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5화 (115/175)

잔상처가 흉으로 남은 우락부락한 팔뚝과 떡 벌어진 어깨, 장비가 없지만 딱 봐도 파티의 탱커를 담당할 것 같은 남자. 그가 내 팬이라는 걸 부담스러울 정도로 온몸으로 표현하는 남자가 콧김을 쉭쉭 뿜으며 다가온다.

그의 투박하고 커다란 손에 들린 것은 역시나 붉은색을 띠고 있는 골렘의 마석. 길드에 제출하면 엘리스를 통해 금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우리 일행이 올 때까지 기다린 건가.

길드의 접수원인 엘리스를 통해 거래하지 않으면 수수료가 없긴 한데, 이러면 엘리스한테 밉보이지 않으려나. 의뢰에 대한 정보만 듣고 거래는 개인이 해 버리면 길드의 뒤통수를 치는 모양새가 되잖아.

 “길드에 의뢰로 내걸긴 했는데, 우릴 기다린 건가?”

 “예! 그게, 금화를 원하는 게 아니라서 말입니다!”

저 뒤쪽 카운터에서 뾰로통하게 이쪽을 노려보는 엘리스가 조금 부담스럽고, 눈앞에서 뺨을 붉힌 이 늙수그레한 남자는 매우 부담스럽다. 이렇게 대놓고 다가오면 뭘 원하는지 알 것 같아서.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라고, 성큼 다가와서는 갑자기 오래된 강철 방패를 내미는 그. 관리를 잘했는지 녹이 슨 건 아니지만 흠집이 잔뜩 나 있는 게 아주 오랫동안 사용해 온 장비인 것 같았다.

 “이게 제가 초보자 시절 사용하던 방패입니다. 이제 상급 모험가를 진지하게 노리는 상황이라 더는 써먹지는 못할 녀석이죠.”

 “…그런데?”

 “실례가 아니라면 이 방패를 양손으로 꾹 쥐어서 손자국을 좀….”

세상이 달라도 사람 생각하는 건 비슷한 걸까.

살다 살다 핸드 프린트를 요구받을 줄은 몰랐고, 그걸 자신의 옛 장비에 해 달라고 할 줄은 정말 몰랐다. 입꼬리를 움찔거리면서 폭삭 삭은 외형과 어울리지 않는 어린 눈동자가 나를 기대감에 가득 찬 상태로 바라본다.

그래 뭐, 금화 10개 대신 손자국을 달라고 부탁하는 데 그 정도야 어렵진 않지. 양손에 마나를 가득 담아 방패를 양손으로 붙잡고 꾸욱 힘을 주자 찰흙처럼 우그러지는 강철.

 “으하핫! 감사합니다!”

잔 흠집이 가득한 방패에서 손바닥 모양으로 우그러진 방패로 변한 것을 받아들고 싱글벙글 길드를 나서는 남자의 발걸음이 참으로 경쾌하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밖에 안 나오네.

 “롤랑을 좋아하는 사람이 정말 많나 봐.”

 “그래, 그나저나 골렘이 이렇게 많을 줄 몰랐는데.”

 “…그러게, 이걸 어디에 쓰는 걸까?”

그런 식으로 모인 골렘의 마석은 21층에서만 벌써 6개.

한 층에 하나씩은 개뿔, 한 층에서 10개쯤 나오게 생겼다.

일주일이 지나기도 전에 벌써 6개의 마석이 모였다. 두 개는 우리 파티가, 네 개는 의뢰를 확인한 다른 모험가들이 모아 온 것이다. 지금 페이스대로 간다면 하루에 1개꼴로 마석이 모이게 되는 어마어마한 속도.

 “이거, 그냥 마석인 거 아닐까? 너무 많은데….”

 “그건 아닐 거야, 그레이스 언니. 일단 색깔부터 다르잖아.”

 “하긴, 탑의 마석은 푸른색이었으니까. 만월늑대랑 오크 우두머리가 붉은색이었지.”

