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화 (102/175)

┗바둑 따이고 그림쟁이 따이고 인간이 따일줄은

 ┗이미 인간레벨로 설정된 AI한테 똥타 프로게이머 다 따였음

┗진짜네 시발 히어로즈 뜨기 전부터 이미 따였구만

┗이새끼들 왜 가상현실게임이랑 AI랑 섞어서 말함?

 ┗가상현실속에 AI가 있어서?

물론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열심히 인터넷을 뒤지는 중이었다. AOS 게임에서 프로팀이 A.I. 5인조에 패배했다든가, SF영화에 나올 법한 젤리형 영양식이 시중에 유통되기 시작했다는 자질구레한 소식들.

그 밖에도 온갖 연예인들의 기사와 쓸모없는 기레기들의 활자조합물을 보고 있자면 적어도 내가 통 속의 뇌는 아닐 거라는 안도감이 슬쩍 들었기 때문이다.

바깥에서 접속한 한세아가 있고, 그녀와 소통하는 수만 명의 시청자가 있다. 동영상 사이트에는 내가 평생을 바쳐도 다 볼 수 없는 창작물들이 있고 인터넷 세상에 있을 다른 소설과 만화, 영화 따위를 더하면 그보다 더 많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가끔 치솟아 오르는 불안감과 의심을 지워버리고 있으니 마차가 부드럽게 멈추어 선다.

 “내리면, 잠시 이야기 좀 해요.”

그와 동시에 케이든이 아닌 케이티 웰즐리가 슬그머니 내게 말을 걸었다.

마차에서 내린 일행들이 그래도 두 번째 방문이라고 익숙하게 이 층으로 올라가 잠자리에 들 방을 정하고 있을 때, 슬그머니 내 소매를 잡아끈 케이티 웰즐리가 나를 건물 옆 수풀로 이끌어간다.

 “어디까지 들었나요, 롤랑 씨?”

평소와 다르게 부드러운 말투와 목소리. 눈을 감고 듣는다면 말을 건 게 케이든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정도다.

왕실에서 내린 마도구답게 코앞에서 뭔가 설정을 변경한 것 같은데 느껴지는 마력의 파동 따위가 하나도 없는 수준. 아무래도 민생 파악용이 아니라 왕의 혈통을 숨기는 용도일지도 모른다.

왕국이 위험에 처했다든가 암살자가 노릴 때 하인으로 변장해서 도망칠 수 있게 해 주는, 그런 용도 아닐까? 그런 귀하고 대단한 마도구로 남장 가출을 했다니 아서 웰즐리가 한숨을 쉬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아서 웰즐리의 딸, 케이티 웰즐리. 성인식 직후 가문의 금고를 구경하고 싶다며 들어가 마도구와 선조의 갑옷을 훔쳐 가출한 불효녀… 정도?”

 “크흠, 불효녀라뇨. 아버지께서 그리 말씀하셨나요?”

 “직접 말한 건 아니지만 얼굴에 근심 걱정이 가득한 채 한숨만 쉬는 꼴을 보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하아, 아버지도 참….”

무언가 못마땅하다는 듯 입을 비죽 내민 그녀가 제 머리카락을 스윽 쓸어올린다. 역시나 아무런 마력의 파장도 느껴지지 않지만 눈앞에서 외모가 서서히 변해가는 그녀. 갈색 곱슬머리의 미청년은 온데간데없고 눈앞에는 전형적인 북부 미녀가 한 명 서 있었다.

마치 북부의 얼음 폭포를 보는 것 같은 매끄러운 은색 머리카락이 길게 뻗어 내려가고, 평범하던 눈동자는 푸른 호수나 사파이어처럼 깨끗하고 아름답게 변한다. 공주 기사라는 단어를 가져다 붙여도 위화감이 하나 없을 것 같은 날카로운 인상의 미녀.

 “거기까지 알게 되었다면 전부 들은 거나 다름없겠네요.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실 거죠?”

 “어떻게 하다니?”

 “파티의 리더가 한나 양이라지만, 결국 파티의 방향을 정하는 건 당신이잖아요. 정체를 숨기고 있던 저를 내보낼 건가요?”

