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6화 (106/175)

이끼늑대와 투구사슴은 내가 막아주거나, 흘려보내도 케이든이 막아 세울 수 있다. 하지만 서른 마리가 넘는 고블린은 내가 아무리 막아줘도 우리를 포위하는 게 당연한 머릿수. 눈먼 돌팔매나 독침 따위를 막기 위해 쉴드와 보호막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신성력을 방패에 두른 내가 마치 장벽처럼 공터의 한 방향을 막아주고, 다른 방향에서 케이든이 숨 가쁘게 칼을 휘둘러도 상대의 수는 서른 이상.

마법과 화살이 돌멩이와 교차하여 허공을 가르고 퉁퉁- 보호막 두드리는 소리가 동굴의 고요함을 깨트린다. 물론 고블린이 아무리 많다 해서 우리 일행이 다치는 일 따위는 없었다. 다만 평소보다 체력과 마력을 과도하게 소모한 게 느껴질 뿐.

 “마석은 내가 챙길 테니 다들 숨 좀 고르고 있어. 고블린 상대로 너무 긴장한 거, 스스로도 느껴지지?”

 “발치가 불안정하니 검을 휘두르는 게 체력을 생각보다 많이 소모하는군요.”

난전 속에서 고블린에게 몇 번 걷어차이고 밟혀도 흠집 하나 나지 않은 횃불형 마도구를 챙겨 들어 고블린의 마석을 줍고 있으니, 케이든이 가장 먼저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뒤를 따라 자기반성의 시간을 가지듯 한 마디씩 덧붙이는 일행들.

 “라이트 마법을 끄니까 마법을 조준하기 힘들더라. 그거 때문에 평소보다 마력을 많이 소모했어.”

 “그러게. 한나가 라이트 마법을 유지해 줄 땐 몰랐는데, 저 마도구 하나에 의지해서 활을 쏘니 급소를 정확히 맞출 수가 없더라. 덕분에 화살촉이 좀 망가진 것 같아.”

 “롤랑 님이 구매해 온 마도구가 아니라 일반적인 횃불이었다면, 전투 중 꺼지게 돼서 더욱 어두웠겠죠?”

통로에서의 전투가 아닌 동굴의 넓은 공동에서 일어난 첫 번째 난전임에도 실수도 없고, 문제점도 척척 알아차린다. 역시 별 값을 하는 동료들과 게이머로서의 소질이 뛰어난 한세아답다고 해야 할까.

평소보다 많은 체력, 마력 소모를 제외한다면 평균점 이상을 받을 수 있는 양호한 전투에 일행들의 분위기가 조금 부드럽게 풀린다.

-아니 머 어둠 속에서 뭔가 슉슈슛슉 하고 끝남

-이거 카메라 감마값조절 안됨?

-눈부신 활약을 해달라니까 눈감고 활약해버리네

-엄마여기너무어두워서숨을쉴수가없는데눈나랑마망이랑보이지도않고방장은나를유기했고

-어둠의 자식들도 여기보단 밝은데서 살겠다 불좀켜 제발

불만을 가진 것은 전투를 제대로 즐기지 못한 시청자들뿐.

광원이라곤 내가 들고 다니는 횃불형 마도구 밖에 없는 상황인데, 생소한 환경에 조금 긴장한 한세아가 카메라 컨트롤도 오토로 돌려놓고 이리저리 고생한 상황이다. 시청자들이 뭘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는 상황.

거기에 조명이 어둡다 보니 일행들의 얼굴도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중요한 불만 거리 중 하나인 것 같다. 역시나 여캐에 미친 인간들답다고 해야 하나?

 “아 뭐야, 나의 뛰어난 활약을 하나도 보지 못한 거야? 하 진짜, 전투 보는 눈이 이렇게 없어서야 20층 오크 신전은 어떻게 뚫고 21층까지 올라오려고. 조금 어둡다고 그렇게 말하면, 어? 21층에 와서 바로 고블린 밥 되는 거야.”

그 와중에 시청자에게 열심히 입딜을 때려 박는 한세아의 중얼거림이 들려온다. 참, 예쁜 척만 해도 시청자들이 우르르 붙을 텐데 저렇게 투닥투닥 싸우는 것도 재능이 아닐까?

바닥을 나뒹구는 고블린의 마석을 챙겨 한세아에게 향했다. 층이 오를수록 점점 선명해지는 푸른색의 마석이 한 아름. 거기에 동굴에서 채집할 수 있는 희귀 이끼나 버섯 따위도 돈이 될 테지만 우리 일행들이 거기까지 신경 쓸 수 있어 보이진 않는다.

뭐, 아직 동굴에서의 첫날이니 조금씩 익숙해지면 되겠지. 숨을 고르고 장비를 정비한 뒤 인벤토리에 마석을 가득 채워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저기, 종유석 옆에 있는 시커먼 게 혹시 흡혈박쥐야?”

