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여덟 번째야.”
안색이 어두워진 그레이스가 한층 더 진중해진 표정으로 주변을 노려보듯 탐색한다. 굽이지고 휘어진 좁은 통로라 해도 동굴에는 이렇게까지 많은 갈림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벽면에 마력을 흘려 넣기 전에는 30분에 한 번 정도 갈림길이 등장했다면, 지금은 5분도 길다는 듯 두 갈래, 세 갈래 길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상황. 만약 한세아가 미니맵 기능이 없는 플레이어였다면 이 안에서 굶어 죽었을지도 모른다.
“미니맵이 있으니까 같은 곳을 빙빙 돌 걱정은 없는데, 이게 뭔 상황인지 모르겠다. 미로에 있는 그 납작한 판때기들을 다 찾아서 마력을 부어야 하나? 왜, 공포 게임 같은 데서 많이 나오잖아. 미로 안에서 레버나 스위치 여러 개 누르는 방식으로.”
-ㅇㅇ 갑자기 몬스터가 나올것같진 않은데
-우우좌우중중좌우 미치겠네 진짜 ㅋㅋ
-나 방송보니까 21층에 올라갈 의지가 사라져버림…
-이거 오늘안에 깰 수 있긴 함? 노숙 두어번은 해야겠는데
-식량 넉넉히 안챙겼으면 리셋 존나했을 듯
문제가 있다면 한세아에게 아직 퀘스트 창 따위가 뜨지 않았다는 것.
동굴 필드가 갑자기 미로 필드가 되다니, 무슨 설정이지 진짜.
갑작스럽게 등장한 미로는 모험가들에게 있어 악몽과도 같은 장소였다.
수십 마리의 몬스터가 등장해서?
21층에 어울리지 않는 네임드가 있어서?
길이 너무나 복잡해 탐색꾼의 부담이 심해서?
그런 이유가 아니라 좀 더 원초적이고 간단명료한 하나의 이유.
“길이 복잡한데, 몬스터는 보이질 않네.”
몬스터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미쳤냐고, 비비게임즈.’
일종의 이벤트성 던전 같은 장소인지 고블린과 코볼트, 동굴거미와 흡혈박쥐가 존재하지 않는 미로. 혹시 30층의 네임드 몬스터인 장님뱀이 등장해 그 커다란 몸으로 들이받을까 긴장까지 했건만 참으로 허망한 상황이었다.
몬스터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건 마석을 얻을 수 없다는 이야기. 그러니 모험가의 시선으로 보자면 돈은 돈대로, 시간은 시간대로 소모하면서 이득은 0인 뭣 같은 상황에 직면했다는 뜻이다.
상급 모험가로 모아둔 금화가 있고, 플레이어로서 얻은 퀘스트 보상이 있어서 다행이지. 평범한 모험가였다면 22층으로 올라갈 마음이 꺾여버리는 게 당연한 극악무도한 미로. 헤매는 동안 소득이 0원이 되는 미로라니 이보다 악독한 미로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나저나 여기는 어떤 장소일까요?”
“생긴 것만 봐서는 동굴 일부를 던전으로 만든 마법사의 공방… 같습니다만. 탑 안이라서 잘 모르겠군요.”
미지의 장소를 탐색하느라 긴장을 잔뜩 했던 그레이스가 이어지는 고요함에 마음을 놓을 즈음 등 뒤에서 아이린과 케이든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바닥도 벽도 천장도 매끈매끈한 기묘한 미로다 보니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혹시나 벽면에 뭐라도 있을까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지만 몬스터도 미로에 대한 힌트도 아무것도 없으니 슬슬 일행들의 입이 가벼워지기 시작한다.
“미니맵에 기록이 되는 건 좋은데 대체 뭐지? 우리 지금 거의 40분은 아무것도 안 하고 걷기만 한 것 같은데.”
-숲에서의 힐링캠프에 이어 미로에서도 걸어다니네 뚜벅이쉑
-방송 메인 컨텐츠가 파워 워킹인가여
-좆좆게임즈 얘들은 뭐 때문에 이런걸 만들었대
[관리자에 의해 삭제된 채팅입니다]
-게임 방송인줄 알았는데 헬스방송 그대로 이어하는 중이었네
모험가의 시선으로 볼 때도 끔찍하지만, 방송인의 시선으로 봐도 끔찍하기 짝이 없는 미로. 아무런 이벤트 없이 거의 한 시간 동안 걷고만 있으니 채팅창에서 삭제되는 채팅이 눈에 띄게 늘어나는 게 보인다.
21층에서 뭐라도 나올 것처럼 지형이 변했는데 등장하는 게 정말 아무것도 없으니 뿔이 나는 시청자들.
마치 가스 불 위에 올려진 냄비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한 시청자들을 달래준 것은 복도 너머에서 나타난 몬스터였다. 작은 난쟁이의 형상인 고블린과 코볼트도, 징그럽게 생긴 동굴거미와 흡혈박쥐도 아닌 무기질적인 몬스터.
“골렘? 골렘이 왜 나타난 거지?”
“역시, 마법사의 공방이었나?”
신장이 대략 2m쯤 되어 보이는 골렘이었다.
동굴의 시커먼 암석으로 이루어진 것인지 색이 시커먼 골렘. 인간의 형상이라기보단 팔다리가 달린 돌덩어리처럼 생긴 투박한 놈이 우리를 향해 쿵쿵 다가온다. 커다란 몸체, 위압적으로 번들거리는 검은 표면, 그리고 어둠 속에서 은은히 빛나는 붉은 색 안광까지.
“딱 봐도 우리를 적대하는 것 같죠?”
