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7화 (107/175)

똑똑―

야심한 저녁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고 있으니 노크 소리와 함께 그레이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한세아와 함께 숙소로 향한 그녀가 이 늦은 시간에 내 숙소까지 왔다면 이유는 하나뿐이겠지.

침대에서 슬쩍 일어나 문으로 다가가니 벌써 가쁜 숨소리와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느껴진다. 내가 아무리 초인적인 육체를 지녔다 해도 이 정도라니.

하기야 용기를 내기 위해 술을 마시고 갈 데까지 간 두 남녀가 늦은 저녁 개인 숙소에서 만나면 무얼 하겠는가. 그레이스의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는 그렇고 그런 걸 기대하며 저토록 가파르게 뛰고 있겠지.

 “무슨 일이야?”

 “저기, 롤랑? 같이 시장에 가 보지 않을래…?”

주저 없이 문을 열자 눈앞에 보이는 것은 가죽 갑옷 대신 단출한 원피스 차림의 그레이스였다. 물론 단출한 차림이라 해서 신경을 쓰지 않은 건 아닌지 코끝에 달콤한 향기가 느껴지는 게 생각보다 신경을 써서 꾸민 모양.

아무리 가챠 캐릭터가 외모와 청결 버프를 받았다 해도 말끔히 씻고 화장을 한 뒤 향수까지 뿌리고 나오면 티가 나는 게 당연하다. 그것도 배경이 중세와 근대에 현대까지 기묘하게 섞어 둔 판타지라면 더욱더.

문제가 있다면 그레이스의 은은한 향기도 아니고, 원피스 덕분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몸매도 아니었다. 복도 코너에 제 딴에는 열심히 숨어 있는 한세아가 문제였지.

 ‘…방송은 꺼져 있네.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야.’

반투명한 카메라 드론도 보이지 않고, 슬쩍 시선을 준 홀로그램 인터넷 창에도 한세아의 방송은 오프라인으로 표시된 상황. 방송을 종료하고 숙소 침대에서 세이브를 한 뒤 게임을 종료했어야 할 사람이 왜 저기에 어설프게 숨어 있을까.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이쯤 되면 알아차릴 수밖에 없지.

 “저, 롤랑?”

 “그래, 잠시만 기다려 줘.”

인터넷 창을 흘낏 바라보며 한세아를 확인하는 내 모습이 데이트 거절이라 생각했는지 살짝 불안하게 흔들리는 그레이스의 목소리.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안심시켜 준 뒤 천천히 방문을 닫고 옷장으로 향했다.

침대에 누워 편히 입고 있던 반바지에 잠옷용 낡은 셔츠 차림으로 데이트하러 갈 순 없지.

그나저나 한세아 쟤는, 내가 초인이라는 자각이 없는 걸까?

아무리 내가 탐색 관련 패시브가 없는 전사 계열이라지만 마력으로 육체를 강화하는 초인. 울창한 숲과 어두운 동굴에서 수십 m 밖의 적을 알아챌 순 없지만, 10m도 안 될 거리의 복도 코너에서 슬쩍 얼굴을 내밀고 있으면 시선이 마주치지 않더라도 위치는 알 수 있는데.

 “시장이라, 화살 사러 가는 거야?”

낡고 편안한 셔츠 대신 개인 의뢰를 받을 때 입는 말끔한 셔츠와 바지를 챙겨 입었다. 히로인즈 크로니클의 세상을 바탕 삼아 만든 중세 판타지 게임이라 그런지 남성 의류는 뭐가 없거든.

마카롱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파는 카페가 존재하는 판타지 세상인 만큼 여성의 의복은 속옷부터 코트까지 온갖 현대식 복장이 있는데, 남자의 평상복은 그냥 셔츠와 정장뿐이다.

 “그것도 있고, 21층 올라간 기념으로 같이, 음… 술이나 한잔하고 싶어서.”

 “술이라, 좋네. 화살부터 보러 갈 거야?”

 “응. 아니면 시간이 늦었으니까 바로 수, 술 한잔하러 갈래?”

그렇게 차려입고 밖으로 나서자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술을 마시자는 그레이스와 여전히 머리만 빼꼼 내민 채 구경 중인 한세아. 저게 숨는다고 숨는 것인지 진지하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뭔가 아는 척을 하면 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레이스와 내가 잘 되는 걸 도와주려는 건 알고 있었다. 지난번 캐릭터 퀘스트 때문에 그레이스의 고향에 갔을 때부터 우리 두 명이 함께하도록 은근히 리더로서 의견을 냈으니까. 그걸 넘어서 저렇게 적극적인 데이트 코칭을 할 줄은 몰랐지만.

 ‘무슨 러브 코미디의 주인공 놀이라도 하는 것 같네.’

둔감남에게 주연 여캐를 붙여주기 위해 데이트를 미행하는 여주인공. 서브 컬쳐에 푹 빠진 사람이라면 익숙하다 못해 안정적인 맛이 느껴지는 상황이다.

숙소 밖으로 나와 그레이스와 보폭을 맞춰 걸으니 슬그머니 팔을 붙잡아오는 그레이스. 손을 마주 잡거나 팔짱을 낄 용기는 아직 알코올이 부족해서 나지 않나 보다. 그와 동시에 타다닥- 하고 급한 발소리가 숙소 복도에 울린다.

거짓말도 못 하더니 미행도 못하는구나. 아니, 현대에 살아가는 여성이 그걸 잘하면 좀 이상한가?

 “생각해 둔 식당이 있어? 아니면 가 보고 싶던 곳이라던가.”

 “그러면….”

