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 동료도 2★따리들이라 밍밍이 실력으론 안되것다
하다못해 명백히 여캠으로 보이는 사람조차 자신이 받은 기부금을 화면 구석에 띄워둔 채, 시청자 오빠들에게 콧소리를 내며 애교를 부리고 있으니 말 다 했지. 싸구려 마법사 로브에 칼집을 내서 가슴골을 드러내고 옆트임을 내는 건 생각도 못 했는데.
방송 목록을 아래로, 아래로 내릴수록 온갖 사람들이 다 나온다. 자신의 전투 기록을 위해 시청자가 보든 말든 방송을 켜고 녹화를 하는 게이머, 몇 안 되는 시청자에게 온갖 말을 던지는 잼민이 방송인, 로브나 갑옷이 예쁘지 않다고 투덜대는 여캠 출신 게이머들까지.
히어로즈 크로니클 때문에 바깥에서는 온갖 일이 벌어지고 있구나. 그리 생각하며 인터넷 세상을 열심히 돌아다니자 어느새 창가에 햇볕이 드리운다.
[방송인 ‘한세아’의 메인 퀘스트 클리어를 돕자 1/1 ※ CLEAR]
[보상 : 출처를 알 수 없는 정보의 파편]
이게 뭔데, 씹덕아.
마차를 타고 도시로 돌아가던 중 눈앞에 갱신되는 홀로그램. 아무래도 마탑과 기사단의 기나긴 자존심 싸움이 끝을 맞이했는지 뒤늦게 20층의 퀘스트 보상이 내게 도착한다.
하지만 인터넷 접속권이나 VPN 따위와는 전혀 결이 다른 보상에 반가움보다는 당혹스러움이 느껴진다. 출처를 알 수 없다는 건 둘째 치고, 정보면 정보를 하나 줄 것이지 왜 파편을 주냐고 양아치 같은 새끼들아.
게시판 권한 따로, 사진 찍기 권한 따로라 DLC 팔이냐고 욕을 했는데 이제는 보상도 쪼개서 지급할 줄은 몰랐지.
“으아, 별로 떠나있지도 않았는데 왜 이리 오랜만에 돌아온 것 같지?”
“축복받은 숲에서의 경험이 너무 강렬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
“하긴…, 신성력의 세례라니 우리 마을은커녕 이 도시에서도 겪어본 사람이 없겠지?”
홀로그램을 노려보며 이게 대체 뭔지 고민하는 사이 자연스럽게 도착한 도시. 마차에서 내려 기지개를 쭈욱 켜는 일행들과 함께 길드로 향한다.
시간을 보면 숙소로 직행해도 될 정도지만 기사단의 이름값도 있는 데다가, 한세아도 퀘스트 완료창 덕분에 보상이 기다린다는 걸 알게 된 상태. 나와 한세아가 자연스럽게 길드로 향하자 나머지 일행들도 군말 없이 졸졸 따라온다.
“이야, 한나! 오베르뉴 숲은 어땠어?”
“네, 의뢰 완수하고 왔어요. 이런 개인 의뢰도 보고해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늦은 오후 자리를 지키고 있던 건 엘리스. 챙길 것도 챙겨줄 것도 많다 보니 길드에 오래 붙어 있어서 그런가? 어째 의뢰를 끝마치고 돌아올 때마다 있는 것 같네.
축복받은 숲에 모험가가 들어가는 일은 전례가 없었는지 엘리스도 꽤 흥분한 모양. 발갛게 달아오른 뺨으로 한세아에게 달라붙어 질문 공세를 퍼붓는 걸 보니 개인적인 호기심 때문에 우리를 기다린 것 같기도 하다.
“축복받은 숲 이야기 좀 해 줄래? 뭐 좀 봤어?”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장소였어요. 위험한 동물은 없고 다람쥐나 토끼 같은 게 막 다가오고, 나무는 빽빽한데 햇볕은 잘 들어와서 울창하면서도 밝은 데다, 잘 익은 나무 열매가 막 길가에 널려 있더라구요.”
“정말? 숲이라는 게, 사람한테 그렇게 친화적인 장소는 아닐 텐데.”
두 사람이 정겹게 떠들자 모험에서 복귀하는 모험가들의 시선이 쏠린다. 길드의 얼굴마담과 한창 유명세를 날리는 슈퍼 루키가 사이 좋게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관심이 쏠릴 수밖에.
