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허여멀건 귀신같이 보였지만, 아무래도 한세아의 방송에는 여신의 외모가 제대로 드러난 모양. 전형적인 서양 미녀의 이미지를 본떠왔는지 금발 벽안의 글래머 미녀가 그리스식 튜닉을 입고 팔뚝과 겨드랑이, 가슴골을 그대로 노출 한 것 같다.
징한 놈들, 스토리 이야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주제에 겨드랑이랑 가슴골, 목덜미 이야기는 직접 보지 못한 내가 채팅창만 봐도 여신의 인상착의가 그려질 정도로 도배를 하고 있어.
[히어로즈 크로니클 갤러리]
―✪ 여신님의 신성력 주머니 [261] +72
―✪ 여신 등장 이후 환쟁이 현황.JPG [128] +105
―✪ 마왕 잡는 스토리는 좀 진부한 게 [29] +43
―✪ 그래서 스토리가 뭐였지? [35] + 82
―✪ 스포) 생방 놓친 놈들을 위한 스토리 3줄 요약 [492] + 564
채팅창은 여신의 가슴 이야기로 난리가 나 있었지만, 인터넷에선 다행스럽게도 내가 보지 못한 스토리의 요약본이 존재했다.
― 스포) 생방 놓친 놈들을 위한 스토리 3줄 요약
[양팔을 벌린 채 미소짓는 여신.JPG]
[확대하여 가슴골이 부각된 여신.JPG]
[더욱 확대하여 가슴만 보이는 여신.JPG]
1. 탑 밖에 맘마통
2. 탑 안에 마왕
3. 어어 흘러넘친다 막아줘
┗씨발년아 이게 맞냐?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먼가먼가임
┗여신(이만든세상)에게 마왕이 크고 굵은(탑)걸 꽃아서 끈적한걸 주입중이긴 함
┗아무튼 탑에서 몬스터가 기어나오니까 잡아 죽이라고
┗본문이랑 짤방이랑 무슨 관계가 있는데
┗그래서 마왕 여자임?
어째 본문이 아니라 댓글에 설명이 잔뜩 달려 있긴 했지만, 게임의 스토리는 어찌 정리할 수 있었다. 여신이 만들고 가꿔가는 이 세상에, 마왕이 침공을 위하여 탑을 뿌리내리도록 했다는 설정.
탑의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는 통로가 자꾸 생기는 것 또한 침략의 일환이며 보스 몬스터가 탑 밖에 한 번씩 얼굴을 비추는 이유기도 하다.
여신의 피조물인 몬스터를 흉내 낸 탑 내부의 몬스터들은 마석으로 만들어졌고 생식 능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탑 내부는 생명이 존재할 수 없는 가짜 세상이기 때문이며 마왕은 탑 내부와 외부를 완벽히 동화시켜 생명이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한다―
한세아의 방송 다시 보기가 아직 올라오지도 않아서 이 내용을 알아내기 위해 대체 몇 개의 글을 뒤졌는지 모르겠다.
정상적으로 설명을 하는 사람이 욕을 먹으니 원, 미친놈들이라니까.
“아, 그렇습니까? 오크의 흔적은 없었으며, 동남쪽의 공터에서 신성력의 세례를 받았다….”
“네. 공터들을 기준으로 마력을 사용해서 샅샅이 살펴봤어요.”
몸 상태를 점검하는 척 뒤로 빠져 인터넷 게시판을 열심히 뒤지고 있으니 한세아가 파티의 리더로서 퀘스트를, 아니 모험가 의뢰를 완료하고 있었다.
플레이어로서 퀘스트 창에서 완료 창이 뜨며 게임 시스템에게 보상을 받는 것과 모험가로서 기사단에게 의뢰를 완료하고 보상을 받는 게 다르다니. 이중 과금은 역겹지만, 이중 보상은 모든 플레이어가 쌍수를 들고 환영하지 않을까?
뭐, 여신에게 축복을 받았으니 의뢰비는 지급하지 않겠다며 기사단이 강짜를 부릴 리 없다.
“그 밖에 이상 현상은 없었습니까?”
“네. 오크가 있을 법한 곳은 다 뒤져봤지만 없었어요.”
-공권력 앞에서 절로 공손해지는 여자
-음해 ㄴㄴ 돈 주는 사람 앞이라 공손해진거임
-인게임에서도 수금을 땡기네 무친련
-돈 주면 기사님이고 돈 안주면 무별따리 씹새끼임
[관리자에 의해 삭제된 채팅입니다]
숲을 관리하는 기사 또한 수상한 낌새 따위를 느껴본 적 없는지 한세아의 지팡이를 한 번 흘끗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오크가 없다는 증거 따위를 제출할 수 없으니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서류에 무언가를 끼적거린 기사가 뒤에 있는 텐트로 향하더니 묵직한 주머니를 들고나온다. 부피만 봐서는 금화가 섞여 있을 리 없는 커다란 가죽 주머니. 쓰기 편하라고 그런 건지, 아니면 금화 몇 개 딸랑 던져주면 멋이 안 산다고 생각하는 건지 은화와 동화가 섞여 있겠지.
역시나 동화가 가득 섞여 있었는지 주머니를 받고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한세아의 미간이 오묘하게 찌푸려진다.
“의뢰비도 받았겠다, 도시로 돌아가면 되겠네요.”
