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또 뭐야?!”
남의 밥상을 낼름 훔쳐 먹기에 아주 최적인 상황이었다.
미안하다, 알렉스. 나중에 팬이라고 찾아오면 좋은 방패 하나 줄게.
모험가들은 명성으로 먹고사는 만큼 명분에도 민감한 편이다. 하는 일에는 거의 차이가 없는데 용병과의 차이점이 뭐냐고 묻는다면 그 부분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겠지.
용병은 돈을 주면 무엇이든 하는 칼잡이들이라면, 모험가들은 이미지 관리를 하며 살아가는 칼잡이들. 시민들의 시선으로 보자면 모험가는 사설 경호업체의 떡대들, 용병은 뒷골목 조직의 떡대들 같은 느낌이다.
어디 도련님의 경호원을 찾는다면 모험가 같은 사람을 찾겠지만, 학교 폭력에 당한 내 아들의 복수를 위해서는 용병 같은 사람을 찾겠지. 물론 명확한 분류법이 있을 리 없으니 대충 이미지만 그렇다는 이야기다.
“넌 또, 뭐야 씨발!”
“…….”
잔뜩 흥분해서 도끼를 내게 겨누는 용병 발베스와, 말없이 호흡을 고르며 나를 바라보는 모험가 알렉스. 발베스야 딱 봐도 다혈질에 단순무식한 게 보이고 알렉스는 아무래도 상황을 파악하려고 머리를 굴리는 모양.
갑작스럽게 끼어들었다고 생각하면 내가 불청객이 되어 욕을 먹겠지만, 안타깝게도 이번 결투에 끼어들 명분은 내게도 충분하다. 곧바로 한 걸음 성큼 걸어 한세아에게 다가가기만 하면 되니까.
“혈기왕성한 건 좋은데 남의 파티 리더 데리고 뭘 하는 거야? 달이 저렇게 밝은데 술이나 마시러 가자고, 친구들.”
“어, 롤랑…?”
인파를 헤치고 튀어나온 것도 아니고, 갑자기 머리 위에서 겅중 뛰어서 나타날 줄 몰랐는지 눈이 동그랗게 변하는 한세아. 딱 봐도 나를 알아보는 한세아의 모습에 모험가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사람 머리 위를 훌쩍 뛰어다니는 금발 머리의 전사와 희귀한 검은 머리의 여자 마법사. 10층의 만월늑대를 사냥하고 20층 오크의 제단을 부숴버린 마법사 한나 파티의 인상착의 아닌가.
명성으로 먹고살고 명분을 중시하는 놈들이 최근 벌어진 사건의 주인공을 모를 리 없지. 아무리 술에 취했다지만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나 모인다면 의심하기도 힘들다.
“한나! 괜찮아? 어디 다친 덴 없지?”
“그레이스 언니까지? …언니, 롤랑 데리고 술 마시러 가라니까.”
“아이 씨, 이런 상황에 어떻게 그래. 너 시비 붙자마자 롤랑이 알아봤단 말이야.”
거기에 인파를 헤치고 나온 그레이스 또한 회색 머리카락의 인상적인 미녀다. 아름답다는 건 남들과 구분된다는 뜻이다 보니 사칭을 하기도 힘들지. 두 사람을 넘어 세 사람이 모이자 모험가들의 숙덕거림이 바뀐다.
두 사람이 찰싹 달라붙어서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자 사람들의 시선이 마치 자석에 달라붙는 쇳가루처럼 모인다. 내게는 두 사람의 엉뚱한 속닥거림이 들리지만, 남들에게는 그저 친분을 과시하고 사정을 설명하는 것으로 보이겠지.
용병과 모험가의 결투에서, 파죽지세로 성장하는 루키 파티의 이야기로. 한세아는 결투의 명분이 된 미녀가 아니라, 이야기의 주인공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술이라, 좋지. 안줏거리로 오늘 이야기를 좀 떠들어도 되나?”
“아프지 않게 살살 씹는다면야, 얼마든지.”
