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4화 (104/175)

그런데 이게 왜 신전에서 열려.

기도를 위해 눈을 감았음에도 불구하고 시야가 선명하게 확보된다. 가장 또렷하게 보이는 것은 새하얀 천을 두르고 있는 아름다운 여성. 새하얀 피부에 황금색 폭포처럼 매끄러운 긴 생머리, 히어로즈 크로니클 갤러리에서 질리도록 본 여신님이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볼 법한 팔뚝과 가슴골이 드러난 하늘하늘한 복장 때문인지 온갖 뻘글에도 여신 사진이 첨부되어 올라왔으니 못 알아보기도 힘들지.

문제가 있다면 그 여신이 하는 행동이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데?’

신전처럼 보이는 넓은 공간에서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양손을 모으고 있는 여신의 모습. 그 모습은 아무리 봐도 여신이 누군가에게 기도를 올리는 것처럼 보인다.

기독교와 천주교 등 유일신 신앙을 모티브 삼아 만들어진 것이 히어로즈 크로니클의 종교다. 여신이 이 세상의 창조주며 오크 따위의 몬스터 또한 전지전능한 여신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세상. 그런 세상에서 여신이 누군가에게 기도를 올리고 있다니, 이게 무슨 뜻일까.

성경에서 하느님이 태초에 빛이 있으라고 말한 게 아니라 우주님에게 기도를 올렸다고 주장하면 무슨 생각이 들겠냐고.

 “…님? 롤랑 님?”

 “아, 어?!”

톡톡, 어깨를 걱정스럽게 두드리는 손길에 정신을 차려보니 신전의 홀과 여신상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곁에서 조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아이린. 눈을 떠도 여신상이 보이고, 눈을 감아도 여신의 자태가 보이니 순간적으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지럽거나 피곤하세요? 생각보다 오래 눈을 감고 계셨는데, 일어나지를 않으셔서….”

 “아냐, 생각할 게 있어서.”

다들 상급 모험가쯤 되는 초인이 고작 이틀간의 마차 여행으로 아플 리 없다는 걸 알기에 날아드는 시선에는 걱정보다는 호기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허나 어지러운 머리로는 적당한 변명도 떠오르지 않기에 대충 지어낼 뿐.

퀘스트 완료 보상으로 정보의 파편을 얻었는데, 이게 자동 사용되더니 여신이 보인다고 주장할 순 없잖아.

정신병자로 몰리거나, 계시를 받은 성기사로 추앙받거나. 판타지 세상답게 신전이 정치와 엮여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둘 다 탑의 꼭대기로 향하는 여정에 그다지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정보의 파편을 확인했습니다]

[육체에 깃든 마나의 일부가 신성력으로 대체됩니다]

…이러면 도움이 되나?

 “무슨 일 없다면, 날이 늦었으니까 다들 해산하고 내일 아침에 길드에서 만나는 게 어떨까요.”

 “그게 좋겠어. 롤랑, 그러면 내일부터는 21층으로 가는 거야?”

 “아, 음… 그래. 21층에 가서 동굴에 익숙해질 때까지 어느 정도 수련을 하자.”

동굴이라는 말에 조금씩 긴장을 하는 일행들과 헤어져 숙소로 향했다. 신전에서 기도한다고 추가 이벤트가 없다며 아쉬워한 한세아가 그레이스와 함께 카메라를 몰고 사라졌고, 케이든 또한 내가 뭐라고 말을 걸까 걱정이라도 하는지 슬그머니 도망치듯 사라진 상황.

카메라도 없고 일행들도 없는 어둑한 저녁의 거리를 걷고 있으니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리면서도 따듯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의 마력이 육체를 차갑고 단단한 강철로 만들어주는 느낌이라면, 이 미약한 신성력은 마치 엔진 속에서 타오르는 연료처럼 뜨겁게 내 육체를 달구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느낌뿐이고 사용하는 방법은 잘 모르겠지만.

