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100/175)

 “그래? 생각보다 빨리 돌아봤네.”

그렇게 95%가 된 순간 눈앞에 나타난 공터. 겉으로 보기에는 이름 모를 풀꽃과 나비 몇 마리가 날아다니는 평화로운 장소였다. 오크는커녕 뿔토끼도 찾아볼 수 없는 안전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공터.

 “역시, 오크는 없는 건가?”

 “아….”

한세아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야속하게 게이지는 차 오른다.

96%

97%

98%

 “음? 공터 가운데에, 이상한 게 있는데?”

99%

 “돌이 아니라, 마석, 같―”

100%

시야가 어둡다.

유체 이탈이 이런 것일까, 아니면 채 여물지 못한 자각몽이 이런 것일까. 온 세상이 어둡고 마치 물속에 둥둥 떠 있는 기분이 든다. 발바닥으로 바닥을 딛는 감촉이 없으니 바닥과 천장의 구분 없이 늘어져 있는 것 같은 감각.

그 어둠 속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인다.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한세아의 뒷모습.

 “우와, 이게 여신인가? 디자인 하나는 되게 이쁘게 뽑았다… 여러모로 가슴이 웅장해지긴 하는 모습이네.”

여전히 방송 중인지 허공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리는 게 귓가에 쏙쏙 들어온다. 한세아의 목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이상한 공간이기에 더욱더 강조되어 들리는 기분. 머리가 멍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를 계속해서 듣고 있으니 조금씩 잠에서 깨어나듯 정신이 들고 시야가 또렷해진다.

어둑한 공간에 둥실 떠 있는 한세아와 그녀가 올려다보고 있는 희끄무레한 무언가. 혼잣말을 들어보면 저 허여멀건 무언가는 플레이어인 한세아에겐 여신의 모습으로 보이나 보다.

그리고 그녀의 주변을 마치 토템이나 신전 기둥이라도 된 듯 조용히 둥실 떠 있는 동료들. 플레이어만을 위한 이벤트 신이 진행 중인지 모두가 태아처럼 웅크린 채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회색 머리를 너울거리는 그레이스, 기도하듯 두 손을 꼭 모은 아이린, 책상에 엎드려 자는 것처럼 머리 쪽에 손을 올린 케이든―

그리고 파라오처럼 가슴팍 위에 팔을 엑스자로 올려둔, 롤랑의 모습까지.

 ‘……이게 뭐야?’

나는 여기에 있는데, 롤랑은 저기에 있었다.

그제야 나는 다른 공간에 있다는 게 느껴진다. 한세아가 작은 유리구슬 안에 들어있다면, 나는 유리구슬 밖에서 구경하는 사람처럼 되어 있는 거지.

…왜?

내가 NPC임에도 전생을 기억하며 방송인 한세아가 시청자와 소통하는 걸 엿들을 수 있기 때문일까. 마치 심해에 표류하는 것처럼 어둠 속에 둥실 떠 있으니 가슴이 답답해지고 조급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희끄무레한 여신의 형상이 밝게 빛나자 가슴이 묘하게 따스해진다. 이벤트 신이 종료되는지 한세아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빛줄기와 일행들의 가슴팍으로 파고드는 한 줄기 빛들.

 “이게 무슨 서브 퀘스트인가 했더니, 동료 확정권 같은 느낌이네. 아마 이 신성력 인장 찍힌 동료는 파티에서 나갈 일이 없나 봐. 나는 롤랑 때문에 빨리 오긴 했는데, 평범하게 플레이하는 사람들은 동료 퀘스트 한 번씩 다 깨고 나서 여기에 오지 않을까? 어떻게든 파티를 유지해서 20층까지 오면 그다음에는 탈퇴할 일이 없도록 해 주는 것 같아.”

빛의 세례를 무덤덤하게 받아내며 한세아가 홀로 중얼거린다. 물론 내게는 그녀의 방송 화면도 채팅창도 보이지 않고 뒷모습만 보일 뿐. 허우적거려봐야 육체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아 축 늘어져 안쪽을 바라보았다.