 “눈이 좋네. 저놈들은 박쥐인 주제에 맹금류처럼 날아들어서 얼굴과 목을 할퀴려 드니 여차하면 자세를 숙여서 피해야 해.”

-내가 생각하던 박쥐가 아닌데용

-박쥐가 아니라 배트맨이 웅크려있어도 저 크기는 안나오겠다

-동굴은 존나 좁은 필드인데 몹은 왜이리크냐

-그래도 거미보단 낫... 나은가?

-저 근육질이 박쥐가 맞음? 흡혈박쥐뮤턴트아님?

동굴거미로 시작해 공터의 고블린을 만난 뒤 세 번째로 만나게 된 몬스터는 날개를 쫙 펼치면 2m가 훌쩍 넘는 흡혈박쥐. 박쥐라 해서 얇은 날개 피막과 연약한 몸뚱이를 지닌 건 아니었다.

몬스터라는 명칭답게 힘차게 펄럭이면 화살도 튕겨내는 날개 피막과 휘둘러 할퀴면 사람 혈관 정도는 끊어낼 수 있는 뾰족하고 커다란 발톱, 전력으로 날아와 몸통박치기를 하면 마법사나 사제 정도는 나뒹굴게 할 수 있는 근육질의 몸까지.

생김새만 놓고 보면 흡혈박쥐가 아니라 무슨 뱀파이어의 하수인이 아닌가 싶은 외형이다. 탑 밖에서 찾으려면 어디 던전 같이 흉악한 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녀석이니까.

 “아, 씨! 화살이!”

 “라이트 마법 대신, 공격 마법을 쓸게!”

머리 위로 뛰어내리는 것 말고 할 줄 아는 게 없는 동굴거미와 달리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집요하게 사람의 목덜미를 노리는 녀석들. 최소한의 지능은 있는지 갑옷으로 보호받는 내 목덜미를 노리는 게 아니라, 뽀얀 피부가 노출된 다른 일행들을 노린다.

흡혈박쥐인 만큼 공격을 했을 때 출혈을 유도할 수 있는지 아닌지를 본능적으로 아는 모습이다. 거기에 목만 노리는 꼴이 진짜 뱀파이어랑 관계가 있나 싶을 정도. 그 덕에 아이린이 성법을 펼치고 케이든이 숨 가쁘게 검을 휘두른다.

책갈피로 말벌을 후려치듯 방패로 날아드는 흡혈박쥐 세 마리 정도를 후려쳐 죽였지만, 이놈들도 기본적으로 대여섯 마리씩 뭉쳐 다니니까 동굴 통로를 가득 채울 수준.

 “이놈들, 자기들끼리 얽힐 때가 있습니다!”

 “날개가 몸통보다 질긴가 봐! 날개에는 화살이 안 박혀!”

그레이스가 발사한 화살이 날개에 맞고 튕겨 나가 부러지거나, 좁은 공간에서 위를 향해 검술을 펼치던 케이든이 비틀거리는 일이 있었지만, 아이린 덕에 다친 사람은 없었다.

화살을 튕겨낼 정도로 튼튼한 날개 피막이라 해도 마나를 다루는 검사의 검을 무한히 버텨낼 순 없기에 하나둘 바닥에 떨어져 마석으로 변하는 흡혈박쥐들. 그렇게 동굴에서 등장하는 네 종류의 몬스터 중 가장 강한 흡혈박쥐를 몸소 체험하자 일행들의 이마에 구슬땀이 또르르 흐른다.

 “와 씨, 이게 박쥐가 맞나? 날개는 튼튼해서 화살을 튕겨내더니, 몸뚱이도 터프해서 스파크로 지지는 건 그냥 무시하고 날아다니네. 여기서는 무조건 공격 마법을 써야 데미지가 들어갈 것 같은데?”

-세아야 그냥 짐꾼하자… 인벤토리에 미니맵에 라이트 마법이면 세최짐 가능해

-용사(롤랑) 성녀(아이린) 짐꾼(한세아) 파티 뚝딱이네

-그러면 한세아가 롤랑을 NTR하는거임? 퍄퍄 껄렸다

-1층에서 쓰던 매직미사일 슬슬 버려라 보스를 두번 잡았는디

-수상할 정도로 혼잣말을 많이하는 짐꾼

한세아의 마력이 과소비된 가장 큰 이유는 마법의 등급 문제. 아이린의 보호막 속에서 빙결 CC 셔틀을 하겠다는 말과 별개로, 마탑에서 새 마법을 배워오지 않았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마법의 공격력이 아무리 높다 해도 탑 1층에서 배우는 기본 공격 스킬로 21층까지 우려먹으려 하는 건 불가능한 게 당연하지. 어디 소설의 주인공도 아니고 매직 미사일 마스터가 되어 수천수만 개의 매직 미사일을 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시간이 늦었으니 슬슬 되돌아갈 준비를 하자. 한나, 길을 기억할 수 있다고 했지?”