 “설마, 그럴 리가. 용병단 출신 케이든이나 북부 대공의 딸 케이티 웰즐리나 우리 파티의 부족한 점을 보충해 줄 훌륭한 검사일 뿐인데.”

4★ 근딜을 파티에서 내보낸다고? 5★ 근딜이 갑자기 파티에 오는 게 아니면 그럴 리 없지.

그래도 파티에서 내보낼 생각이 없다는 말에 냉랭하던 말투에 조금씩 변화가 생긴다. 남장을 들켰다든가, 숨겨둔 신분을 들켰다는 사실에 대해 걱정은 하나 없이 오직 모험에 대한 걱정만 있다니.

하긴, 이 정도로 모험에 진심이니 가문의 보물을 훔쳐서 가출할 행동력이 있는 것이리라. 심지어 대륙의 북부에서 중부를 지나 동남쪽까지 내려온 것 아닌가.

 “그렇죠? 거기에 여신님의 목소리까지 들었으니 언니도 다시는 고집을 부리진 못 할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케이티의 표정은 해맑기 그지없었다. 모험하기 위해 가출까지 감행했는데, 모험 중 여신의 목소리를 들었으니 입꼬리가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구먼. 아버지의 속을 타들어 가게 만든 두 불 속성 북부 자매의 싸움은 동생의 판정승이라 볼 수 있겠네.

아니 근데, 그러면 일행들에게 정체를 숨길 이유가 없지 않나?

은발 벽안의 미녀인지라 얼굴 보여주기 창피할 일도 없겠다, 남장을 해제한다고 해서 검술에 방해가 될 정도로 묵직한 흉부 장갑이 있는 건 아니잖아. 그레이스와 아이린이 그라비아 아이돌의 몸매라면, 케이티 웰즐리는 패션쇼 모델의 늘씬한 몸매라고 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일단은, 이뤄둔 게 그다지 없으니 탑을 먼저 오를 생각이에요. 여신님의 목소리를 들었으며 모험가로서 제가 얼마나 뛰어난 활약을 보이는지 언니에게 똑똑히 보여 줄 생각이니까요. 아무런 증거 없이 여신님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주장하는 것보다는 설득력 있겠죠.”

 “아니, 그 이야기가 아니라. 일행들 앞에서 계속 남장을 할 거냐고 묻는 건데.”

 “아….”

내가 조금은 실례되는 생각을 하든 말든 케이티는 열에 달뜬 얼굴로 랩을 하듯 속사포로 제 이야기를 내뱉는다. 대체 얼마나 대공의 자리를 물려받는 게 싫었던 거야. 내 말에 자신이 조금 설레발을 치고 있었다는 걸 자각했는지 흠흠, 헛기침하며 목을 가다듬는 그녀.

일행들에게 남장 사실을 알리고 여자로서 모험가 생활을 할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남장을 한 채 모험가 생활을 계속할 것인가. 내 생각과 달리 그녀의 선택은 후자였다.

 “흠, 롤랑 씨가 비밀을 지켜준다면 저는 이대로 지내고 싶네요.”

 “굳이 남장하고 모험을 하겠다니…, 왜?”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없었다. 그저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케이티에서 케이든으로 되돌아갈 뿐. 제 딴에는 그것이 미스테리한 매력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현대 문물이 뇌리에 깊게 박혀 있는 나로서는 그저 다르게 느껴질 뿐이다.

그냥 컨셉질이 하고 싶은 중2병인 거, 아닌가…?

아이린과 그레이스가 준비한 스튜로 속을 든든하게 채우고 올라온 침실. 기사단 소유의 역참 건물이라 그런지 다른 손님이 한 명도 없어 마음 편히 인터넷을 즐길 수 있었다.

 “으아니, 좀, 시발! 오크 전사들 존나 무섭네! 진짜!”

몇 번이고 반복된 웹 서핑 끝에 오늘의 나를 즐겁게 만들어 줄 영상은 인터넷 방송인 김석현의 동영상. 화면 속에서는 전형적인 검방전사의 모습을 한 방송인이 숲 바닥을 뒹굴며 시청자들을 즐겁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보스 몬스터는 이미 잡은 것 같은데, 성장을 위해 오크랑 계속 싸우는 건가. 확실히 뿔늑대를 상대할 때에 비해 검술 실력이 늘었어.’

