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가는 명성으로 먹고사는 존재다.
내가 뿔늑대 사건 당시에 군말 없이 건물 수리비 면목으로 돈을 푼 것과 팬을 자처하는 아저씨들에게 살갑게 대하며 금화 한두 개 값어치는 하는 보조 무기를 턱턱 뿌리고 다니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
모험가 업계에서는 입소문이 돈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나는 발베스, 핏빛 도끼날 발베스다!”
“발베스? 저런 이름 들어본 적 있어?”
“글쎄…, 요즘 탑에서 들리는 이름 중 저런 이름은 없었는데.”
한세아의 테이블에 허락도 받지 않고 앉은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윽박지르지만, 슬그머니 포위망을 형성하는 모험가들은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자세를 잡는다.
모험가의 도시에서 통하는 것은 용병으로서의 명성 따위가 아니라 탑을 얼마나 높이 올랐는지 뿐이니까. 집 안방에 금송아지가 있고, 성적이 어떻고,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봐야 게임 커뮤니티에선 ‘그님티?’ 한 마디에 정리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님 탑 몇 층까지 등반하셨는데요?
“이봐, 도시 밖에서 네가 얼마나 유명했는지 따위에는 관심 없어. 이 도시에서 중요한 건 모험가로서 얼마나 이바지했는지 뿐.”
“이 새끼들이 감히….”
백 명의 목을 베었네, 산적을 토벌했네― 이딴 이야기보다 중요한 것은 모험가로서의 이야기. 그리고 모험가들을 그렇게 만든 건 이 도시의 시민들이지.
백 명의 목을 벤 용병보다 뿔늑대 사건 때 여관 앞을 지켜준 모험가를 우대하는 시민들. 산적을 토벌한 전공보다 탑에서 획득한 마석을 높게 평가하는 시민들. 탑 주변에 생긴 도시인 만큼 이 모험가의 도시는 시민부터 귀족까지 모험담에 진심인 편이거든.
소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테이블 위에 턱 놓이는 차가운 상그리아와 큼지막한 스테이크. 그레이스는 한세아가 걱정되는지 시선을 떼지를 않기에 나도 시원한 술을 목구멍으로 넘기며 그 촌극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핏빛 도끼날 발베스라, 그래서 덤빌 테냐?”
“뭐…?”
그리고 모험담에는, 불량배를 무찌르는 모험가의 이야기가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
“싸우실 거면, 나가서 싸워주세요….”
“어머, 알렉스 오빠? 이기고 돌아오면 찐~ 하게 서비스해 줄게요?”
수십 명의 손님이 저마다 무기를 만지작거리며 노려본다. 그 뒤에서는 여관의 여급들이 애인에게 액세서리를 사 달라는 눈빛으로 용병들을 바라보며 모험가들을 부추기는 상황. 어떤 의미에서는 저 용병들이 몬스터와 마찬가지다.
뿔늑대의 습격에 맞서 가게를 지키나, 행패를 부리는 외부인(용병)으로부터 여관을 지키나 둘 다 입소문이라는 게 날 수 있으니까.
수다를 떨기 좋아하는 여급들의 입에서, 여관 주인과 거래하는 다양한 가게 주인들의 입에서, 술자리에서 떠들기 좋아하는 동업자 모험가들 입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오르내리는 것. 그 또한 사소하지만, 모험가로서의 명성을 쌓는 일이기에.
“이, 이 미친 새끼들이…?!”
“요즘 용병들은 입으로만 싸우나?”
버클러를 집어 든 모험가가 의기양양하게 앞으로 나서자 다른 모험가들은 선수를 빼앗겨 아쉽다는 듯 칫, 하고 혀를 차며 그 꼴을 구경한다. 모험가가 가득한 도시에서 행패를 부리는 놈들은 드무니 이야기의 주인공 자리를 빼앗겨서 아쉬울 수밖에.
당사자가 된 한세아도 당황해서 눈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고, 그런 도시의 일상이 이해가 되지 않는지 그레이스도 입을 헤 벌리고 구경을 하고 있다.