주변의 시선이 모이든 말든 열심히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니 슬금슬금 주변 테이블에 사람들이 모여든다. 대다수가 평민 출신인 모험가들이니 엘리스처럼 축복받은 오베르뉴 숲의 이야기가 궁금할 수밖에 없긴 하겠지.
테이블에 앉아 활짝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두 미녀와, 아닌 척 이쪽을 향해 귀를 기울이는 다양한 모험가들.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으니 누군가 내 소매를 살짝 잡아끈다.
“…음? 무슨 일이야?”
“롤랑 님, 여신님의 목소리를 들은 김에 다 함께 신전에서 기도하는 건 어떨까요?”
“…나야 상관없긴 한데, 다른 일행들에게도 물어보는 게 어때?”
슬그머니 다가와서는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속닥거리는 아이린. 여신의 목소리를 듣고 신성력 세례를 받았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다는 듯 안 그래도 작은 목소리가 한껏 더 낮아졌다.
…생각해보니 아이린은 자신의 정체를 숨긴 예비 성녀였지. 불 속성 남장 가출 공녀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지만, 어찌 보면 파급력은 이쪽이 더 클지도 모른다. 예비 성녀가 축복받은 숲에서 여신의 세례를 받은 상황 아닌가.
‘어라, 파급력이고 나발이고 이게 훨씬 큰일 아닌가…?’
정체를 숨긴 가출 공녀 vs 여신의 목소리를 들은 예비 성녀.
단순하게 나열하기만 해도 어느 쪽이 더 커다란 사건인지 절절하게 와 닿지 않는가. 이런 중요한 걸 이제야 눈치를 채다니 너무 한세아의 방송에 푹 빠져 있었나. 채팅창에서 자꾸 불 속성이니 여신님의 신성력 주머니니 하며 떠들길래 생각조차 못 했네.
내 허락 아닌 허락을 받은 아이린이 그레이스와 케이든을 거쳐 수다를 끝낸 한세아에게 다가간다. 자그마한 몸집으로 소매를 톡톡 잡아끄는 뒷모습이 귀엽기 그지없다. 물론 입에서 나온 이야기의 파급력은 귀여움과 거리가 멀지만.
“신전이요…? 네, 좋아요!”
한세아 또한 아이린과 대화를 나누고 나서야 예비 성녀라는 타이틀이 떠올랐는지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진다. 무언가를 고민하는 것 같으면서도 헛바람이 잔뜩 들어간 표정이라고 해야 할까.
방송이 켜져 있는 상태였다면 얼굴만 가지고 시청자들이 삼십 분은 놀려 먹을 것 같은 기묘한 표정. 마차 여행이 지루하다는 이유로 방송을 종료한 게 신의 한 수가 되었네.
[한세아 님의 방송이 시작되었습니다!]
[한세아_돌아온 태초 도시! 예비 성녀님과 신전으로?]
-왜 이런 시간에 깜짝 방송임?
-아 먼데 엘리스눈나랑 이야기할때 켰어야지
-그르네 예비성녀? 우리마망 예비성녀였지
-그 여신님 ㅈㅈㅎㅈㄹ 드립 때문에 다들 까먹은듯
-솔직히 임팩트가 크긴 했음 창의력이 그런쪽으로 슈발 ㅋㅋㅋ
방송 각이라고 생각했는지 모험가 길드를 나와 신전으로 향하는 길에 은근슬쩍 방송을 켜버리는 한세아. 때아닌 방송에 물밀듯 밀려 들어오는 시청자들이 방송 제목을 읽고 우르르 채팅을 쏟아낸다.
하늘하늘한 천 조각을 걸친 여신의 모습에 다들 정신을 빼앗겼지만, 생각해보면 성녀와 여신이라는 정통적인 조합이 이루어진 상황이니까.
“다른 자매님들이 제 말을 믿어줄까요? 어릴 적, 소풍을 나갈 때보다 더욱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 같아요.”
“여신님의 축복을 받은 숲에서 일어난 일이잖아요? 다들 믿어 줄 거예요.”
잔뜩 신이 났는지 웬일로 앞장서는 아이린과 황급히 곁에 따라붙은 한세아. 걸음걸이도 가벼운 그 뒷모습을 보며 그레이스가 묘하게 미소짓는다. 그레이스는 아이린이 예비 성녀라는 걸 모르니 그냥 수녀님이 영적인 체험에 기뻐한다고 생각하려나.