기억하기론 일행 세 명이 전부 4★ 등급으로 5★이 하나 없던 거로 아는데, 한세아의 뒤를 바짝 쫓아오는 재능충 방송인. 진행도 랭킹 세계 2위를 운이 아닌 실력으로 쟁취했다는 걸 증명하듯 난전 속에서 휘둘러지는 검이 날카롭기 그지없다.

현대 사회가 아니라 과거에 태어났다면, 혹은 나처럼 게임 속에 들어왔다면 왕국에 이름을 알릴 수 있지 않을까.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이야 바닥을 뒹굴고 흙을 뿌리며, 시청자들만 들을 수 있도록 괴성을 꽥꽥 내지르는 꼴이 퍽 우스워 보이겠지. 하지만 결국 오크 전사들의 성난 도끼질은 전부 피하면서 중간중간 칼침 한두 대를 섞어 넣고 있다는 건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한다.

-옆동네는 숲에서 미녀들과 힐링캠프 찍던데 여기는 오크랑 뒹구네

-맛이 확실이 달라서 방송 보는 재미는 있음 ㅋㅋ

-검방전사 이차전직이 콩벌레전사였나요?(진짜모름)

-나려타곤은… 무림인의… 수치이거늘…

-명줄이 참 질기긴 하다 어케 살아있음?

평화로운 시대에 살던 현대인이 칼과 방패를 들고 갑옷을 입은 채, 여덟 마리의 오크에 둘러싸인 상태로 버틸 확률이 몇 %나 될까. 파티의 탱커로서 저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점은 마이너스지만, 온전히 어그로를 담당하며 살아있다는 점은 플러스 요인에 가깝다.

평가를 하자면… 쁘띠 레베카? 3.5★짜리 하위 호환 캐릭터라는 느낌.

이렇게 말하니까 되게 평가가 박한 것 같지만, 저 김석현이라는 방송인이 가문에서 검술을 전문적으로 배운 케이티 웰즐리의 턱 밑까지는 쫓아왔다고 생각한다면 꽤 높은 평가다.

 “에밋! 마법은 언제쯤 준비되는데?!”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조금더를 무한 반복하는 게 우리PT쌤 닮았네여ㅎ

-석현이가 오크 세 마리 정도 잡고, 루이스가 두 마리 정도 쏴 죽이면 마법 준비될듯

-화력형 마법사는 캐스팅 시간 기다리다 숨넘어가것다잉

-이래서 롤랑센세가 짤짤이 마법이 중요하다고 알려줬구나

-알려주면 뭐함 NPC한테 스킬이 없는데 ㅋㅋㅋㅋ

한세아의 방송이 미녀들과 함께하는 이세계 먼치킨물이라면, 김석현의 방송은 밑바닥부터 시작한 정통 판타지 액션물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물론 동료가 4★ 세 명이라는 점에서 밑바닥이라고 부를 순 없겠지.

시청자들이 바닥을 나뒹굴다 갑옷 사이에 돌멩이가 박혀 끙끙대는 김석현을 비웃는 이유 또한 질투심일 테니까.

 “불태우고, 폭발하라―!”

 “그걸 꼭 외쳐야 해?!”

바닥을 나뒹구는 김석현의 머리 위로 슈욱 날아드는 화염구. 한세아의 스파크나 매직 미사일 같은 짤짤이 스킬과 비교되는 불꽃이 오크들 사이로 파고들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킨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김석현과 바닥에 후두두 떨어지는 마석들.

그 모습을 본 뒤 다른 방송 목록을 대충 살펴보았다.

가상 현실 게임이라는 게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흥미를 이끌어서 그런지 방송인 자체가 엄청나게 많다. 시청자 수가 10명도 안 되는 하꼬 방송인들이 잔뜩 있는데, 그 하꼬 방송인 자체가 수십 배로 불어난 느낌.

 “아앙, 오빠들! 저 커다란 늑대를 도대체 어떻게 잡으라는 거야!”

-이 뱅송은 치과 의사한테 협찬받았나

-패턴 알았다고 외친게 몇 번째냐 대체

-몸 쓰는 일에는 진짜 재능이 없는거 같은디

-이쯤되면 걍 노가다로 돈벌어서 장비로 딜찍누하는게 편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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