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화 (105/175)

10층에서 20층으로, 다시 20층에서 21층으로.

 ‘생각해보니 아직 게이트 안 지었지. 신성력을 핑계로 하루 정도 쉴 걸 그랬나.’

마탑과 기사단의 자존심 싸움이 끝났을 뿐이지 게이트 제작까지는 며칠 남았나 보다. 보상 이야기가 나온다면 그대로 게이트 이용권을 받아야지.

한참을 걸어 올라가 21층의 게이트에 진입하니 숲의 상쾌한 공기 대신 눅눅하고 퀴퀴한 공기가 코끝을 찌른다. 언제 맡아도 탑을 오르는 게 아니꼽게 만드는 21층의 공기. 그 낯선 감각에 뒤따라오던 그레이스가 슬그머니 내게 달라붙는다.

다른 인원들이 아직 게이트를 넘기 전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넓은 숲과 산을 뛰놀던 사냥꾼으로서 콱 막힌 동굴이 불안해서 그런지 마치 겁먹은 아이처럼 착 달라붙는 그녀.

 “생각보다는, 넓네?”

 “걷기엔 충분한 넓이고, 싸우기엔 불편한 넓이지. 그리고 통로의 넓이도 들쭉날쭉하니 조심해야 해.”

내 팔뚝 옆으로 슬쩍 고개를 내밀어 저 앞을 바라보지만, 아직 한세아가 건너와 라이트 마법을 사용하지 않은 이상, 시야는 10m가 채 되지 않을 것이다.

일행들도 하나둘 게이트를 넘어와 동굴을 두리번거리며 살핀다. 사람 하나가 걷기엔 넉넉하지만 둘이 나란히 걸으면 어깨가 부딪칠 수밖에 없는 동굴 통로. 당연한 이야기지만 텐트를 펼칠 수 있는 공간은 전혀 아니다.

 “보다시피 바닥은 울퉁불퉁하고, 통로의 너비도 불규칙해. 텐트를 펼칠 수 있는 공간이 전혀 없으니 그 부분도 생각해야 하고.”

 “이런 곳에도 안전지대가 있어?”

 “엄청나게 넓은 공동이 있어. 하지만 숲처럼 오솔길이 나 있는 게 아니다 보니 길잡이가 길을 외워야 해.”

내 말에 아직도 착 달라붙어 있던 그레이스가 침을 꼴깍 삼키는 게 느껴진다. 동굴이라는 낯선 공간에 불안함을 느끼는데, 미로처럼 길까지 외워야 하니 조금은 부담이 되는 모양.

물론 그레이스에게 부담을 주기 위해 꺼낸 말이 아니라, 한세아가 거짓말을 하도록 꺼낸 이야기긴 하다.

 “음… 롤랑? 그런 거라면 내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 오베르뉴 숲에서 했던 것처럼 한 번 가본 길은 마력으로 길을 기억할 수 있거든.”

 “그래? 그렇다면 그레이스가 길을 탐색하고, 한나가 그 마력으로 마킹을 하면 되겠네.”

인벤토리는 마법이라고 주장하더니, 미니맵은 마력 쐐기를 사용하는 잡기술이라는 컨셉을 잡은 걸까. 그래도 컨셉 하나는 확실히 정하니 맞장구를 치기는 편하네.

한세아의 미니맵 덕분에 통로에서 안전지대까지, 안전지대에서 다른 통로까지 길을 전부 외울 필요가 없어진 그레이스의 표정이 한층 누그러진다. 동굴 벽에 표식 같은 걸 남겨도 되니까 그렇게 부담가질 필요는 없었을 텐데.

 “말했다시피 21층부터 등장하는 동굴거미와 흡혈박쥐는 벽을 타거나 날아다니기 때문에 그 점을 주의해서 이동해야 해. 아직 20층의 게이트도 지어지지 않았고, 동굴이라는 장소도 생소할 테니 오늘은 가볍게 주변을 돌아보도록 하자.”

 “…그러면 롤랑이 제일 앞에 서고 그레이스 언니, 아이린 언니, 나, 케이든 순서대로 가면 될 것 같아.”

이야기하고 슬쩍 한세아에게 시선을 보내니 눈치 좋게 파티의 리더로서 진형을 정립하는 그녀. 일행들도 딱히 군말 없이 좁은 통로에서 슬금슬금 움직여 한세아의 말대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신성력도 얻었겠다 정말 방어에 전념할 생각으로 슬쩍 구매해 온 횃불형 마도구를 꺼내 들자 톡톡, 등 뒤에서 갑옷을 두드리는 그레이스.

 “그건 뭐야, 롤랑?”