 ‘10년 동안 마력 수련을 해 왔는데 이제 와서 신성력이라니….’

현대에 살던 군필 복학생이 마력 운용법이니 단전 호흡 따위를 알 리 있나. 마력을 모으고 그걸로 육체와 무구를 강화하는 건 마치 운동을 해서 근육을 길들이듯 몸에 때려 박은 감각으로 운용하는 게 나의 전투 방식이다.

거기에 더해 1★ 메이드 마리도 눈치를 채는 조잡한 함정을 4★ 그레이스가 눈치채는 게 느린 것처럼, 게임 속 세상이라는 점에서 직업 간의 명확한 차이도 있는 상황. 내 머리로는 성질만 느껴봐도 비슷하지만 정반대인 기운을 얻자마자 운용법을 깨우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

몸으로 때운다.

 ‘밤새 수련하는 건 진짜 오랜만이네….’

마음 같아서는 침대에 누워 인터넷 창을 열어보고 싶지만, 신성력이 생겼는데 다뤄보지 않을 순 없지. 물론 다뤄본다 해서 이 야밤에 도시에서 누군가와 싸울 수도 없고, 혼자 탑에 뛰쳐들어가기도 모호하니 정말 다루기만 할 뿐이다.

엘리스도 퇴근하고 어둑하게 불이 꺼진 길드 건물로 향해 슬쩍 담을 넘어 공터로 들어간다. 오늘은 딱히 사용한 사람이 없는지 자질구레한 것 없이 텅 빈 길드의 공터.

공터 중앙에 자리를 잡고 방패를 들어 올리며 깊게 숨을 들이마신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마력과 신성력의 느낌이 전혀 다른지라 쉽게 느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나름 신적인 존재가 줘서 그런지 육체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는 점.

 ‘퀘스트 보상을 전부 모으면, 마력이 전부 신성력으로 변하나? 아니면 7★ 으로 등급이 올라가면?’

마력 대신 신성력을 움직여 육체를 강화하고, 방패를 강화해 본다. 어차피 성법 따위는 쓸 줄 모르는 몸, 마력이든 신성력이든 결국 육체를 강화하고 무구를 강화하는 데 쓸 뿐이니까.

마치 오른손잡이가 왼손으로 글씨를 쓰는 느낌으로 신성력을 최대한 끄집어내자 새하얀 빛이 어리는 방패. 효율이나 능력치까지는 감이 잘 안 잡히지만, 겉으로 보기엔 색 하나는 확실히 차이가 나네.

…설마 마력과 신성력의 차이가 색 차이만 있는 건 아니겠지?

[한세아 님의 방송이 시작되었습니다!]

[한세아_세계 최초 21층 행! 동굴 탐험의 시작?]

달이 가라앉을 때까지 방패를 휘두르며 이것저것 시도해보다 두어 시간 쪽잠을 잤더니 한세아의 방송 알림이 나를 깨운다.

 “21층부터 동굴이라니, 마법사로서 내가 활약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네.”

-네 다음 인간 횃불

-어차피 라이트 마법 유지하면 아무것도 못할 주제에

-마법사(라이트셔틀)의 활약(시야 확보)

-원래 와드 잘 박아야 게임을 이기는거야

-혼자 다른 게임 하는 샛기가 있는데?

밤새 흘린 땀을 씻어내고 길드로 향하니 벌써 테이블에 앉아 있는 일행들. 여신의 목소리를 들은 데다가 21층에 첫 진입을 하게 되니 설레는 마음으로 눈을 일찍 뜬 모양이다.

하기야 실존하는 여신의 계시를 받은 상황인데 흥분을 하지 않는 게 되려 사이코패스에 가깝겠지. 말없이 무뚝뚝한 용병 검사를 연기하는 케이티 웰즐리조차 뺨이 발갛게 상기된 걸 숨기지 못하고 있는데.

