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4화 (114/175)

생각해보니 안테노르 그 양반도 있고, 샤를롯 캐번디시도 연구직으로 빠질 생각을 하고 있으니 아이린의 말대로 분석을 맡기면 되겠네. 물론 골렘의 몸통을 박살 내도 돌조각이 남아 있다면 말이야.

 “그러면, 몸통을 부쉈을 때 잔해가 남아 있는지 한번 볼까?”

장작을 패듯 바닥에 널브러진 골렘 앞에서 철퇴를 높이 치켜들었다. 혹여나 무언가 해보고 싶은 것이나, 떠오르는 게 있으면 말리라는 뜻으로 아주 느릿하게. 그러나 다들 아이린의 말에 설득력을 느꼈는지 딱히 막아 세우는 사람은 없었다.

퍼―거억―!

마력을 담지 않고 팔뚝의 힘으로 내려친 골렘의 몸체. 전력으로 후려치지 않고 적당한 힘을 사용했더니 손바닥이 찌르르 울리는 감각이 느껴진다. 마치 롤랑이 되기 전, 군대에서 혹한기 때문에 땅을 파다가 바위에 곡괭이를 잘못 찍었을 때처럼.

 “역시, 이건 날붙이로는 못 잡겠네. 반탄력이 장난 아니야.”

 “그 정도입니까?”

손맛을 복기하듯 손바닥을 쥐락펴락 조물거리고 있으니 걱정스럽게 되묻는 케이든. 분류하자면 민첩형 검사인 그녀로서는 이런 골렘을 잡으려면 무기에 마나를 제대로 부여할 줄 알아야겠는데.

물론 방어력이 높다 해서 무적인 것은 아닌지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내리치자 골렘의 몸통이 산산이 조각나며 힘을 잃은 돌조각이 사방으로 구른다.

 “돌조각이 남아 있네요. 그리고 저건, 새빨간 마석…?”

 “그러게, 마석이 파란색이 아니라 빨간색이라니.”

녀석에게서 나온 것은 색이 좀 더 흐릿하지만 만월늑대와 오크추장의 것과 비슷한 붉은 마석. 고블린은 거의 무채색에 가까운 흐릿한 하늘색 마석을 주며, 강한 놈일수록 더욱 선명한 푸른색 마석을 준다는 걸 떠올려보면 마석도 심상치 않은 녀석이었다.

 “음? 벽면이 흔들리는데.”

 “미로가 사라지는 건가?”

사라지지 않은 돌조각을 몇 개 주워 마석과 함께 인벤토리에 챙기자 드드드득- 소음이 울려 퍼지는 미로. 벽면이 다시 울퉁불퉁하게 변하고 바닥과 천장에서 석순과 종유석이 마치 대나무처럼 쑤욱 자라난다.

21층 동굴 벽면에는 마력광에 반응을 하는 숨겨진 장치가 있다. 여기에 마력을 흘려 넣어 장치 뒷부분을 자극하면 동굴이 미로로 변하는데, 이 미로에는 거대한 골렘이 있어 그 녀석을 무찔러야 미로 밖으로 다시 나올 수 있다―

 “롤랑,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지?”

 “알아, 근데 이렇게 증거가 있잖아.”

 “솔직히 한나랑 같이 온 게 아니었으면 술 먹고 농담을 한다고 무시했을 텐데.”

내 설명에 마석을 쥐어 든 엘리스의 표정이 묘하게 변한다. 내가 탑에서 보낸 시간이 10년이라지만, 이쪽 세상의 사람들은 거의 30, 40년을 탑과 함께 살아왔으니까. 내가 이 세상에 오기 전부터 사람들은 탑의 20층을 돌파해 연구했다는 뜻이다.

그렇게 수십 년을 탑과 함께 보내왔는데 21층에 숨겨진 마법 장치가 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니 쉽사리 받아들이기 힘들겠지. 그래도 믿음직한 우리 천재 마법사 한나가 돌조각과 마석을 들고 왔으니 거짓말은 아니라는 게 증명이 된 상황.

