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0화 (110/175)

어차피 며칠 있으면 게이트도 열릴 테니 새 마법도 배우고, 화살도 비싼 거로 주문하는 등 잠시 정비 기간을 가져야 하니 나쁠 건 없겠지.

미뤄 뒀던 짠해좌로서의 글도 작성해야 하고.

한세아가 이리저리 비틀린 화면 때문에 테이블에 고개를 박고 눈을 질끈 감은 채 기묘한 방송을 이어나가고 있을 때 슬쩍 인터넷 게시판을 열었다.

― 한세아 매직 미사일 보면 마음이 짠해

자연스럽게 길드에서 해산할 분위기가 되었으니 적당히 짠해좌의 글로 조언을 해 준 뒤 한세아의 숙취 디버프가 끝나면 마법이나 배우라고 해야지. 그래도 아이린이 야무지게 신성력으로 조물조물 주물러줘서 좀 빨리 끝나지 않을까.

21층 동굴 지형에서 마법사들이 무슨 마법을 주로 썼더라…? 옛 기억을 더듬으며 홀로그램 인터넷 창을 적당히 두들겼다. 기억하기론 빙결과 풍계 마법 중 잔해가 덜 남는 풍계 마법으로 흡혈박쥐를 떨궜던 것 같은데.

― 한세아 매직 미사일 보면 마음이 짠해

CC 셔틀 한다면서 딜 박을 생각하는 거 보면 슬퍼…

바람 계열 마법으로 비행과 벽 타기 정도만 방해해도 되는데

자기가 한 말 까먹고 딜 박을 생각하는 지능이라서 더 슬퍼…

좁아터진 동굴에 얼음 조각이 남아 있으면 검사들에게 방해가 되니 허공에 바람을 팡팡 터트리고 다녔었지, 아마? 파티를 짜고 돌아다니는 이상 파괴력이 덜하더라도 아군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

결국, 저층에서의 행동원칙과 달라진 게 없다. 아군에 방해가 되지 않고, 적군을 방해할 수 있으며, 마력을 아낄 수 있다면 아끼는 데다, 여차할 때 강력한 일격을 날리는 것.

상대가 네 발로 땅을 딛든 여덟 다리로 벽을 타든 심지어 날아다닌다 해도 변하는 건 없다. 이런 원론적인 부분을 놓고 보면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똑같으니까. 탱커는 막고, 검사는 베고, 마법사는 칼잡이들이 못 하는 일을 마법으로 해 주는 것.

 “어으, 그래도 신성력 마사지 덕분인가 디버프가 좀 풀려가는 것 같네. 그레이스 언니는 뭐… 슬프지만, 힘내라고 응원할 수밖에. 솔직히 어제 마신 양을 생각해보면 여기까지 온 게 용하긴 해. 숙소에 누워 있어도 이상할 게 없는 수준인데.”

내가 게시판에 글을 쓰는 동안 디버프가 어느 정도 해소된 한세아가 겨우겨우 고개를 든다. 물론 디버프 따위가 아니라 진짜 술에 꼴아버린 그레이스는 여전히 테이블에 고개를 박고 있는 상황.

그 모습이 어찌나 안쓰러웠는지 무뚝뚝함을 연기하는 케이든조차 안절부절못해 테이블을 떠나지 못할 지경. 어여쁜 본판이 아니었다면 사람이 아니라 좀비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 정도면 포션 같은 거라도 먹여야 하나?”

 “그러는 게 좋겠어요. 연금술사 길드에서 숙취 해소 포션 같은 걸 팔지 않을까요?”

그렇게 그레이스는 신성력으로 보듬어주는 아이린과 부축해주는 케이든에게 짐짝처럼 숙소로 운송되었다. 분위기를 탔다고 해야 할지, 원하던 대로 이야기가 흘러가지 않은 홧술이라 해야 할지 주변에서 권하는 술을 전부 마셔버렸으니까.

그렇게 길드에 남게 된 건 아직도 약간의 디버프에 시야가 흐릿한 한세아와 멀쩡한 나. 내가 곁에 남아 있자 한세아가 왜 그러냐는 듯 질문을 던져온다.

 “으음…. 나 기다리는 거야, 롤랑?”