한세아가 인벤토리에 집어넣어 퀘스트 아이템이라는 것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이 마석의 색이 푸른색과 정반대인 붉은색이 아니었다면 그냥 마탑에 일반 마석이라고 팔아버리지 않았을까.

나도, 한세아도, 심지어 시청자들의 예상과도 달리 골렘의 마석은 많다 못해 풍족했다. 모아서 숨겨진 문을 여는 수준이 아니라, 백 단위로 모아서 교환해 먹는 게 아닐까 하는 수준으로.

그러다 보니 나를 바라보는 그레이스와 아이린의 눈빛이 서글프다 못해 촉촉하다. 한세아의 인벤토리에 마석이 하나 추가될 때마다 금화 10개가 녹아서 사라지기라도 한다는 양 안타깝게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21층에서 딱히 뭐가 발견될 것 같진 않은데, 22층으로 올라갈까?”

 “22층에도 이런 골렘이 있으려나…?”

 “어쩌면 층마다 있는 걸지도 모르지. 아직 의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발견이 덜 되었을 수도 있고. 골렘의 몸체를 이루는 돌멩이는 마탑에 제보했으니 뭐라도 결과가 나오겠지.”

내가 다른 모험가를 돈으로 고용하듯 마탑이 있으면 써먹어야지. 깡통 전사와 방송인(마법사 코스프레)이 백날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 봐야 마탑의 진짜 연구자들의 발끝도 따라가지 못할 테니까.

미로, 골렘, 마석, 그리고 금화 10개.

제 각자 다양한 상념에 젖어 들어 집중력이 흐트러진 일행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짝- 손뼉을 치고 말을 이어나갔다. 골렘의 마석은 다른 모험가들이 모아 올 것이고, 골렘의 몸체는 마탑의 마법사들이 분석할 테니 우리는 탑을 올라야 하지 않겠는가.

…불쌍한 마법사를 위해 이끼도 채집해야 하고.

 “동굴 미로의 탐색은 길드를 통해 의뢰해 놨으니 우리는 오늘 22층으로 올라간다. 미로에서 나오는 골렘은 특이 개체니까 넘어가고, 동굴거미와 흡혈박쥐를 상대로 한나의 마법이 통하는 걸 확인했으니 차근차근 올라갈 생각이야.”

 “확실히, 중급 마법을 사용하니 파괴력이 어마어마했지.”

 “22층에도 골렘이 나올지 궁금하군요. 아직 무기에 마나를 싣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또다시 골렘 이야기로 빠져버리자 진지하게 고민을 시작하는 케이든.

마법사가 초급, 중급, 상급으로 나뉘어 경지가 오를수록 더 복잡하고 강력한 마법을 사용한다면, 나와 케이든 같은 전사들은 무기에 마나를 싣는 것으로 초급, 중급, 상급을 나눌 수 있다.

초급이야 겨우 자신의 육체만 조금 튼튼하게 하는 정도고, 중급은 육체와 무구를 마력으로 이어 양쪽을 전부 강화할 수 있는 레벨. 상급부터는 K-판타지 소설 단골손님인 소드 오라 같이 바깥으로 마력이 흘러넘치는 경지다.

아무리 케이든의 등급이 4★이라지만 검사로서의 경지는 아직 높지 않은 상태. 그녀가 가문에서 들고나온 검으로 골렘을 두들겼다간 검의 이가 몽땅 빠져버리고 말겠지.

 “케이든, 네 검은 조금 모양새가 독특하니까 구하기도 힘들 테니 보조 무장도 생각은 해 둬. 우리가 골렘과 계속 맞서 싸울 거라고 장담은 못 하지만, 준비해 둬서 나쁠 건 없겠지.”

 “예, 알겠습니다.”