 “응, 가능해.”

그렇게 21층의 첫 전투를 무사히 치르고 우리는 탑 밖으로 향했다.

풀어야 할 숙제를 하나씩 챙긴 채.

20층까지는 별의 힘으로 대충 밀어붙였다지만, 21층에 올라서자 슬슬 문제점이 하나둘 발견되기 시작한다.

먼저 그레이스의 문제는 사격의 정확도. 초원에서도 숲에서도, 그리고 31층에서 시작되는 늪지에서라면 모를까 어둑한 동굴에서는 정확도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특히 흡혈박쥐가 그 커다란 날개를 퍼덕거리며 조명 위를 날아다니면 눈이 쉽게 피로해지니까 궁술이 아닌 탐지가 메인인 그녀로서는 힘들 수 밖에 없지.

케이든의 문제는 그녀의 검술이 아무래도 대인 검술에 치우쳐져 있다는 점일까. 아무래도 케이티 웰즐리로서 북부 기사의 검을 배운 것 같은데 이게 동굴에서 기어 다니고 날아다니는 몬스터 상대로는 응용하기 쉽지 않은 듯하다.

마지막으로 한세아의 문제점은 기본 스킬로 인한 낮은 공격력. 튜토리얼 때 배운 스킬로 시나리오 세 번째 보스까지 잡으려 하는 건 욕심보 그득한 플레이긴 하지. 이건 20층 보상을 받으면 새 마법을 배워 곧바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이린이야 뭐… 파티의 사제는 전투 인원이라기보다는 상처를 치유하고 죽음을 방지하는 보험 역할이기 때문에 문제점이 없다고 봐야겠지. 그녀의 보호막이 뚫리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 1인분, 아니 한 3인분은 되는 것 아닌가.

 “하, 이번에 스킬 포인트 받으면 일단 마법부터 배워야겠다. 근데 매직 미사일이 이끼늑대 머리통도 깨부수던데 어떻게 박쥐 날개를 못 꺾냐…. 역시 게임의 몬스터는 형상이나 이름보다 레벨이 깡패인가?”

-단풍잎세상에서 고대의 악마 발록보다 뒷골목 비둘기가 강한거 모름?

-첫 스킬로 20층을 우려먹었으면 좀 바꿔라

-10층 보상으로 받은 스킬포인트 아끼다 똥되기 직전이쥬?

-미니맵은 악착같이 밝히면서 마법은 귀찮아서 안배우네

-다음 마법이 매직 스피어는 아니죠 선생님?

그리 생각하며 침대에 누워 한세아의 방송을 보니 그녀도 매직 미사일의 한계를 느꼈는지 스킬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21층에서 통할 마법이라… 간만에 짠해좌로 글을 쓸 때가 되었나.

짠해좌로서 어떤 마법을 추천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면서 나 또한 나의 신성력에 대한 생각을 같이 이어나갔다. 마력과 신성력, 두 기운은 내 몸속에 공존하지만 뒤섞이지는 않았으며 사용을 해 보니 약간의 차이를 알아낼 수 있었으니까.

마력을 사용한 방패의 강화는 아주 강력하고 단단한 철벽이라는 느낌이었다. 휘어지지도 구부러지지도 않고 충격이 온다면 꿋꿋하게 막아 세우는 강철의 장벽.

하지만 신성력을 사용한 방패의 강화는… 방탄유리? 강화 플라스틱? 아는 게 적으니 비유를 하기도 힘드네. 아무튼, 마력 강화와 달리 신성력 강화는 품어내고 흡수해서 흘려내는 느낌이 더욱 강하다.

 ‘반사딜 강화 버전과 받피감 강화 버전이라 해야 하나?’

느낌만 놓고 봤을 때, 모든 걸 게임식으로 생각하자면 그렇다. 롤랑의 패시브 스킬은 받는 피해의 감소와 받는 피해의 반사 두 가지가 있는데 신성력과 마력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 극대화한다는 느낌.

스킬창이 제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스킬로 두 가지 기능을 사용하는 것, 이 또한 히로인즈 크로니클에 있는 방식의 스킬 운용이었다. 나오기만 하면 무조건 사기 캐릭터로 나오는 폼 체인지형 캐릭터들.

협곡에 사는 미래의 수호자나 거미 여왕처럼 궁극기를 통해 형상을 바꾸면 스킬도 바뀌는 캐릭터들이 히로인즈 크로니클에도 있었다.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한 딜러 캐릭터인데 후방이 공격받으면 유니콘으로 변해 후방을 틀어막는 탱커로 변한다던가, 헐벗은 누님 모습의 힐러 캐릭터인데 죽음의 위기에 처하면 곰으로 변해서 사람을 찢는다던가.

태생 6★에 신캐 아니랄까 봐 롤랑의 육체 또한 그런 양심이 없는―

 “…롤랑,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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