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2화 (112/175)

[동굴벽에공간있어요님 10,000원 기부!]

방금 지나간 벽면에 이상한 문양 있었는데 확인좀 제발

 “벽면에, 문양?”

누군가가 의미심장한 도네이션을 하기 전까지.

한세아를 비롯한 우리 일행들은 동굴의 벽면을 신경 쓰지 않았다. 동굴 벽을 뚫고 나오는 웜이나 고스트 계열의 몬스터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함정이 설치된 지하 던전도 아니니까.

하지만 할 짓 없는 시청자들은 온갖 것에 신경을 쓰기 마련이다. 어둠이 일렁이는 동굴의 통로를 긴장해서 바라보느니 그레이스의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이나 흔들리는 아이린의 수녀복 자락에 집중하는 괴상망측한 인간 군상들이 잔뜩 있다는 거지.

 “벽에, 문양이 있다고? 난 왜 못 본 것 같지.”

 “한나 양? 마법에 문제라도 있나요?”

 “음…. 아이린 언니, 동굴 벽에서 이상한 게 보이진 않았나요?”

우렁차게 울려 퍼진 도네이션 소리에 한세아의 발걸음이 뭉그적거리기 시작한다. 도네이션이라는 게 채팅처럼 즉각적이고 빠르게 갱신되는 게 아니다 보니, 훈수를 들었을 땐 이미 문양이 있다는 벽에서 멀어진 상황이었으니까.

호기심과 아쉬움으로 뒤를 흘깃 쳐다보며 발걸음이 느려지자 곁에 있는 아이린과 케이든이 한세아를 바라본다.

 “아뇨, 저는 못 봤어요.”

 “저도 못 봤습니다. 마법적인 무언가가 있습니까?”

물론 탐색과 관련이 없는 두 사람이 무언가를 발견했을 리 없지. 애초에 나 또한 10년을 모험가로 구르면서 동굴 벽에 뭐가 새겨져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그래도 헛소리라며 완전히 무시해버릴 순 없었다.

서브 퀘스트가 개방되어 탈모를 위한 이끼 채집 의뢰도 받은 마당에, 동굴 벽에 무언가가 나타날 수 있는 게 게임 아니겠는가.

10층에서 만월늑대가 나오고 20층에서 오크 추장이 나왔다 해서 그 뒤로도 30층 보스몹, 40층 보스몹… 이렇게 뻔하게 반복되면 게임 잘못 만든 거지. 21층에서 뭔가 단서를 찾을 수도 있는 거고, 5층 단위에서 이벤트가 열릴지도 모른다.

 “동굴 벽에 뭔가가 있는 것 같아서요.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한 번 살펴볼게요.”

뜬금없게 느껴지는 한세아의 말에 일행들의 눈이 동그랗게 변하며 시선이 내게 모인다. 동굴 벽에 관해 이야기해준 게 하나 없는데 무슨 상황인가 싶겠지. 하지만 나 또한 이런 경우에는 아는 게 없어 어깨만 으쓱일 뿐이다.

그렇게 동굴 벽에 관한 내용을 머리에 담아둔 채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일행들. 한세아의 말이 사뭇 신경 쓰였는지 다들 고개가 좌우로 까닥까닥 움직이는 게 앞에서도 훤히 느껴진다.

플레이어로서 쌓아 올린 신뢰가 꽤 두터운지라 헛소리로 치부하지 않고 다들 신경을 써 주는 모양새. 다른 모험가가 저런 말을 했다면 모험 전날에 술 처먹고 헛소리한다고 욕이나 먹었을 텐데.

한세아가 말한다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는 수준이 아니라, 메주로 팥을 만든다 해도 마법사라서 되겠구나― 하고 믿어버리는 분위기다.

 “야, 부검하기 전에 후딱 이야기 한 사람들 튀어 나와봐. 벽에 문양이 있었다면서, 설명 좀 해줘. 도네이션은 고마운데 타이밍이 늦으니까 이미 지나쳐버렸잖아. 롤랑한테 도네 들어서 그런데 후진해달라고 할 순 없으니까, 빨리.”

-돈 내고 조언해 줬는데 잔소리 들음

-1일 1금수짓임? 몬가역하네여 선생님 ㅎ

-설명이 머 필요해 동굴 벽에 뭐 그려져 있으면 딱봐도알지 ㅋㅋㅋㅋ

-스무스한 남탓… 이것이 일류 방송인이자 마법사 세계 랭커의 자질?

-이걸 극딜로봐야함 회피기동으로봐야함 확실한건 수금금수네여

[한세아의숨겨진본심님 10,000원 기부!]

사실 욕을 먹어도 좋으니 도네를 더 해줬으면 해

 “아니거든! …물론 만원은 정말 감사하게 받았습니다.”

그렇게 시청자들과 투닥투닥 대화를 나누면서도 동굴의 벽을 샅샅이 흩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한세아. 그러나 동굴거미 이후 코볼트 무리를 만나고 흡혈박쥐를 사냥했음에도 특이한 무늬가 새겨진 동굴 벽은 발견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일행들도 슬슬 고개를 까닥거리는 횟수가 줄어들고, 한세아도 시청자들도 동굴 벽의 문양이 어둠 때문에 헛것을 봤거나 어그로를 목적으로 거짓말을 했다는 분위기로 흘러가는 중이었다.

아이린이 나를 부르기 전까지는.

 “저, 롤랑?”

 “무슨 일이야?”

 “이쪽에 뭔가 이상한 게 잠시 보였어요. 그 횃불형 마도구가 벽에 가까워져야 보이는 것 같은데….”

한세아의 말을 철석같이 믿은 아이린이 지치는 기색도 없이 벽면을 계속해서 관찰하고 관찰하다가 무언가를 발견한 것이다.