축복받은 숲에서 여신에게 탑에 대한 설명을 듣고, 기존의 동료들과 인연이 강화되는 스토리. 어찌 보면 참으로 정석적인 서사시의 흐름이네.

한세아가 플레이어로서 탑과 여신에 대한 떡밥을 받았다는 건 알겠어. 20층의 서브 퀘스트가 플레이어의 꼬접을 막기 위해 동료와의 인연 강화 퀘스트라는 것 또한 알겠어. 그런데 나는 언제까지 여기에 있어야 하지?

 “그나저나 슬슬 받을 거 다 받았으니까 내보내 줬으면 하는데? 어째 여신님 일 처리 속도가 한국인이 좋아하는 속도는 아니네.”

불경하다면 불경한 한세아의 발언 직후,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마치 커튼이나 천막처럼 화악 펼쳐져 모든 것을 감싼다.

―탑 ■대■에 ■르■ ■■■ ■■■ 것■ ■■할 ■ ■■ ■■다

그와 동시에 귓가에 들리는 나긋한 목소리. 저 새하얀 것이 한세아를 지나쳐서 내 코앞까지 다가왔다. 저 기묘한 공간의 안에서, 바깥에 있는 내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다는 듯.

하지만 유리창 너머에서 말하듯 뭉개지고 뭉개져서는, 제대로 알아들을 수조차 없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피로함일까.

눈꺼풀이 마치 천근처럼 무겁지만, 서서히 육체에 활력이 돌기 시작한다. 허기질 때 식사를 하고 뇌를 혹사했을 때 커피나 단것을 먹는 것처럼 육체가 점점 각성하는 게 세밀하게 느껴진다.

 “끄으읍, 흐읏―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으음, 뭔가, 꿈을 꾼 것 같은데요….”

나만 그런 게 아닌지 주변에서 하나둘 들리기 시작하는 동료들의 앓는 소리. 그레이스가 팔을 휘휘 돌리며 스트레칭을 하고, 아이린이 어깨를 꼼질 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케이든 또한 칼자루에 손을 올린 채 사방을 노려보는 중이고.

물론 주변에서 수상한 것은 발견할 수 없었다. 축복받은 숲의 공터는 여전히 고요한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고, 일행들은 그저 조명처럼 내리쬐는 햇볕을 받으며 잠에서 깨어났을 뿐.

한세아의 퀘스트 게이지가 100%가 되는 순간 무언가 번쩍! 빛나며 우리를 이상한 공간에 처박았다는 걸 아무도 모르는 눈치다. 그래도 여신의 세례라는 게 신성력을 듬뿍 퍼 주었는지 육체의 컨디션은 완벽한 상황.

 “여신님의 축복이라도 받은 걸까요? 몸에서 신성력이 넘치는 것 같아요.”

 “그러게, 몸이 나른한 것 같으면서도 감각이 날카로워진 것 같아.”

어둑한 공간에서의 기억이 없는 동료들이 한마디씩 하며 이리저리 몸을 푼다. 나 또한 어깨를 풀어주는 동시에 후다닥 방송 창을 켜 확인을 했다. 유체 이탈을 할 땐 퀘스트의 보상으로 받은 기능들이 다 먹통이 되었으니까.

다행스럽게도 곧바로 켜지는 한세아의 방송. 그녀의 채팅창에선 시청자들이 난리가 난 상황이었다. 갑옷으로도 숨길 수 없는 풍만함과 두꺼운 사제복에 가려져 있던 모성애가 흔들거리며 그 실루엣을 드러내니 스토리 이야기 하나 없이 불타는 하트 이모티콘만 가득한 상황.

아니, 조금 전 세계 최초로 게임 스토리에 대한 떡밥이 풀렸는데 그거 이야기 좀 하지, 시발놈들. 여신이 강림해 탑에 대한 떡밥을 푼 것 같은데 왜 그에 대한 채팅이 단 하나도 없냐.

 “일단, 오크는… 확실히 없네. 정찰이 끝난 것 같으니 복귀하자.”

