수 없냐는 질문이겠지.
동굴 벽면이 매끈하게 변했다 해도 단단하게 변하지는 않았으니 가능할 것 같기는 한데, 그 방식에는 문제가 하나 있다.
“벽을 부수는 것까진 가능하지만, 그 뒤가 문제지.”
“그 뒤라니?”
“내가 마구잡이로 벽을 부수면 천장이 무너지지 않을까?”
“…아, 그렇네.”
여기가 숲처럼 하늘이 탁 트인 공간도 아니고 어두컴컴한 동굴의 내부인데 마구잡이로 막 부수면 그 여파가 어찌 될 줄 모른다는 것. 내가 아무리 강인하고 튼튼하다고 해도 동굴이 완전히 무너져 수십 톤 단위의 바위에 깔리면 옴짝달싹 못 한다고.
…이 사기적인 육체의 능력을 생각해보면 땅을 파며 움직일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바윗덩이에 매몰되어 동굴 통로가 어딘지 모르게 되면 움직일 수 없는 건 마찬가지잖아.
“늪지에서 전투 중 상황이 급박하면 물웅덩이를 증발시키거나 하는 일은 가능해도, 동굴 벽을 부순 모험가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네. 이 위에 지상이 있을지, 아니면 무한한 바윗덩이가 있을지 아무도 모르니까.”
“결국, 부술 순 있다는, 늪지를 뭐?”
“31층의 늪지에 가는 건 기본적으로 상급모험가들이니까. 대지 마법으로 늪지를 메워버리든, 마력 강타를 통한 충격파로 물을 날려버리든 좀 편하게 싸우려고 할 때가 있어. 마나가 낭비되니까 네임드나 귀찮은 적을 상대할 때만 그런 거지만.”
-동굴 벽 뿌수는게 무식하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더하구만
-늪지 필드가 싫다고 다 때려부수나보네 ㅋㅋㅋㅋㅋㅋㅋㅋ
-메우는 건 둘째치고 부수는건 뭔데 시발상급모험가련들아 ㅋㅋㅋㅋ
-상급 마법은 화염 계열이나 대지 계열로 예약이네요 이건
-개좆노잼 동굴파트 빨리 넘기고 늪지부수기 보여주세요
[천연보호구역방화범한세아님 10,000원 기부!]
상급 마법으로 무조건 화염 계열 배울 거지?
“그, 이런 말 하면 좀 그런가? 방송각으로 쥑일 것 같은데. 내가 가장 먼저 올라가서 늪지를 끓여버리면 조회수 달달하게 빨아먹을 수 있겠다. 31층의 몬스터를 케이크처럼 쉽게 떠먹는 법, 이러면서.”
-요즘 세대는 케이크를 끓여먹냐
-케이크를 끓여먹으면 핫케이크 엌ㅋㅋㅋㅋ
-왜 저 채팅 삭제 안 하는데 관리자 일 안 해?
-시청자의 의문을 해소하러 가서 지 방송각 뽑아오는 무친련...
-A.I.쉑 인간의 개소리를 이해 못했네
미로의 벽을 부술 생각을 하다 말고 자기 방송 조회수 각을 생각해서 삼천포로 빠지는 한세아. 그 어벙한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저 멀리서 아이린이 손을 번쩍 들고 국자를 위로 들어 올린다.
“스튜 다 끓였어요! …아, 거기서 드실 거면 가져다드릴까요?”
“아, 갈게요! …무슨 채팅창이 마망으로 가득 차는 데 1분이 안 걸리냐. 니들도 징하다 진짜.”
그런 그녀의 헛된 망상은 국자를 들고 자애롭게 웃는 아이린의 모습에 다시 폭주한 시청자들에 의해 제지되었다.
21층에서 22층으로, 22층에서 23층으로.
그리고 여섯 개에서 열 개를 넘어 스무 개로.
“이 마석, 결국 어디에 쓰는 거지? 열 개쯤 모으면 많이 모았다고 생각할 뻔했는데 어느새 스무 개네.”
-고작 23층이니까 아직 많이 남긴 했는데
-30층에서 사용하는거면 나 답답해서 죽어버려
-저렇게 쌓아놓고 보니까 이쁘긴 하네
-12분 37초 최단기록이네여
-그걸 일일이 재고있음?
이제는 동굴에도 미로에도 골렘에도 익숙해진 일행들이 능숙히 골렘의 잔해를 주섬주섬 주워들고 마석을 챙긴다. 마탑은 언제나 연구 거리에 목마르므로 골렘의 잔해는 전부 구매해주기 때문이다.
물론 신장 2m짜리 골렘의 모든 잔해를 챙기기엔 양이 너무 많아 부위별로 조금씩만 챙기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거의 의뢰 하나를 맡은 수준으로 돈이 되니까.
그 덕에 마탑의 마법사들이 간단한 반응 실험을 해서 약점 정도는 알아낸 상황. 무식하리만치 단단하게 만들었을 뿐 마법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력은 없는 골렘인지라 의외로 마법이 통했다. 공격 마법이 아닌 공사 따위를 위한 바위를 무르게 하는 일반 마법이.
“그래도 말랑해지니 좀 낫군요. 바위에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는 흙더미에 검을 휘두르는 게 훨씬 편하니까요.”
“확실히, 그런 마법이 통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관절 부분 따위를 마법을 통해 흙에 가까워지도록 만들면, 케이든이 느릿한 골렘의 공격을 피해 팔다리를 석둑 잘라낸다. 관절부가 흙이 된다는 건 그 무거운 바윗덩이를 지탱할 힘도 약해진다는 뜻이니 골렘은 자연스럽게 박살이 난다.