내 질문에 고개를 비뚜름하게 돌린 채 고민을 시작하는 그레이스의 모습이 귀엽기 그지없다. 딱 봐도 한세아랑 짜고 온 상황이면서 고민을 하는 척 연기하는 게 너무 어색했기 때문에.

한세아도 방송 때문에 거짓말할 때면 말을 더듬거나 눈을 껌뻑거리면서 허공을 막 바라보던데, 그레이스 또한 부끄러움 때문인지 눈동자가 이리저리 허공을 더듬거린다.

그 방송인에 그 시청자라던가, 반려동물은 주인을 닮아간다는 소리는 들어 봤어도 NPC가 플레이어를 닮아가는 경우는 또 처음 보네. 데이트도 밀어주고 연애 상담도 해 주고 화장법도 알려주는 걸 보니 엄청 친해지긴 한 것 같긴 한데….

 “그냥 운수 좋은 놈팽이 여관에 가자. 거기가 술이 제일 괜찮으니까.”

 “그래? 더 좋은 곳에도 데려가 줄 수 있는데.”

 “아냐, 괜찮아! 거기에서 마신 술이 진짜 맛있었어.”

넌지시 권하는 내 말에 화들짝 놀라 손사래를 치는 그레이스. 거리를 두고 우리 뒤를 따라오는 한세아를 위함인지 좀 비싼 가게에서 한턱내겠다는 내 말에 맹렬한 거부반응을 보인다.

이제 21층에 도달한 우리 파티의 지갑 사정이라면 운수 좋은 놈팽이는 동네 편의점 가듯 갈 수 있다. 고작 한 끼에 은화를 쓴다 해도 고블린 한 무더기만 잡아서 커버가 되는 수준이니까.

그러나 내가 분위기를 잡기 위해 금화 단위로 쓰는 레스토랑에 그레이스를 데려간다면 뒤따라 오는 한세아가 끼어들 수 없겠지. 무엇을 위해 따라오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좋아한다니 다행이네.”

 “으흠, 흠…. 여종업원들이 많긴 한데, 술이 맛있으니까.”

생각보다 격렬하게 반응해서 내가 눈치라도 채는 게 아닐까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는 그레이스와 나란히 거리를 걷는다. 해가 어둑하게 진 모험가의 거리는 엄청나게 시끌벅적해서 한세아가 몰래 따라오기에 좋은 상황.

물론 숙소 복도에서부터 들켰으니 인파 사이로 몰래 따라온다 해도 알 수 있지만, 한세아와 그레이스가 생각하기에는 잘 숨어 있다고 생각하겠지.

벌써 취했는지 어깨동무를 한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취객들, 한탕 거나하게 해 먹었는지 입꼬리가 귀에 걸려서 내려오질 않는 용병들, 낡고 지저분해진 무구를 걸친 채 지친 발걸음으로 숙소를 향해 가는 모험가들.

 “여전히 사람이 많네, 여기는.”

 “그만큼 탑이 모험가를 풍족하게 해 주는 거지. 여신님께는 좀 불경하게 들렸으려나.”

 “부정하기엔 우리가 좀 많이 벌긴 했지. 적응을 위해 몇 번 전투하고 곧바로 내려왔는데도 두둑한 은화 주머니를 만질 수 있게 되다니.”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디메리트가 있지만, 주변에 도시가 세워질 정도로 풍족한 마석을 공급하는 탑. 그 덕에 오늘도 운수 좋은 놈팽이 여관에는 여급들의 시선을 끌기 위한 사내놈들의 허세가 가득하다.

우스운 점은 거리부터 이런 창녀가 제공되는 여관까지 발정이 난 남자들은 많아도 치안은 유지된다는 점. 아니었으면 홀로 거리를 걸어 뒤따라오는 한세아부터 거리의 불량배들에게 붙들려 실랑이를 벌였을 것이다.

치안이 유지되는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모험가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어서 오세요, 운수 좋은 놈팽이들에! 두 분이신가요?”

 “우리 둘 다 식사만, 숙소는 필요 없어.”

 “어머, 두 분… 데이트? 그건 좀 아쉽네요.”

활기찬 인사와 함께 자연스럽게 추파를 던지는 여종업원. 그래도 남녀 쌍으로 온 손님에게 더 찝쩍거릴 생각은 없는지 자연스럽게 주문을 받고 사라진다.

테이블에서 뒤돌아 주방으로 향하며 과장되게 골반을 씰룩쌜룩 흔드는 모양새. 치맛자락이 흔들리고 풍만한 골반이 파도처럼 요동치자 근처 테이블의 모험가들이 휘파람까지 불며 치맛자락에 구멍이라도 뚫어버릴 기세로 노려본다.

그 짧은 치마에 뺨을 붉힌 소년도, 술김에 종업원 허리를 휘감으려다 꼬집히는 청년도, 거하게 벌었는지 두 여급에게 부축을 받아 위쪽의 숙소로 올라가는 건장한 아저씨도 전부 모험가.

 “아니, 혼자서 마시겠다니까?”

 “…뭐야, 싸움이야?”

그리고 모험가들은 아주 사소한 명성이라도 눈에 불을 켜며 달려드는 족속이다.

 “저거, 한나 같은데.”

 “다, 닮은 사람 아닐까?”

 “……그래, 뭐. 내가 나서지 않아도 해결될 테니까.”

예를 들자면, 혼자 테이블을 차지한 검은 머리 이국적인 미녀에게 추근거리는 불량배들이 있다면―

 “그쪽 아가씨가 혼자서 마시고 싶다잖냐!”

 “이봐, 술맛 떨어지게 뭐 하는 짓이야?”

알량한 정의감과 다분히 타산적인 의도로 순식간에 십수 명이 흑기사를 자처하는 장소.

이것이 거리의 치안 유지 비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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