 “횃불형 마도구야. 횃불보다 조금 어둡지만, 불꽃이 일렁이거나 하는 일이 없어서 훨씬 편리하거든.”

말이 마도구지, 생긴 건 공사장 아저씨들이 휘두르는 봉처럼 생겼다. 전투에 사용하기에는 애매한 수준의 밝기지만 길을 걸을 땐 도움이 되는 수준. 물론 그렇게 생긴 만큼 이점은 있었다.

값비싼 마도구인 주제에 광량이 약한 대신 엄청나게 튼튼하게 만들어졌거든. 전투가 시작되면 야광 팔찌나 조명탄 같은 느낌으로 적당히 바닥에 던져두면 될 정도로. 그렇게 햇빛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미약한 불빛을 따라 우리는 동굴로 발을 내디뎠다.

 “확실히, 시야가 제한되네… 기척 감지에 방해가 되는 건 아니지만.”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야. 동굴을 지나면 늪지인데, 정글에 가까울 정도로 울창한 곳도 있거든.”

등 뒤에서 작게 중얼거리는 그레이스의 말에 대꾸를 해 주었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불편해지는 탑의 구조인지라 41층이 걱정되거든. 구불구불하고 좁은 동굴 다음에는 걷기도 힘든 늪지인데, 그다음은 얼마나 불편한 장소가 나올까. 게임적으로 생각하자면 사막이나 설원 같은 게 나올 것 같은데.

그렇게 고요한 동굴 속을 걸어가고 있으니 등 뒤에서 그레이스가 잠시 멈춰보라며 자그맣게 속삭여 일행들의 발걸음을 멈춰 세운다.

 “뭐라도 발견했어요, 언니?”

 “갈림길인데 오른쪽에서 몬스터의 기척이 느껴져. 고블린이나 코볼트는 아닌 것 같고… 거미인가? 움직이는 소리가 되게 독특하네.”

 “흡혈박쥐라면 미동도 하지 않고 천장에 매달려 숨어 있을 테니, 움직이는 기척이라면 동굴거미가 맞을 거야.”

내 말에 침을 꼴깍 삼키면서 전투태세에 들어가는 일행들. 하나하나의 실력과 스펙을 본다면 고작 21층에서 긴장을 할 수준이 아니지만, 동굴이라는 생소한 장소는 심리적인 부담을 주기 충분한 것 같았다.

일단, 갈림길 너머가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우니까. 시야가 확보되지 않은 어둠 속에서 꾸물꾸물 움직이고 있는 몬스터. 야간 전투에 익숙한 베테랑이 아니라면 긴장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래도 긴장은 하되 겁은 먹지 않고 자연스럽게 동굴거미의 기척이 느껴지는 오른쪽으로 향하려 드는 일행들. 나 또한 발을 맞춰 방패와 횃불형 마도구를 높게 들어 올린 채 오른쪽 갈림길로 향했다.

 “한나, 라이트.”

 “알겠어.”

-방송인 한세아의 눈부신 활약(마도구보다 밝음 ㅎ)

-으 시발 하필 거미네 차라리 고블린 팬티를 보고말지

-눈알이 없어서 다행인건가 눈알이 없어서 더 징그러운건가

-털이랑 눈알없으면 그나마 낳지않음?

-걍 다리부터 징그러운데 입으로 알낳는소리 하지 마셈

한세아의 중얼거림과 함께 동그란 빛의 구체가 지팡이 위로 두둥실 떠 올라 일행들의 머리 위에 자리를 잡는다. 그 덕에 동굴의 벽과 천장에 매달린 동굴거미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우리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천장과 벽을 타며 우리 쪽으로 접근하는 1m 남짓한 크기의 커다란 거미. 털도 눈도 없이 매끈하면서도 허여멀건 둥근 대가리와 조금 길쭉한 몸통이 특징인 몬스터다.

 “딱 봐도 알겠지만 얇은 다리가 약점이고, 의외로 무는 힘이 이끼늑대보다 강하다. 집게 턱에 물리면 주둥이 안에서 혀 대신 독침이 튀어나오니 붙잡히지만 않으면 쉬운 상대야.”

알아차리지 못하고 접근을 허용한다면 머리 위에서 목덜미를 노리고 뛰어내리지만, 4★ 궁수가 파티에 있는 이상 고작 일반 몬스터에게 선공권을 내어 줄 리 없겠지. 사실 4★ 궁수고 뭐고 횃불만 있으면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을 테고.

1m짜리 거미가 벽을 기어와 머리 위까지 왔는데 눈치를 못 챌 수준이라면 탑의 20층에서 오크 사냥꾼한테 죽었겠지.