“일단, 처음 보는 놈이니 내가 혼자서 처리할게. 잠시 뒤로 물러나 있어.”
자연스럽게 전투태세에 들어가려는 일행들을 말리고 앞으로 나섰다. 별 이유는 없고 호승심이 뒤섞인 호기심 때문에. 골렘이 강하다 해도 신장 5m짜리 거인족보단 약할 테니 부담감 없이 앞으로 나설 수 있었다.
팔이 뻗으면 닿을 거리가 되자 주저 없이 묵직한 바위 팔을 들어 올리는 녀석. 마치 책상 위의 모기를 때려잡듯 바람을 가르는 바위 주먹이 날아든다.
“…어때요, 롤랑?”
“힘이 조금 강하긴 한데, 위험한 녀석은 아니네. 튼튼한 것 말고는 뭐 없나.”
물론 가슴 졸이는 전투나 화려한 전투는 없었다. 강맹하게 내리친다 해도 마나를 이용한 공격이 아닌 무게를 통해 내리찍는 공격일 뿐. 어린아이 손목을 잡아채듯 골렘의 팔을 붙잡자 기이잉- 하는 소리와 함께 버둥거린다.
벗어나려는 듯 팔뚝을 움직이는 힘이 꽤 강하고, 손으로 쥐어본 몸체는 생각보다 딱딱하다. 21층에 처음 오는 전위가 상대했다면 막아 세우는 것에 고생했을 레벨. 오른손을 붙잡힌 채 한참을 버둥거리는 걸 보면 머리가 좋은 건 아닌 것 같네.
실랑이 끝에 내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지 반대 손을 들어 올리는 녀석. 학습 능력도 없는지 똑같이 머리 위로 치솟은 손이 내 정수리를 향해 떨어진다.
떠엉―
“충격을 받으면 그 부위만 파손되고 나머지 부위는 보호되는 것 같고. 그레이스, 한나? 몸통을 공격해 봐.”
“알겠어!”
신성력이 아닌 마력으로 강화된 방패와 충돌하자 산산이 조각나는 놈의 바위 주먹. 오크 전사처럼 빈사 상태가 되어 기절하진 않고 나를 후려친 왼쪽 팔뚝만 산산이 조각나며 돌조각이 사방으로 구른다.
지능은 높지 않지만 튼튼하고 강한 힘을 가진, 방어력에 모든 걸 맡긴 깡방형 몬스터. 심지어 팔, 다리를 공격하면 부위 파괴 시스템이 있어 데미지를 나눠서 받는다니.
21층 수준의 파티가 온다면 팔이나 다리를 먼저 파괴하고, 그 이후 몸통을 공격해 차근차근 쓰러트려야 하는 녀석이다. 미로도 귀찮은데 미로에서 나오는 몬스터까지 귀찮기 그지없는 기믹을 가지고 있네.
“화살은… 당연히 안 박히네.”
“마법이 정통으로 들어갔는데 그닥 데미지를 준 것 같지도 않아.”
“검으로 베어봤자 검 날만 상할 것 같군요. 저 녀석을 상대하려면 보조 무기로 둔기를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심지어 매끈한 바위 몸체는 화살을 튕겨내고 마법을 온전히 받아내기까지 한다.
-겨우 등장한 몹이 좀 지랄맞네
-농담이 아니라 21층에 갈 마음이 진짜로 꺾이는데
-속성때문아님?워터애로우같은거쓰면되나
-존나포켓몬 같은 이야기인데 설득력 있네
-하긴 돌에 바람을 쏘는건 쫌
“이것저것 이용해서 패다 보면 약점을 알 수 있지 않을까? 대놓고 수상한 미로에서 등장했는데 약점이 없으니까 뒤질 때까지 패라고 하진 않을 거 아니야. 고작 반사뎀에 부서지는 걸 보면 체력은 낮은 것 같은데. 오크 전사도 반사뎀은 한 번 버텼어.”
끈덕지다고 표현해야 할 정도로 튼튼한 골렘의 모습에 당황하는 시청자들. 한세아를 놀려 먹는 건 좋지만, 대부분의 시청자 또한 세계 최초의 가상 현실 게임을 플레이하는 게이머기 때문에 앞날이 걱정되겠지.
그래도 이상하게 변한 미로에서 등장하는 놈이니 한세아의 말대로 약점이 반드시 있을 것 같은데.
“저기, 한나 양?”
“네, 언니.”
그렇게 팔다리를 전부 부위 파괴를 해 버리자 몸통만 남아서 붉은 눈빛만 허공을 향해 보내는 골렘. 자폭한다든가 바위를 쏜다든가 재생을 하는 일은 없어 일행들이 툭툭 두드리며 온갖 의견을 내 본다.
그러던 와중 이번에도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슬그머니 한세아를 부르는 아이린.
“저기, 골렘의 팔다리가 부서진 잔해들이 사라지질 않네요. 골렘의 몸체를 처리해도 저 돌조각들이 남아 있을까요?”
“어, 그게 왜요?”
“돌 조각들이 남아 있다면 마탑에 맡겨 약점을 연구할 수… 있을 테니까요?”
-마법사가 사제한테 능지로 밀리냐…
-포브스 선정 가장 짠한 마법사 플레이어 1위
-이게 주직업 마법사 부직업 연금술사가 맞나 싶워요
-지능과 지혜는 다르다더니 이걸 알려주기 위해서?
-21층은 마망의 층인가…? 활약상이 으마무시하네요
어리둥절한 한세아의 반응에 덩달아 의문을 가지는 아이린. 그 모습에 시청자들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피 냄새를 맡은 피라냐처럼 달려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