 “믿기 힘든 이야기긴 한데… 증거물이 이렇게 떡하니 있으니 믿을 수밖에 없네. 마석은 마탑에 제출할 거지?”

 “어, 아뇨. 골렘의 잔해만 제출하고 마석은 제가 챙길 것 같아요, 언니.”

 “음?”

테이블 위에 늘어놓은 골렘의 잔해를 엘리스가 주섬주섬 챙기려 하자 빨간 마석은 슬그머니 인벤토리에 집어넣는 한세아. 엘리스는 한세아 또한 마법사니 그럴 수 있겠노라 생각하고 넘어가는 듯했지만, 나로서는 의심스러웠다.

한세아가 마법사 겸 연금술사라고는 하지만 이는 플레이어로서 게임 시스템 창을 사용할 뿐. 할 줄 아는 거라곤 지팡이 위에 마력을 머금게 하는, 저잣거리 약장수 수준의 마력 운용뿐인데 마석을 챙겨서 어디에 쓸 수 있겠는가?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슬그머니 한세아의 방송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설마 층마다 골렘 잡아야 함?

-어떻게 게임 콘텐츠가 미로찾기

-그래도 안하고 넘어가면 누락된 보상 있을까봐 찝찝하거든요

-RPG유저 특 : 퀘스트 하나 누락하면 마음의 병이 생김

-그래도 다음번엔 좀 빨리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아 씨, 나 말고 21층에 와본 사람이 없으니까 좀 답답하네. 미로에서 시간을 채워야 골렘이 등장하는 건가, 아니면 내가 재수가 너무 없어서 1시간이나 지난 후에 골렘을 만난 걸까? 다음번에도 막 한 시간씩 걸으라 하면 좀 짜증 날 것 같은데.”

-진짜 숨쉬듯이 비틱질을 하시네여 텐련아

-6543 18★ 스타트로 재수가없어도르 시전해도 되는거 맞냐

-근데 미로 한시간 탐방은 개오바긴 함

-ㄹㅇ 층마다 미로 1시간이면 시발 ㅋㅋ 강제로 10시간인데

-플탐 늘리려고 만들었다고 보기엔 너무 악질적이긴 해;;

한세아가 주섬주섬 인벤토리 한구석에 고이 모셔두는 걸 보니 아무래도 이벤트처럼 등장한 미로인 만큼 골렘의 마석이 일종의 퀘스트 아이템인가보다. 골렘을 잡고 잡아서 마석을 모으면 숨겨진 통로라도 열리려나?

왜, 일종의 진엔딩이 숨겨진 게임들이 자주 있지 않던가. 평범하게 플레이해서 엔딩을 보면 노멀 엔딩이지만, 특정 아이템을 전부 모아서 진행하면 진엔딩이 나오는 방식.

아무래도 21층 동굴 지형에서는 층마다 숨겨져 있는 미로를 찾아야 하는 게 아닐까― 라는 게 한세아와 시청자들의 의견. 한 층에 하나씩 10개의 마석을 찾으면 30층에서 추가 보상이 있을 것이라 믿는 것 같다.

 “마탑에 의뢰를 맡기는 게 아니라, 네가 들고 다니려고?”

 “음, 이게 어, 마력적으로 열쇠? 같다는 느낌이 조금 있어서…. 왜, 미로도 마력을 불어넣어서 열렸던 것처럼 이 마석의 마력으로 숨겨진 공간을 열 수 있지 않을, 까?”

일행들 또한 들은 바가 없으니 설명을 하라는 뜻으로 슬쩍 찔러보자 역시나 더듬더듬 말을 이어나가는 그녀. 미리 준비한 거짓말이 아니라 시청자의 훈수를 들으며 즉각적으로 말을 지어낼 때면 아직도 말문이 막히나 보다.

그래도 순발력 좋게 말을 지어낸 덕에 일행들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거린다. 미궁에서 얻은 미지의 마석이고, 팔면 금화를 짭짤하게 받을 수 있을 텐데 욕심내는 사람이 하나 없는 일행들.