흥분해서 씩씩거리는 용병과 달리 버클러를 든 모험가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시도한다. 껄떡대는 용병을 무찌르고 주인공이 되긴 글렀으니 오늘 이야기를 떠들며 팔아먹어도 되냐는 뜻.
그런 우리가 못마땅한지 콧김을 씩씩 뿜어내던 용병이 내 쪽을 향해 큼지막한 도끼를 휘두른다. 생긴 건 수염 덥수룩한 산적처럼 생겨선, 하는 짓도 진짜 외모 따라가네.
“음? 그쪽 용병 친구도 할 말이 있나?”
“이, 이런 씹…?”
물론 마력이 제대로 담기지 않은 양날 도끼 따위가 내 피부를 뚫을 리 있나. 사람 목은 물론이요 오크 수준의 몬스터는 두 동강 낼 수 있는 맹렬한 공격이 퍽-! 소리를 내며 내 손바닥에 틀어박힌다.
정확히는 어린 아이의 주먹을 잡아채듯 도끼날을 손가락으로 잡아 쥐었다. 훈훈하게 끝나야 떠들기 좋지, 분위기 파악 못 하고 무기를 휘두른 용병의 팔이 산산이 조각나서 술 먹다 말고 피범벅 분수 쇼를 관람하게 되면 시민들에게 자랑스럽게 떠들지 못하잖아.
패시브가 터지지 않게 손가락으로 도끼를 잡아챘지만 남들이 보기엔 결국 맨손으로 흉흉한 도끼날을 틀어막은 모양새. 쑥덕거림이 환호성이 되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용병이 나무에 잘못 박힌 도끼를 빼듯 낑낑거리며 도낏자루를 들고 안간힘을 쓴다.
“이, 이 새꺄! 안 놔?”
“놔 주면 조심해라?”
“뭐, 어엇―?”
녀석이 뒤로 체중을 확 당기는 타이밍에 맞춰 도끼를 밀어 던지듯 놔 주었다. 그러자 도끼와 함께 뒤로 넘어져 바닥을 나뒹구는 용병. 그 꼴이 퍽 우스웠는지 모여든 사람들도 속닥거리던 한나와 그레이스도 키득키득 웃는다.
어디서 보기 힘든 수준의 미녀들이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틀에 박힌 악당이 망신을 당한다. 현대에 살아가든 중세 판타지에 살아가든 사람은 본능적으로 이런 걸 좋아하기 마련.
주변에서 한껏 손가락질하며 비웃어도 흙먼지로 벌게진 얼굴이 더럽혀진 용병은 아무 말 없이 허겁지겁 인파를 밀쳐내고 골목길을 향해 뛰기 시작한다. 칼밥을 먹고 살면서 제 일격을 맨손으로 막아버린 사람에게 덤빌 정도로 멍청하진 않은 모양.
“한나, 금화를 줄 테니 이걸로 운수 좋은 놈팽이 여관에서 한턱내겠다고 크게 외쳐.”
“어, 내가? 진짜로?”
“그래, 이럴 때 쓰려고 돈을 번 거 아니겠어?”
도끼날을 맨 손으로 막아내는 기행에 알렉스라는 모험가도 조용해진 상황에서 슬그머니 한세아의 등을 툭 밀어 인파의 앞으로 보냈다. 기왕 광대가 될 거라면 최고의 광대가 되어 이름이라도 날려야지.
한세아가 내게 받은 주머니를 번쩍 들어 올리며 공터의 가운데로 나서자 시선이 모여든다. 그래도 방송인 경력이 있다 보니 고작 수십 명 모인 앞에서 긴장은 하지 않는 그녀.
“시끄러운 놈도 갔겠다, 롤랑 말대로 달도 예쁘겠다, 술이나 마시러 갑시다! 돈은 내가 낸다앗―!”
“미모만큼 화끈하시네, 누님!”
“네 얼굴로 저런 아가씨를 누님이라 불러도 되는 거냐?!”
“술값 내주면 다 형님이고 누님이지!”