게임식으로 말하자면 방어력만 높고 체력은 낮은 골렘의 팔다리가 마법 디버프에 의해 고정 데미지를 입어 순식간에 부위파괴가 된다- 그런 느낌.
“탑의 탐색은 순조롭지만… 롤랑, 정말 괜찮은 거 맞죠?”
“괜찮냐니?”
“그, 주머니 사정 말이에요. 남성분들은 자존심 때문이라도 금전적 손해를 감수한다던데….”
전투 후 뒷수습을 끝내고 미로에서 동굴로 되돌아가는 통로를 바라보고 있으니 옆으로 다가와 내 갑옷의 팔뚝 부분을 톡톡 건드리며 말을 거는 아이린. 한세아의 인벤토리에 골렘의 마석이 쌓일수록 그녀의 미간도 자주 찌푸려지고 있었다.
화전민 마을 출신의 그레이스야 금화 10개라는 단위에 화들짝 놀랐지만, 그것도 처음뿐. 아직 중급 모험가인 우리 파티가 매일 은화를 주머니로 벌어대는데, 상급 모험가는 얼마나 벌겠냐는 말에 이해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우리의 예비 성녀님은 하필이면 베이스가 천주교와 기독교 쪽 유일 신앙. 검소함을 미덕으로 삼은 데다 파티를 위한 금전적 지출을 나 홀로 부담하고 있으니 마음이 불편한가 보다.
“그 정돈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아앗, 수녀님께서 말씀하신 거랑 토씨 하나까지 똑같아요!”
“교육 담당 수녀님께서 하신 말씀이신가?”
“노인이 가진 삶의 지혜라고 하셨어요. 남자들은 애 같다든가, 그 때문에 손해를 보는 일이 있다든가.”
아무리 소심하고 낯을 가리는 수녀라 해도 같이 야영까지 한 사이. 어색한 거리감은 온데간데없고 나를 철부지 남자애 취급하며 걱정해주는 모양새다.
물론 사기적인 몸뚱이로 쉬지 않고 귀족과 관련된 의뢰를 싹 다 처리한 내 지갑은 걱정해 줄 필요가 없지만, 반응이 귀여우니까 상관없나. 누군가가 나를 걱정해주는 것에 화를 낼 정도로 이상한 놈은 아니다. 그 대상이 미녀라면 더더욱.
잠깐의 담소를 나누고 있으니 이어서 일행들도 내 곁으로 모여든다. 미로가 동굴로 변할 때 몬스터가 등장한 적은 없지만, 탑에서 넋 놓고 방심할 이유도 없으니까.
“슬슬 돌아갈까?”
“골렘의 마석도 하나 얻었고, 골렘 몸체 챙겼고, 오는 길에 이끼 두 종이랑 버섯 하나 채집했지? 그러네, 의뢰는 전부 달성한 것 같아.”
-슬슬 동굴필드도 노가다의 영역이네
-화면 어두운거 빼곤 어려울거 없어보이고
-그래서 저 골렘은 어따쓰는거야
-순조로운데 너무 순조로워서 재미가 없네용
-다필요없고우리마망웃는거다시보여죠
그렇게 아무 일 없이 오늘도 탑에서의 모험을 끝마쳤다.
※
“음…, 롤랑? 조금 신경이 쓰이는 일이 있는데.”
“뭐가?”
골렘을 무찌르고 나서 밖으로 나와보니 생각보다 이른 오후였기에 길드의 테이블에서 잠시 휴식을 한 뒤 다 함께 저녁을 먹기로 한 일행들. 모험의 결과를 정산하며 느긋하게 앉아 있으니 슬쩍 엘리스가 내게 다가온다.
평소의 능글맞은 눈웃음 없이 묘하게 찌푸려진 눈매.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다는 듯 다가와 그녀가 꺼낸 이야기는 조금 무거운 주제였다.
“내가 알고 지내던 모험가 파티가 있는데, 벌써 며칠 연락이 안 되네.”
“그게 왜?”
“30층을 노리고 있는, 중급 중에서도 베테랑에 가까운 모험가 파티거든. 분명 내게는 21층에 가서 골렘을 찾아보겠다고 했는데 그대로 연락이 끊겼어.”
엘리스는 발이 넓다.
길드 접수원들의 왕언니이자 사무원들의 최고참, 의뢰와 관련된 서류를 관리하며 재정 담당 쪽에도 끈이 닿아 있는 마당발. 그런 그녀다 보니 알고 지내는 모험가들도 엄청나게 많다. 싹수가 좀 보이는 초보 모험가부터 의뢰를 꼬박꼬박 완료하는 중급, 상급 모험가까지.
내가 한세아의 동료를 찾는다는 말을 엘리스에게 한 이유도 그것이었다. 담당 서류에 따라 알고 지내는 인맥이 나뉘는 다른 접수원들과 달리 엘리스는 초보 모험가부터 상급 모험가까지 전부 알고 지내니까.
그렇게 많은 사람을 알고 지내는 만큼 지금 그녀가 하는 걱정은 꽤 신빙성이 있었다. 엘리스가 기억하고 직접 이야기를 전달할 정도면 실적 하나는 확실하다는 뜻이니까.
“원래 그 파티가 왔어야 할 시간보다 오래 걸려서 그래?”
“맞아. 자금적으로 꽤 풍족한 파티라서 게이트를 이용하거든. 20층으로 향하는 게이트까지 사용할 텐데, 21층에 간 지 벌써 4일째야. 파티 리더가 워낙 계획에 집착하는 타입이라 말없이 21층보다 위로 올라갈 리 없거든.”
30층을 진지하게 노리던 파티가 21층에서 4일. 확실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네. 탑 내부에서 오랜 기간 돌아오지 않는 파티는 죽었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한 동네다. 이 경우 의심되는 건 우리 파티가 조사하고 있는 골렘뿐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