고개가 부러질까 걱정이 될 정도로 머리카락 휘날리며 고개를 돌린 한세아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다가오는 일행들. 아이린의 요청대로 마도구로 벽에 글씨를 쓸 기세로 동굴 벽면에 들이밀어 보았다.

울퉁불퉁한 벽면이 은은한 빛을 받자 마치 인공적인 벽처럼 매끈하게 변한다. 문양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일부분만 매끈하게 변해 주변의 석순이나 종유석 등 울퉁불퉁한 동굴 벽의 그림자가 서리고 빛이 일렁여서 문양처럼 보인 건가.

모험가가 아니라 어디 시골 무지렁이를 데려와도 수상해 보이는 벽면. 울퉁불퉁한 동굴 안에 변 길이가 30cm 정도 되는 매끈한 정사각형 타일이 박혀 있는 모양새다.

 “이건, 뭐지?”

 “롤랑, 아는 게 있어?”

 “아니. 나도 탑을 탐사하면서 처음 보는데. 동굴에 이런 게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어.”

공간의 한계가 있어 커다랗고 묵직한 갑옷을 입은 내가 한 걸음 뒤에 빠져 있으니 호기심을 느낀 작달막한 머리통들이 옹기종기 모인다.

사료 그릇에 머리를 들이민 강아지처럼 착 달라붙은 머리통들. 심지어 케이든까지 자기가 남장을 했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다 함께 착 달라붙어 있는 모습이 귀엽기 그지없다.

내게 건네받은 횃불형 마도구를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가, 다시 멀리 떨어트린다. 검 손잡이로 톡톡 두들겨도 보고 매끈한 부분을 손바닥으로 문질러도 보며 태어나서 처음 과학 실험을 하는 아이들처럼 온갖 시도를 해 보는 일행들.

-21층 진입하니까 컨텐츠가 많아지네

-동굴벽에는 별로 관심이 없으니까 180도돌려주세여

-ㄹㅇㅋㅋ 누가 벽보고싶대? 눈나랑 마망이 이마 맞댄거 보여달라구

-그래서 저게 뭔데 씹덕들아

-존나 이질적이긴 한데 뭔지는 모르것다 먼 스위치 같은데 눌러도 별일없구

어차피 좁은 길목인지라 앞을 내가 틀어막고 뒤쪽에 케이든과 아이린이 있다면 기습을 당할 걱정도 없으니 퍼즐을 푸는 아이처럼 일행들이 전부 동굴 벽면에 달라붙는다.

하지만 살살 쓰다듬기도 하고 툭툭 때려 보기까지 해도 미동도 없는 벽면의 타일. 생긴 것만 보면 무슨 방 탈출 게임이나 공포 게임 같이 퍼즐 요소가 있는 게임의 미션판처럼 생겨선 아무런 반응도 없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한 가지 가설.

저거, 일종의 스위치나 버튼 아닌가? 그리고 이런 판타지 세상에서 스위치나 버튼 따위는 당연히 전기 대신 마력을 소모해서 움직인다.

 “한나, 저 안에 마력을 흘려 넣어 보는 건 어때?”

 “마력을?”

 “마력을 담은 손으로 만져만 보지 말고, 마도구를 가동한다는 느낌으로 저 벽면을 통해 동굴 안쪽에 마력을 직접 주입해 봐.”

저게 방 전등 스위치고, 그 너머에 있을 전선에 전기 흘리듯 마력을 때려 박아 보라고.

조금 답답해서 툭 튀어나올 뻔한 조언을 최대한 돌려서 말했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었는지 곧바로 지팡이를 겨누는 한세아.

손바닥 대신 지팡이 위에 떠오른 마력의 덩어리가 마른 땅에 스며드는 빗물처럼 스르륵 벽면을 파고든다. 미니맵 때문에 지팡이 들고 마력 움직이는 연습을 숨 쉬듯 하더니 마력 컨트롤 능력이 아주 뛰어나네.

그렇게 마력을 쭉쭉 빨아들인 벽면에 가시적인 변화가 생겨난다.

 “뭔가, 마력이 쭉 빨려 나가는 기분인데….”

 “마법사에게 반응하다니, 다른 마법사가 뭔가 남겨 둔 걸까요?”

매끈한 벽면 위에 새겨지는 푸른 마력의 선. 몬스터의 마석도, 마법이 되지 못한 마력의 덩어리도 그렇고 이 판타지 세상에서 너무 익숙한 푸른색이 벽면을 타고 움직인다.

스위치라기보다 회로 기판 같은 녀석이었는지 마력의 선이 어지럽게 흩어지며 동굴의 벽면을 타고 매끈하지 않은 부분까지 뻗어 나간다. 어둑한 동굴 속 벽을 타고 뻗어 나가는 푸른 마력광.

 “…아, 길 찾기 에반데.”

뻗어 나간 마력이 어둑하게 사그라들고 소리 없이 변한 동굴의 모습에 한세아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는다.

아무리 봐도 눈앞의 통로는 좁은 동굴길이 아니라 미로에 가까운 모양새였으니까.

탑의 21층부터 30층은 동굴 지형이다.

아니, 동굴 지형이었다.

좁고 울퉁불퉁한 통로에는 동굴거미나 흡혈박쥐가 있고, 갑자기 넓어지는 공터에는 종유석과 석순이 가득하며 고블린이나 코볼트 따위의 몬스터가 대량으로 출몰하는 지형. 안전지대는 막다른 길 끝에 있는 공터로서 바닥이 평평해 텐트촌을 만들 수 있는 장소였다.

그래, 였다.

 “몇 번째 갈림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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