 “정신이 좀 들면 마탑에 갈 생각이야. 몸은 좀 괜찮아? 새로운 마법도 배워야 하고, 20층의 보상도 정산받으러 가야지.”

 “아, 맞다.”

-까먹을 게 없어서 메인퀘 보상을 까먹어?

-20층까지 걸어올라가는 꼴 보기 싫으니까 빨리 게이트 지어두라고

-새스킬은 바람마법임? 에어블래스터같은거

-10층게이트처럼 이번에도 하루뚝딱이면 지어지나?

-바람마법배우면 바로 짠해좌 컨닝인거 티나지

아무래도 서브 퀘스트인 축복받은 숲에서의 여신과의 만남이 너무 인상 깊었는지 메인 퀘스트를 홀랑 까먹은 듯한 모습. 하기야 여신이 강림해서 탑에 관해 설명을 했으니 그게 더 메인 퀘스트처럼 느껴지긴 한다.

그렇다고 해서 20층의 부산물과 마석을 공짜로 홀랑 넘길 순 없지. 한세아야 시스템 보상으로 스킬 포인트 같은 걸 받을 테니, 이번에는 그레이스를 위한 화살통 같은 걸 챙기는 게 좋으리라.

케이든은 슬슬 마법 갑옷을 고칠 테고, 아이린이야 수녀복 이외의 걸 걸치지 않으니까. 아니면 한세아의 장비를 추가해도 좋고.

 “슬슬 괜찮아졌어. 확실히 신성력이 대단하긴 하네…, 마탑으로 가면 되나?”

 “그래. 아무리 기사단과 마탑이 자존심 싸움을 한다고 해도 이쯤 되면 결론을 내렸을 테니까.”

아마 자존심 싸움에서는 마탑이 이겼을 거라 생각된다. 그야 기사단이 이겨서 마석을 홀랑 가져가면 유저를 위한 20층 게이트는 어쩌려고. 메인 퀘스트를 밀었는데 편의를 위한 시설이 사라진다니, 히어로즈 크로니클에 그런 똥겜 스멜은 없었잖아.

그런 내 예상이 맞는다는 듯 마탑에 가서 마법사 한나의 이름을 대자 우리를 환하게 웃으며 맞이하는 중년의 마법사.

 “하하, 어서 오십시오! 마법사 한나 양과 모험가 롤랑 님, 맞으십니까?”

후덕한 볼살이 인상적인 중년의 마법사는 마법사의 로브보다는 인심 좋은 주방장 같은 외모였다. 그리고 그 외모만큼 손이 큰 건지, 아니면 안테노르가 손을 쓴 건지 헷갈릴 정도로 후한 보상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20층에 건설될 게이트의 무료 이용은 당연한 거고, 각종 마도구와 마법이 깃든 장비에 한세아에게 무료로 제공되는 마법서까지.

정작 보상을 받는 한세아도 이게 무슨 일인가 의아해할 정도로 후한 보상. 한세아도 시청자들도 한마음이 되어 이게 10층보다 20층 보상이 후한 거다, 롤랑 프리미엄이다 온갖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크흠, 원래는 보상 목록이 이보단 적었는데 제가 힘을 좀 썼습니다.”

 “아하, 그렇군요? 마법사님의 이름이….”

채팅창에서 한세아 비비게임즈 대주주설과 히어로즈 크로니클 방송인 혜택 이야기까지 나올 즈음이 되자 슬그머니 헛기침하며 은근히 고개를 기울이며 속닥거리는 후덕한 중년의 마법사.

한세아가 장비를 둘러보며 시청자들이 펼치는 온갖 개소리에 대응하고 있기에 내가 대신 그에게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말 몇 마디로 금화 십수 개 어치의 이득을 볼 수 있다면 봐야지.

 “제가 뭐, 나쁜 마음을 먹고 보상을 빼돌리고 못 할 짓 하는, 그러는 게 아닙니다.”

 “그럼요. 마법사로서 궁금한 게 있어 탐구를 위해 모험가에게 의뢰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렇죠, 그래요. 그, 한나 양의 파티는 계속 위로 올라갈 것 같던데… 21층은 가 보셨습니까?”