그 신뢰와 믿음으로 가득한 모습을 보고 다시 엘리스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서, 의뢰를 하나 대대적으로 내걸고 싶은데.”

 “롤랑 네가 의뢰를?”

갑자기 내가 의뢰를 받는 것도 아니고 의뢰를 하겠다는 말에 일행들의 눈이 동그랗게 변하며 나를 쳐다본다.

하지만 이번에 미로를 걸으며 느낀 게 있었다.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느니 돈으로 해결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점. 어느 세월에 21층부터 30층의 동굴 벽을 횃불형 마도구로 지지면서 해결하겠는가?

 “우리가 이야기한 이런 특이한 구조물, 발견해서 위치만 알려주면 금화 10개를 내건다고 전해.”

 “금화 10개…, 진심이야?”

 “그래. 아니면 저 골렘의 마석을 가져와도 똑같이 금화 10개. 미궁에서 또 이변이 벌어졌는데 금화 10개로 선수를 칠 수 있으면 남는 장사지.”

차라리 돈을 풀어서 사람을 쓰고 말지.

안락한 노후를 위해 저택과 마도구, 하인들을 고용할 돈을 열심히 저축해 왔지만, 탑을 클리어한다는 목적이 생긴 이상 금화는 사용해야 할 아이템이 되어버렸다.

한세아와 함께 탑을 클리어해 엔딩을 보고, 정말로 게임 밖으로 나갈 수 있다면… 이 세상의 금화가 수만 수억 개가 있어도 의미가 없지. 골드가 아무리 많아 봐야 게임 밖으로 나가면 사라질 데이터 쪼가리 아니겠는가?

 “확실히, 정보를 선점한다고 생각한다면 금화 10개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 금화 10개라뇨?!”

 “맞아, 롤랑.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공작 가문에서 자란 아가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지만, 화전민 마을 출신인 그레이스와 신전에서 나고 자란 아이린은 화들짝 놀라서 내 양팔을 붙잡고 나를 만류한다. 모험가가 되지 않은 평민들은 금화는커녕 은화도 큰돈이니까 놀랄 수밖에.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이 때 묻지 않은 순수함처럼 보여 웃음이 비죽 새어 나온다. 한세아가 자연스럽게 인벤토리에 챙겨 넣은 마석도 팔면 금화를 만질 수 있을 텐데 그건 신경도 쓰지 않으니까.

 “무리한다니, 무슨 소리야. 상급 모험가로 5년을 넘게 금화를 끌어모은 사람이 고작 이 정도로 앓는 소리를 할 리 있나.”

 “그건 그렇지. 어디 한적한 곳의 장원을 사겠다며 아득바득 금화를 모았으니까.”

내 말에 엘리스가 곧바로 호응을 해 준다. 미남 미녀를 좋아하기에 그레이스와 아이린을 달래 주려는 생각도 있지만, 큰 수수료를 받을 기회를 놓칠 리 없다. 결국, 모험가 길드는 모험가의 의뢰에서 발생하는 수수료로 먹고사는 직업이니까.

그레이스와 아이린을 다독여 내게서 떼어낸 엘리스가 내 귓가에 작게 속삭인다.

 “롤랑, 수수료 포함 한 건에 금화 10개 하고 은화 열다섯 개야.”

 “수수료를 너무 떼어먹는 거 아니야?”

 “에이, 기본이 21층에서 시작하는 의뢰잖아. 내가 눈 좋은 탐색꾼들에게 소문 쫙 퍼트려 줄게. 돈을 많이 쓰더라도 빠르게 독점하려는 거, 맞지? 그리고 건당 수수료니까 발견이 안 되면 내가 받는 것도 없구….”

 “그래, 알았다.”

내 허락에 배시시 웃어 보이는 엘리스.

그래도 일 처리 실력 하나는 확실하니까 봐 줬다.

엘리스를 통해 의뢰를 내걸고 며칠정도 21층을 돌며 탐색을 진행하던 어느 날의 저녁.

 “여기, 골렘의 마석을 매입하신다고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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