“음식 식겠다, 슬슬 정리될 것 같은데 먹자.”
“어, 롤랑? 저거 좀 이상하지 않아? 아니, 한나가 예쁜 건 알겠는데….”
아무리 그래도 술 마시던 모든 사람들이 도우러 나서는 것은 이상하고, 종업원들도 꺄꺄 웃으며 부추기는 건 더 이상하겠지. 명백히 상식과 어긋나는 반응인지라 행패를 부리던 용병도 구경하던 그레이스도 당황스러울 수밖에.
도시의 시민으로서 다른 영지의 농노들과 전혀 다른 관념과 상식을 지닌 사람들, 모험가로서 아주 사소한 명성이라도 얻고 싶어 달아오른 모험가들, 거기에 더해진 모험가로서의 미약한 동료 의식까지.
모르면 맞아야 한다는 명언을 떠오르게 만드는 이색적인 도시의 일상이었다.
“모험가들이니까 그런 거야.”
“모험가라서?”
한세아가 안전하다는 걸 확인한 그레이스가 그제서야 테이블에 똑바로 앉아 나를 바라본다. 모락모락 김이 나던 먹음직스러운 스테이크는 미적지근하게 식어버렸지만, 그 대신 좋은 구경을 했으니 상관없으려나.
그레이스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지 고기를 잘게 썰어서 자그마한 입으로 오물오물 스테이크를 씹으며 내 설명을 듣는다.
“우리 파티는 신경 쓰지 않지만, 모험가들이 받는 개인 의뢰는 생각보다 다양하거든. 사실상 용병과 모험가를 구분하는 게 의미가 없을 정도로. 모험가 길드가 받는 의뢰는 탑과 마석에 관련된 의뢰지만, 개인 의뢰는 달라.”
“그래서 싸운다고…?”
“시민들이 곤란에 처했을 때 가장 먼저 앞장선 모험가. 그 정도의 이미지만 있어도 사소한 이득은 충분히 챙길 수 있으니까. 근처 마을에 우편을 보내는 것부터 어떤 물건을 구해달라는 의뢰까지, 아주 사소한 신뢰라도 있으면 모르는 사람보다는 마음 편히 맡기겠지.”
식었어도 충분히 맛있는 스테이크를 한 점 더 썰어 먹으며 슬쩍 한세아 쪽을 바라보았다. 설명하는 사이 자존심을 굽히지 못한 용병과 이름을 퍼트리고 싶은 모험가가 결투를 위해 가게 밖으로 나간 모양.
결투의 원인이라서 그런지, 인파에 휩쓸렸는지 테이블에 앉아 있던 한세아도 어영부영 휩쓸려 밖으로 나가는 뒷모습이 보인다. 데이트 구경하려다 남정네들 결투 구경하게 생겼네.
어느새 그레이스와 나의 데이트라기보다는, 우당탕탕 한세아의 모험가 도시 체험기가 되어버린 상황. 스테이크를 씹고 상그리아로 입을 축이면서도 자꾸만 시선이 뒤를 향하는 그레이스에게 말을 걸었다.
“계속 마음에 걸리면, 보러 나갈까?”
“어, 응?”
“데이트야 나중에 해도 되는 거고. 우리 파티 리더님 뭐 하나 보러 가도 좋겠지.”
그리고 그편이 더 놀려 먹기 좋을 것 같고. 한세아 딴에는 연애조작단 놀이를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어설프기 그지없다. 지금 기회를 잡으면 죙일 놀려먹을 수 있겠는걸.
한세아에게 합류한다는 건 사실상 데이트가 끝난다는 소리지만 그레이스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거린다. 아무래도 천재 마법사 한나양에 대한 과보호기가 살짝 있는 것 같네.
반도 먹지 않은 스테이크와 한 모금 마신 술값을 흔쾌히 지급하고 우리 또한 인파의 꽁무니를 따라 여관 밖으로 나섰다. 먼저 나간 사람들도 술에 취해 길게 꼬리를 늘어트린 상태라 따라가긴 쉽네.