“수도 근처까지 왔는데 곧바로 돌아가야 하나? 뭔가 조금 아쉽네.”
“수도에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조금 궁금하잖아.”
한세아가 인벤토리를 정리하는 동안 그레이스와 아이린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아이린은 돌아가서 아이들을 볼 생각이고, 그레이스는 왕국의 수도가 궁금하지만, 딱히 관광까지는 하고 싶지 않은 모양새다.
중세를 배경으로 만든 판타지 세상인데 뭐 관광지나 유원지 같은 게 있겠는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수도가 궁금하겠지만 거기나 도시나 볼 게 없는 건 마찬가지다. 도시보단 수도에 귀족들의 저택이 많다지만, 남의 집 바깥에서 구경한다고 뭐 재미가 있겠어.
“수도는… 딱히 볼 일이 없다면 나중에 들리도록 하자.”
“그래, 그냥 궁금하기만 했을 뿐이야.”
그렇게 일행들과 이야기를 나누니 병사 하나가 와서 우리를 마차로 안내해준다. 받은 돈이 적다고는 해도 이렇게 오고 가는 마차를 준비해 주니 얼마나 좋아. 조금 우스운 이야기지만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복지 차이가 떠오른다.
마차를 향해 가며 전생과 관련된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으니 지금껏 조용히 있던 케이든이 슬그머니 내게 다가온다. 아무래도 북부 대공과 내가 단둘이서 이야기를 나눴으니 조금 불안한 모양.
“저, 롤랑 님?”
“왜?”
“대공님과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습니까?”
일행들에겐 공작가의 사적인 이야기라 말할 수 없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때 생각에 젖어 있어서 못 들었는지, 아니면 스스로 공작가라는 걸 시인하는 건지 슬그머니 물어보는 그녀. 이걸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다 슬쩍 한마디를 던졌다.
“걱정하지 마, 케이티 웰즐리.”
“……!”
내가 거기까지 들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지 오이를 본 고양이처럼 고장이 나는 녀석. 순식간에 표정이 오묘하게 가라앉고 몸이 빳빳하게 굳어 걸음걸이가 어색해진다.
그런 케이든의 어색한 반응을 눈치를 채지 못하고 하나둘 마차에 올라타는 일행들. 나란히 앉는 여자들에 의해 내 옆자리에 앉게 된 케이든이 슬그머니 엉덩이를 움직여 거리를 벌린다. 팔짱을 낄 기세로 가까워진 여자들과 달리 마차의 창문에 서로 앉은 나와 케이든.
일행들이 마차 창밖으로 멀어져가는 오베르뉴 숲을 보며 아쉬워하는 사이 몇 번이고 내 얼굴을 흘낏흘낏 바라본다.
“결국, 예쁜 숲만 잔뜩 구경하고 가네. 돌아가면 탑을 오를 텐데 엄청나게 비교될 것 같아.”
“축복받은 숲이었으니까요. 여신님의 은총을 몸소 느끼게 된 기쁜 경험이었어요.”
케이든, 아니 케이티 웰즐리의 머릿속에서 폭풍이 몰아치든 말든 마차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
돌아가는 길 또한 아무런 일 없이 고요했다. 보여줄 게 하나 없어 한세아가 다시 방송을 끄고 진행을 할 정도로.
우리를 숲으로 데려온 마부가 아닌 처음 보는 마부가 역참을 향해 마차를 몰았고, 기사단과 군대로 인해 정리된 수도 인근의 대로는 길을 막는 산적이나 떠돌이 몬스터 한 마리 없이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간간이 귀족의 마차나 상단의 짐마차 행렬이 옆을 지나가는 게 보일 뿐이라 조용히 인터넷을 뒤질 수 있는 최고의 환경.
‘…은근 신경 쓰이네.’
창밖을 바라보는 척 마차의 창문에 맞춰 인터넷 홀로그램 창을 띄워 뒀는데, 곁에서 맹렬한 시선이 느껴지다. 시선의 주인공은 당연하게도 케이든, 정확히 말하자면 케이티 웰즐리.
하기야 자신의 가출 사실에 더불어 남장을 했다는 것까지 파악을 당했으니 뭐라도 말을 하고 싶겠지. 맞은편에서 나처럼 인터넷 창을 뒤지느라 잠들지 않고 있는 한세아가 있어서 말을 못 할 뿐.
내가 오른쪽 창가에 앉아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인터넷을 하는 중인데, 왼쪽 창가에 앉아 창문을 등지고 나를 바라보고 있으니 시선이 느껴질 수밖에. 저렇게 대놓고 보면 초인이 아니라 평화로운 대한민국의 중, 고등학생도 눈치를 챌 수준이다.
―이 새끼들은 3023년에서 왔음?
[가상현실게임 히어로즈 크로니클 뉴스.JPG]
[가상현실의 의료 발전 가능성 뉴스.JPG]
가상현실 게임만 해도 개소린 줄 알았는데
먼 신경치료니 PTSD 치료니 별게 다 튀어나오기 시작
히붕이 요즘 전자제품에 님자 붙이면서 존칭 사용 중
말을… 잘듣는… 노예가… 되게씀니다…
[눈이 붉은색인 안드로이드형 악당 로봇.JPG]
인류가 노예가 될 시기가 멀지 않았다
┗특이점이 벌써 올 줄은 몰랐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