 “이건 기사단에 보고해야 하나?”

 “일단, 이야기는 해 놔야지. 오크는 없지만, 숲의 공터에서 신성력의 세례를 받아 기절했다고.”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난 일행들이 자연스럽게 숲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한다. 잠시 이상한 일이 있었지만, 여신의 축복을 받은 숲에서 신성력의 세례를 받은 데다 기절했다 깨어났음에도 습격당하지 않은 상황. 그러니 오크가 있을 리 없다고 판단하는 게 자연스럽겠지.

서브 퀘스트를 완료하고 여신과 대화를 나눈 한세아도 슬그머니 동참해 지팡이를 주워들고 숲 밖으로 향한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평화롭기 그지없는 숲을 걷지만 머리는 복잡하기 짝이 없다. 그야 퀘스트 창이 등장해 한세아를 도우라고 대놓고 지시할 때부터 수상하긴 했지만, 조금 전처럼 강제 유체 이탈을 당하고 태연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

 “롤랑,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음? 아니, 뭐라고 해야 할까… 여신의 목소리라도 들은 것 같아서?”

잘 굴러가지도 않는 머리를 열심히 굴려보지만, 여신의 형상을 한 그 희끄무레한 놈이 나를 이 세상에 처박은 놈이 아닐까, 딱 그 정도의 추측밖에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던 와중 옆에서 말을 걸어온 그레이스의 말에 적당히 대답했는데….

 “역시, 그렇지?!”

 “뭐가?”

 “여신님 말이야! 사실 기절하듯 잠들었을 때 꿈속에서 되게 포근하게 안겨서, 누군가가 나를 다독거려 주면서 말을 건 것 같았거든. 다들 아무 말이 없어서 그냥 내가 꿈을 꿨다고 생각했지.”

제자리에서 펄쩍 튀어 오를 정도로 격렬히 수긍하는 그레이스의 모습에 뒤에서 아이린과 케이든 또한 맞장구를 치는 게 들려온다. 게임 속 여신이 진짜 여신인가 고민하는 중 적당히 둘러대려고 던진 대답이었는데, 이게 이렇게 되네.

소가 뒷걸음질을 치다 쥐를 잡듯 얼떨결에 다른 NPC처럼 똑같이 행동하게 되었으니 나쁠 건 없겠지. 퀘스트 내용을 가지고 열심히 떠들던 한세아도 나 혼자 이상한 경험을 했다는 걸 모르는 눈치다.

 “아까 그 공간에 있을 때, 다른 일행들은 꿈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나 보네. 여신에게 선택받은 플레이어와 그녀의 동료들. 이거 비비게임즈가 판타지 뽕을 제대로 채워 넣을 줄 아는데?”

-여신마망의 신성력 주머니는 성녀님보다 묵직해욧 헤으응

[관리자에 의해 삭제된 채팅입니다]

-이 새끼들은 한결같은게 스토리 최초 공개인데 맘마통 비교만 하고있네

-탑 바깥에 여신이 있고 탑 내부에 마왕이 있고 익숙한데 맛있는 맛이네요

-썸네일에 여신 가슴골 찍혔을 때 유입이 만단위네 시발 ㅋㅋㅋㅋ

 “아잇, 싯팔. 너희들 지금 탑에 대한 배경 설명이 세계 최초로 등장했는데 맘마통이니 신성력 주머니니… 자지 활주로는 뭐야 진짜, 너는 일단 정지부터 먹고. 아무튼, 스토리가 최초로 풀렸으면 그걸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야지 다른 쪽으로 상상을 하느라 바쁘냐, 다들.”

그레이스에 뒤이어 아이린이, 아이린에 뒤이어 케이든이. 무슨 신앙 고백을 하듯 여신님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고, 우리에겐 어떤 사명이 내려진 것 같다고 달뜬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물론 모두가 의기투합하는 그 아름다운 현장에서 한세아는 음탕한 채팅을 도배하는 악질 시청자를 때려잡느라 바쁠 뿐이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