“저 사람들인 것 같지?”
“이 근처에 공터는 여기뿐이니까. 아, 한나도 저기 있다.”
그 와중에 눈 좋은 그레이스는 인파들 사이에 휘말린 한세아를 귀신같이 찾아냈다. 물론 나도 한세아를 찾는 데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저 방송 귀신이 이 와중에 급히 카메라를 켰거든.
인터넷 창을 슬쩍 보니 급히 방송을 시작한 건 아니고, 어디에 짤막한 영상으로 써먹기라도 할 생각인지 머리 위에 슬쩍 날아오른 반투명한 카메라 드론. 하기야 모험가와 용병이 여관에서 시비가 붙어 결투를 벌이는 상황이다. 시청자들에게 썰 풀긴 좋겠네.
“이봐! 도끼날이라 했나? 지면 오늘부터 면도날이다, 넌!”
“알렉스! 여관에서 필라 양이 기다린다고! 후딱 끝내버려!”
작은 버틀러와 한손검을 쥔 모험가와 커다란 양날 도끼를 든 용병이 마주 보고 선 상황. 술에 취한 모험가들이 마치 투기장의 링처럼 그들을 둘러싸고 꽥꽥 소리를 지른다. 시민이 없는 공터 쪽이라 그런지 경비병들도 슬쩍 시선만 주고 관심을 꺼버리는 장소.
그런 장소에 한세아가 이질적으로 툭 튀어나와 있었다.
알렉스라는 모험가와 발베스라는 용병이 투기장 위의 선수, 구경꾼들이 투기장의 링처럼 서 있다면 한세아는 투기장 위의 심판처럼 두 사람과 구경꾼 사이에 어정쩡한 위치에 서 있는 상황.
“미녀 마법사님이 보고 있다고! 화끈하게 싸워라! 죽지만 않게!”
“공증인이 있는 결투다! 남자답게 굴라고, 남자답게!”
심판 같은 위치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심판이었냐. 떠밀려서 심판처럼 결투의 공증인 자리에 선 것도 웃기고, 그 와중에 카메라 켜고 녹화하는 것도 웃기다. 인간에게 천직이란 게 있다면 한세아는 방송인과 광대가 천직 아닐까.
저 소란의 한가운데에서 방송 거리 잡혔다고 씨익 웃고 있는데 누가 감히 부정할 수 있겠어.
“어, 생각보다 즐기고 있는 건가?”
“그런 것 같지? 걱정할 필요는 없었네.”
콩깍지 덕분에 걱정 가득하던 그레이스조차 마음을 가볍게 먹고 슬그머니 내게 팔짱을 낄 정도. 팔뚝에서 느껴지는 부드럽고 말캉한 감촉을 만끽하며 두 사람의 결투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잔뜩 흥분한 상태로 커다란 양날 도끼를 붕붕 휘두르는 용병과 술에 취했음에도 냉정하게 거리를 재며 도끼날을 여유롭게 피하는 모험가.
여관 손님을 우르르 끌고 나온 주제에 결투는 생각보다 일방적이네. 털북숭이 용병 놈에게 숨겨둔 비장의 한 수가 없다면 저대로 붕붕 휘두르다가 체력이 다 떨어져서 제압당하겠네. 생각보다 실력 차이가 크게 나는 바람에 관중들의 야유도 심해진다.
“별로 보는 재미가 없는데, 한나 데려올까?”
“한나를 데려온다니? …뭐, 나야 상관없기는 한데.”
일방적으로 흘러가는 승부, 흥분이 조금씩 식어가는 관중들, 둥글게 둘러싼 인파와 한가운데에 있는 미녀… 이자 우리 파티의 리더. 그쪽을 향해 풀쩍 뛰어올라 인파 사이로 뛰어내린다.
충격을 경감시킬 생각도 하지 않고 쾅- 소리를 내며 흙먼지 자욱하게 등장한 내게 쏠리는 시선들.
“이봐, 야밤에 너무 소란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