무뚝뚝하게 대답하고선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모습을 보니 갑자기 저 변장을 풀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

저 모습이 전부 케이티 웰즐리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모험가 연기라는 걸 알게 되니 심술궂은 마음이 가슴 한구석에서 무럭무럭 자라난다. 한세아가 빨리 케이든의 캐릭터 퀘스트를 진행해 줬으면 좋겠는데.

케이든과 부무장에 관해 이야기하니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받은 한세아가 리더로서 오늘의 일정을 브리핑하기 시작한다.

 “마탑에서 받은 이끼 채집 의뢰와 병행할 수 있는 게 있더라고. 동굴이끼랑 버섯을 채집해서 22층을 돌아보고, 하루 정도 동굴에서 야영을 해 볼까 해.”

 “동굴에서의 야영이라니, 숲에서의 야영과는 좀 다르겠죠?”

 “일단 공기부터 다르니까… 그래도 자리를 잘 잡으면 불침번 서기는 좋겠네.”

하룻밤을 탑에서 보낸다는 말에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일행들. 한세아의 인벤토리에 있는 식량과 텐트 장비 따위를 점검한 채 우리는 다시 탑으로 향했다.

어둑한 통로, 퀴퀴한 공기, 시커먼 동굴의 벽과 은근하게 축축한 습기까지. 사람이 잠자리에 들기에는 정말 좋지 않은 환경이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동굴 벽을 뚫고 나오는 몬스터는 없겠죠.”

 “설마, 그런 놈이 있으려고.”

동굴의 한구석, 마치 짐승 굴처럼 입구는 좁지만, 통로의 끝은 살짝 넓은 막다른 길. 외갈래 길에 이어진 공터라고 부르기엔 너무 좁은 장소에서 우리는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이런 끔찍한 장소에서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텐트를 치는 두 미녀.

휴식을 위해 장비까지 벗어 버린 상황이라 채팅창의 시청자들이 질리지도 않고 발작을 시작한다. 속옷 차림도 아니고 셔츠 차림만 되어도 약쟁이처럼 날뛰네.

-아니 카메라각도 똑바로 맞추라고오~

-뱅송짬밥이 몇그릇인데 똑띠안함?

-진짜뭣도아니고 텐트만치는데 왜케 보기 좋냐

-저거 보니까 나도 같이 텐트친거같음

[관리자에 의해 삭제된 채팅입니다]

 “아니, 누구는 지금 공기도 안 좋은 동굴에서 버섯이나 뽑고 있는데 말을 그렇게 할래? 니들 자꾸 그러면 카메라를 경계 중인 롤랑 얼굴에 내일 아침까지 고정해버린다?”

듣기만 해도 가슴이 철렁거리는 협박을 하며 텐트 말뚝을 동굴 바닥에 탕탕 박는 한세아. 그래도 숲에서의 경험이 도움이 되었는지 딱딱한 바닥에도 능숙하게 말뚝을 박고 텐트를 고정한다.

내가 유일한 통로를 틀어막고 경계를 서는 동안 한세아가 텐트를 치고, 그레이스와 아이린이 식사를 준비하며 케이든이 돌아다니며 물건을 나르는 등 잡일을 하는 상황. 그러던 와중 슬그머니 다가온 한세아가 내 등을 톡톡 두드린다.

 “롤랑, 궁금한 게 있는데.”

 “음?”

통로를 틀어막고 시야 한구석에 한세아의 방송 창을 띄워 둔 다음, 몰래 인터넷을 즐기던 중 뜬금없이 날아드는 그녀의 질문.

 “골렘이 나오는 미로, 벽을 전부 부숴버리고 앞으로 나아가는 건 불가능할까?”

-파티의 탱커가 아니라 무슨 공사장비 취급을 하네

-솔직히 답답해서 밀어줬으면 하긴 한데…

-롤랑 능력치면 가능한거아님? 상급모험가가 동굴벽도못뿌수면

-매일 한시간씩 걸으니까 꼴 좀 받았나보네

-근데 가능하긴 함? 붕괴하면 어차피 리셋이긴 한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