 “오늘은, 앞서 말한 대로 21층에 가 볼 거야. 초원이나 숲과는 전혀 다른 동굴형 계층이지.”

 “동굴이라면, 몬스터가 전혀 다른가?”

 “그건 아니야. 이끼늑대와 투구사슴 대신 동굴거미와 흡혈박쥐가 나타나지만, 코볼트와 고블린 들은 여전히 등장하거든.”

 “그것들은 뭐 어디에서나 나오네.”

 “바깥에서도 그러니까, 탑 안에서도 그렇게 따라 하는 거겠지.”

고블린과 코볼트는 일종의 바퀴벌레다. 먹이사슬의 밑바닥에서 쓰레기를 치우는 역할을 하며, 아무 곳에서나 적응해서 살아남거든. 숲바퀴 집바퀴가 따로 있는 것처럼. 그래도 고블린과 코볼트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당연하지만, 초원에서 나오는 놈보다 숲에서 나오는 놈이 강하고, 동굴에서 나오는 놈이 숲에서 나오는 놈보다 강하거든. 탑을 오를수록 적이 강해지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상식.

거기에 종유석이니 석순이니 하는 자질구레한 것들이 발걸음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점도 커다란 문제 중 하나다. 숲의 나무뿌리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귀찮은 데다 평지가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니까.

 “고블린과 코볼트는 보던 대로 무리를 지어 다니는 놈들이라 동굴이라는 지형만 조심한다면 걱정할 게 없어. 아래에서 나오는 놈들보다 힘이 강하긴 해도 고만고만한 수준이니까. 문제는 동굴거미와 흡혈박쥐지.”

 “…박쥐면 날아다니겠네?”

 “맞아. 동굴거미는 벽과 천장을 타고 입체적으로 돌아다니며, 흡혈박쥐는 대놓고 날아다니지. 네 발로 땅을 달리는 짐승형 몬스터와는 근본부터 다른 거야.”

한세아의 중얼거림에 고개를 끄덕이자 조금은 진중한 분위기가 되는 일행들. 10층 만월 늑대를 사냥하는 게 초급과 중급의 경계선이라면, 21층의 몬스터를 사냥하는 건 베테랑의 경계선이라고 할 수 있다.

벽을 타고 기어 다니는 거대한 동굴거미와 어둠 속에서 날아드는 흡혈박쥐가 상대라면 검 휘두르는 것은커녕 진형을 유지하는 것부터 아래층과 전혀 다르니까.

 “다행인 점은 우리 파티에 마법사가 있다는 거고, 그 덕에 횃불을 사용하느라 전위의 손이 묶일 걱정이 없다는 점이지.”

 “그러면 나는 계속 라이트 마법을 유지하고 있어야 해?”

 “아니, 마력이 무한한 건 아니니 횃불은 챙겨 갈 거야. 전투할 때 일행들을 위해 시야를 밝히는 게 네 역할인 거고.”

-진짜 손전등이었고 ㅋㅋㅋㅋㅋ

-매직 미사일만 배우고 다른 공격 마법은 배울 필요도 없을 듯?

-그냥 그레이스 눈나 화살 쏠 수 있도록 시야 잘 밝히라고

-마법사 한나님(X) 조명사 한세아님(O)

-왼손에 횃불 오른손에 라이트 마법 쌍수법사 하면 될듯 ㅎ

 “니들 그렇게 자꾸 까불면 전투할 때마다 카메라로 롤랑 뒤꽁무니만 따라다닐 줄 알아. 내 시점에서 1인칭으로 롤랑 등이랑 동굴 벽만 보고 싶어?”

그 외의 것은 동굴에 가서 직접 느끼는 편이 좋겠지. 공기가 습하고 답답해서 호흡하는 게 다르다든가, 어둠 속에서 걷다 보면 신경이 계속 쓰여서 더 빨리 지친다든가 하는 사소하지만 중요한 이야기들.

이런 건 몸으로 배우는 게 제일 빠른 법이다.

나처럼.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