그래도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지 한세아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지만 이미 술과 분위기에 취한 모험가들은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수십 명 중 누구 하나는 우리 파티를 알고 있는지 이름을 크게 외칠 뿐.
“나, 나는 왜…?”
“같은 파티니까.”
한세아가 발걸음을 옮기자 황급히 뒤따라가는 그레이스. 그리고 우리들의 뒤를 따라오며 열심히 이름을 외치는 모험가들. 얼떨결에 제 이름도 같이 불리게 된 그레이스가 한세아와 함께 시선을 내리깔지만, 모험가들의 목소리는 되려 높아져 간다.
당차게 한턱낸다고 외친 아름다운 아가씨 두 명이, 인제 와서 부끄럽다고 고개를 푹 숙이면 술기운과 분위기를 빌려서라도 조금 놀려 보고 싶지 않겠는가. 파티의 보호자 역할인 나 또한 싱글벙글 웃고 있는데.
차마 이 부분마저 녹화할 용기는 없었는지 어느새 반투명한 카메라 드론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
“오늘은 각자 할 일 하면서 쉬고 내일부터 다시 21층에서 훈련하자. 어차피 게이트 만들어지는 거 기다려야 하고, 마탑에서 보상도 받아야 하니까.”
“…죄송합, 으읍, 니다아.”
“미, 미안….”
두 사람이 길드 테이블에 축 늘어지니 케이든과 아이린이 놀랍다는 듯 바라본다. 어제의 분위기에 취해버린 두 여자가 과음을 넘어 폭음에 가까울 정도로 술을 마셨기 때문이다.
그레이스는 평범하게 숙취에 시달리는지 끙끙 앓으면서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고, 한세아는 플레이어로서 숙취 디버프라도 생겼는지 방송 창으로 보이는 시야가 기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저런 건 신성력으로 치료할 수 없습니까?”
“가능은 하지만, 권하지는 않아요. 다치고 아픈 것도 아닌데 사사로이 남용하기는 좀….”
케이든의 질문에 치유 성법까지 쓰는 건 조금 꺼려진다는 듯 말하는 아이린. 하기야 여신이 실존하는 세상인데 고작 숙취에 성법을 남용하기는 좀 그런가? 심지어 아이린은 예비 성녀잖아.
물론 말은 그렇게 해도 끙끙 앓는 두 사람이 불쌍한지 신성력을 담은 손바닥으로 조물조물 안마는 해 준다.
“아니, 정신은 멀쩡한데 지금 시야가 막 일그러지니까 플레이하기가 좀 힘든데? 카메라 빼고 1인칭으로 돌려 줄 테니까 함 봐볼래?”
-이 정도면 술 마신 다음날이 아니라 약을 한사발 마셨는데여
-사이버과식, 사이버기아, 사이버식중독에 이은 사이버숙취
-보는 내가 멀미가나네 ㅋㅋㅋㅋㅋ
-중세 여관이라 술에 환각제 타서 팜?
-그레이스 눈나랑 같이 술에 꼴은 이유가 먼데
“안 그래도 그거 이야기해 주려고 찍어두긴 했는데… 어우 씨, 숙취 디버프가 이렇게 셀 줄 몰랐지. 아이콘이 안 보여서 썰을 못 풀겠네 이거.”
[롤랑의빅빠따단님 10,000원 기부!]
현실 숙취도 아니고 사이버 숙취 때문에 공략이 밀리냐 비읍시옷아
“아니, 이게… 욕을 먹어도 뭐라 할 대꾸가 없네. 어제 그레이스 언니랑 친목을 다지며 술자리를 가졌기 때문에 과음을 좀 했습니다. 현실 과음 말고 그, 운수 좋은 놈팽이에서 마셨어요. 그래도 아이린 언니가 마사지를 해 주니까 좀 나아지는 것 같기도 하고.”
보이는 시야만 일그러져서 그런지 아예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고 시청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한세아. 그 모습이 숙취의 어지럼증 때문이라 생각하는지 아이린이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목덜미를 조물조물 주물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