내 설명이 끝나자마자 쉐엑- 하고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나더니 거미들을 향해 화살이 날아간다. 다리가 약점이라지만 화살로 노리긴 애매하다고 판단했는지 집게 턱을 부수고 주둥이에 정확히 박히는 그레이스의 화살.

 “동굴거미도 흡혈박쥐도 그렇고, 화살을 좀 많이 쓰게 생겼네.”

 “그야 그렇지. 동굴에서는 그레이스가 고생 좀 해야 할 거야.”

후열의 호위를 담당하는 케이든에게 동굴의 벽을 박차고 뛰어올라 거미를 베라고 할 순 없지 않나. 아무리 판타지 세상이라지만 여기가 무슨 거인이 진격하는 동네도 아니고 3D 입체기동 전투를 벌이는 일은 없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몬스터가 접근하기 전에 화살로 요격하는 그레이스의 손이 바빠질 수밖에. 그녀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몰려오면 시야가 제한되더라도 한세아가 라이트 마법 대신 공격 마법을 사용하면 되는 거고.

-이 집 조명 잘하네 역시 방송인이랄까?

-아이린 마망이랑 같이 방어 전담 드립치더니 조명 전담으로 퇴화해버렸음

-파티의 유일한 마법사인데 활약이 없는걸보면 짠해

-인벤토리에 미니맵과 라이트 마법… 혹시 용사파티의 짐꾼같은거 코스프레함?

-CC셔틀 한다더니 태양권 연습중이신가여

그레이스가 팽팽히 당긴 활시위를 놓을 때마다 바람을 가르고 박혀 들어가는 화살들. 거미 주제에 생각보다 몸놀림이 재빠른지라 백발백중으로 아가리에 전부 박히는 건 아니지만 머리통에서 빗나가는 화살은 없었다.

방패를 들고 막아선 나, 그 뒤에서 엄호를 받으며 화살을 연사하는 그레이스.

우리 두 사람만으로 여덟 마리의 거미가 말끔히 정리되자 시청자들의 놀림이 거세어진다. 어차피 나중에 넓은 공동이 나온다면 한세아도 열심히 마법을 써야겠지만… 그건 일행들도 시청자들도 모르는 이야기.

 “동굴거미가 생각보다 많이 몰려다니네?”

 “탑을 더 높이 올랐기 때문에 수가 많아졌다고 봐도 좋아.”

 “그렇다는 건, 고블린과 코볼트도…?”

 “맞아, 엄청나게 몰려다니지.”

그레이스의 중얼거림에 한세아가 작은 목소리로 질문을 던진다. 이끼늑대나 투구사슴은 한 마리씩 돌아다녔는데, 동굴거미는 시작부터 여덟 마리씩 뭉쳐 있으니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동굴거미보다 빠른 흡혈박쥐가 십수 마리씩 날아들면 그레이스의 화살만으로 처리할 수 없겠지. 아니면 공동에서 서른 마리가 넘는 고블린, 코볼트의 무리를 만난다든가. 한 층계를 올랐을 뿐인데 머릿수가 두 배 이상 불어났으니 한세아도 질릴 때까지 마법을 쏠 수 있을 것이다.

 “아이 씨. 눈부시다 눈부시다 하지 마라. 진짜, 카메라 드론이랑 라이트 마법이랑 겹쳐두기 전에. 나도 웃었다고? 맞아, 저거 때문에 피식 웃은 게 자존심 상하거든? 그러니까 억까 자제하고 충신 모드로 좀 돌아서란 말이야.”

지금이야 파티의 마법사가 아니라 파티의 짐꾼이냐고 놀림을 받을 뿐이지만.

20층과 21층은 필드가 다른 만큼 전투의 난이도가 고작 한층 어려워진 수준이 아니다.

단독으로 덤벼들던 오크 사냥꾼, 이끼늑대, 투구사슴과 달리 기본적으로 5마리 넘게 무리를 짓는 동굴거미와 흡혈박쥐들. 거기에 고블린과 코볼트 또한 열댓 마리에서 서른 마리 가까운 머릿수를 자랑한다.

햇빛이 없어 횃불과 마도구, 마법으로 광원을 유지해야 하는 불편한 상황 속에서 몇 배는 많은 적을 상대하는 상황. 거기에 바닥도 울퉁불퉁하니 피로도가 쌓이는 속도 또한 빠르다.

 “후우…, 이쯤 되면 고블린도 귀찮은 적이 되는군요.”

 “생각보다 오래 성법을 유지해야 했네요. 적을 너무 얕잡아 본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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