 “예, 아직 게이트가 완성되지 않아 가볍게 21층을 둘러보고 왔죠.”

내 말에 표정을 환히 밝히면서도 목소리는 한층 더 낮아진 중년 마법사. 무슨 마탑의 마법사가 아니라 뒷골목에서 거래를 시도하는 암상인처럼 자세까지 구부정하게 숙이자 한세아 또한 이쪽에 관심을 가지고 슬그머니 다가온다.

마탑의 응접실이니 엿보는 사람이 없을 텐데 무슨 작당 모의를 하듯 머리를 모으게 된 우리 세 사람. 미남, 미녀, 후덕한 아저씨 세 사람이 머리를 맞대자 시청자들이 보기엔 꽤 우스워 보였나 보다.

-아니 고작 망토를 밀거래하듯주네 ㅋㅋㅋ

-설마 저 보상들 장물이고 이런건아니지?

-세상 심각한 얼굴로 대체 뭘 말하려고

-그 웃는 돼지? 복돼지상이라 음모를 꾸밀 것 같은 모습은 아니네

-한세아 잘 봐달라고 뇌물도 받고 많이 컸네

뭐 대단한 이야기가 나올 리 없다, 그리 생각하며 비웃는 시청자들. 하기야 고위 마법사도 아니고 보상 전달하는 중급 마법사 정도라면 별다른 이야기를 할 게 없겠지.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진중한 표정의 마법사가 말을 이어나가기 전까진.

 “그, 별다른 건 아니고… 21층에서 더 위로 올라간다니 의뢰를 하고 싶은데. 동굴에서 채집할 수 있는 다양한 이끼를 부탁하고 싶어서.”

 “뭐, 그 정도야 간단하죠.”

 “그런 건 길드를 통해 의뢰해도 되지 않나요?”

 “에헤이, 한나 양. 길드를 통해 의뢰하면 수수료를 떼야 하지 않나. 이렇게 마법사끼리 직접 거래를 하면 수수료를 내지 않아도 된다고.”

한세아의 말에 기묘하게 인상을 찡그리는 중년 마법사. 무언가 수상쩍은 표정이라 생각을 하고 있으니 한세아가 시스템 창을 발견하고 눈을 휘둥그레 뜬다. 잘 좀 부탁한다며 슬그머니 사라지는 마법사도 무시한 채 무언가를 열심히 읽는 그녀.

방송 화면에 공유하는 걸 까먹었는지, 호기심을 끌어내 시청자를 약 올리는 중인지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러가고 방송 창에는 보여주질 않는다.

[방송중에혼자야설읽는한세아님 5,000원 기부!]

좋은 거 혼자 보지(LOOK) 말고 같이 보자

 “아니, 큽, 너 이새, 크흐흡―”

뜬금없이 울려 퍼지는 인공지능의 엘오오케이 발음에 한세아가 웃음을 팍 터트린다. 그러더니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처럼 손사래를 치며 나를 바라보는 그녀.

방송인용 언어는 NPC가 최면에 걸린 것처럼 못 알아듣는다지만, 몸짓이나 웃음소리까지 필터링 되는 건 아니다 보니 내게 설명을 시작한다.

 “그, 롤랑? 내가 연금술 배운 거 알지?”

 “그래. 10층에서 늑대 유인향을 만든다고 조금 배우지 않았었나?”

눈동자를 살그머니 굴린 그녀가 입 밖으로 꺼낼 말을 정리하는 척하며 폭주하기 시작하는 시청자들에게 퀘스트 창을 공개한다.

[중급 마법사 바스티앙은 최근 넓어지는 이마가 걱정이다]

[탑의 중층에서 구할 수 있는 이끼가 과연 특효약이 되어줄 수 있을까]

 “내가 알기로, 그, 21층의 이끼로 탈모약을 만들 수 있다고… 들었는데. 맞아?”

 “……나야 모르지. 그런 의뢰는 받아본 적 없으니까.”

-풍성충은 머머리의 마음을 모른다…

-마법으로도 고칠수 없어서 연금술에 손을 대야하는 희대의 불치병 ㄷㄷ

-그 서브 퀘스트인건 알겠는데 기분이 먼가먼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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