신이 나서 재잘거리는 아이린과 열심히 맞장구치는 한세아, 그걸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레이스, 거기에 소란스러움 속에서 한 걸음 물러나 구경하는 케이든까지. 다 함께 들뜬 마음으로 신전으로 향하니 발걸음이 가볍기 짝이 없다.
“어머나, 아이린? 수도 쪽을 향해 의뢰를 떠난다고 들었는데….”
“좋은 일이 있어서 곧바로 해결하고 돌아온 거예요.”
“그러면, 뒤에 일행분들은 무슨 일로 방문하셨니?”
“여신상 앞에서 잠시 기도를 하려고요.”
신전으로 우르르 몰려오는 우리를 맞이하는 건 후덕한 인상의 수녀 아주머니. 아이들을 돌보다 나왔는지 한 손에 들린 딸랑이가 인상적이었다. 마음이 들뜬 아이린이 설명도 없이 갑작스레 일행들과 저녁 기도를 올린다니 조금 당황한 모양.
하기야 내가 알기로 성당은 사제와 수녀들이 머무는 공간, 아이들을 돌보는 공간, 손님들에게 개방되어 기도를 올리는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개방 시간도 따로 있는 거로 아는데.
기도하고 싶다고 아무 때나 성당에 쳐들어갈 수 없듯 이곳의 신전도 기도를 올리기 위해 개방되는 시간이 따로 있을 것이다. 예비 성녀인 만큼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아는 아이린이 막무가내로 우리 일행들과 함께 쳐들어오듯 왔으니 인상 좋은 수녀님이라도 당황할 수밖에.
“저기, 아이린…?”
“아, 그게…!”
곤란해하는 수녀님의 표정을 이제야 알아차렸는지 화들짝 놀라는 아이린. 손님용 기도 홀을 열어주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라지만 소심하고 말 잘 듣던 아이가 막무가내로 달려드니 조금 당황한 것 같다.
자기가 생각해도 조금 무례했다고 생각했는지 뺨을 붉히며 손사래를 치는 아이린의 모습에 푸근한 미소를 짓는 수녀 아주머니가 앞치마의 주머니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내 쥐여준다.
“그래, 네가 그러는 걸 보니 이유가 있겠지. 하지만 명심하렴, 신앙이라는 건 강요로 인해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야 한다는 것을.”
“아, 아니에요! 강제로 데려온 게….”
이쪽 세상에도 강제 전도 같은 게 있는지 얼굴이 토마토처럼 벌게지는 게 귀엽다. 수녀복으로 꽁꽁 싸매서 머리카락도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데 유일하게 드러난 얼굴이 발갛게 달아 올랐으니까 이불에 파묻혀서 얼굴만 내민 것 같기도 하고.
-이쪽 세상에도 ‘그 종교식’ 전도가 있나?
-신전에 이웃 주민을 데려오면 5 달란트…
-평일 저녁에 기도회를 열자며 친구를 데려온 목사집 딸내미 시발 ㅋㅋㅋ
-여기선 달란트로 마도구 바꿔주냐? ㅋㅋㅋㅋㅋ
-그지랄하면 이단심문관이 지하실 대걸레로 쓸듯
다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이며 쓱 사라지는 수녀 아주머니. 그 인자한 미소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아이린은 신성력의 세례니 여신님의 목소리니 하는 설명을 하는 것도 까먹은 듯하다.
말없이 조용히 우리를 안내하는 그녀를 뒤따라가 커다란 나무문을 열자 오랜만에 보이는 커다란 여신상.
처음 이 세상에 떨어졌을 땐, 신전에서 기도라도 하면 여신이 말을 걸어줄 줄 알고 신전에 꽤 자주 왔었는데. 물론 여신이 말을 거는 일도, 신성력을 받으며 진짜 성기사가 되는 일도 벌어진 적 없었다.
“여기서, 음, 그냥 기도를 올리면 돼요. 특별한 자세나 형식은 필요 없고 눈을 꼬옥 감은 채 여신님을 생각하시면 그게 기도예요.”
역시나 기독교와 천주교를 바탕으로 만든 종교라 그런지 참으로 익숙한 모습으로 양손을 마주잡고 두 눈을 지긋이 감는 아이린. 그녀의 머리 위에 떠 있는 반투명한 카메라 드론 덕분에 나 또한 손을 모으고 슬쩍 눈을 감았다.
[정보의 파편을 열람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