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화 (99/175)

 “역시, 그런가….”

어딜 우리 파티의 든든한 칼잡이를 빼 가려고. 3★ 궁수도 따로 찾기 힘들 텐데, 4★ 검사를 또 어디서 찾아와서 후열의 안전을 맡기겠는가? 북부 대공 직위 따위는 알 바 아니니 우리 파티에는 케이든이 남아 있어야 한다.

…시청자들이 말하길, 언니 쪽은 3★이라고 했으니까 4★을 우리 파티에 남겨두는 게 좋겠지.

어색한 침묵만이 감도는 테이블 위에 아서의 깊은 한숨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린다.

남장여자 케이든의 숨겨진 사정을 알게 되었지만, 이것은 서브 퀘스트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아니, 그래서 저 아저씨는 진짜 딸 보러 잠깐 온 거야? 퀘스트 창에 변동이 하나도 없는데? 이러면 내일 다시 숲 돌고 100% 찍으면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하고 도시로 돌아간다고? 진짜로?”

-숲에 머 히든 퀘스트 있는 거 아님?

-절벽에서 기연이나 찾아보라고

-산도 아니고 숲에 절벽이 왜 있어 빡대가리련들아 ㅋㅋㅋㅋ

-동굴에 막 던전 숨겨져 있는 듯 ㅎ 빨리 찾아라

-아니면 장소가 장소니까 귀족 만나는 인연 퀘스트일지도 모름

한숨을 푹푹 내쉰 아서 웰즐리가 돌아가도 변화가 하나 없는 퀘스트 창.

안 그래도 막장스러운 북부 대공의 가문 이야기에 화끈하게 달아오른 시청자들은 내 말이 맞네, 저 말은 틀렸네 시끌벅적하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하기야 탑의 20층을 정복하고 나서야 등장한 첫 서브 퀘스트 치고는 너무 재미가 없잖아.

10층을 클리어한 뒤에는 그레이스의 캐릭터 퀘스트가 진행되어 동료를 잃느냐 마느냐 악독한 시험에 들었는데, 20층을 클리어한 뒤에는 그냥 이틀간 숲을 돌아보고 끝?

그런 허망한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온갖 이야기가 다 튀어나온다. 숲에 잠들어 있는 보스가 있을 것이다, 무협지처럼 기연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축복받은 열매 같은 걸 먹어야 하는 퀘스튼데 모르고 지나치면 손해 아니냐 등등.

 ‘사람 머릿수가 많으니까 온갖 잡소리가 다 나오는구나.’

그나마 신빙성 있는 의견은 기연 비슷한 게 숲속에 숨겨져 있을 거라는 의견과 숨겨진 보스 몬스터 따위가 있어 찾아내 처리해야 추가 보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뿐.

축복받은 숲이니 영약처럼 신성력을 머금은 열매 같은 게 플레이어를 위해 준비되어 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또한, 탐색도가 점점 차오르니 중간에 이벤트성 몬스터나 일회용 던전 같은 게 등장할 수도 있지.

절벽을 찾아 뛰어내려야 한다든가, 호수를 찾아서 무기를 던져 넣자는 개소리는 한세아에게도 다른 시청자들에게도 가볍게 무시되었다.

 “저어, 롤랑? 저녁에 먹을 스튜를 끓이려고 하는데… 저분들 것도 같이 끓일까요?”

그렇게 1층 테이블로 돌아와 생각하는 척 한세아의 방송과 인터넷을 뒤지고 있으니 위에서 슬그머니 내려오는 아이린.

아서는 가출한 딸내미를 만나자 마음이 복잡해졌는지 다시 밖을 서성이기 시작해 병사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있었고, 장녀인 앤 웰즐리는 아까 나선 뒤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니 숙소에는 자연스럽게 북부의 기사 두 명만 남아 있는 상황.

2층에 있는 숙소야 떨어져 있는 방을 잡았다지만,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은 하나뿐이다. 식사 정도야 따로 먹으면 될 걸, 마음씨가 고운 데다 베푸는 게 일상적인 우리 수녀님은 음식을 대접할 생각인가.

 “저희 몫의 식사는 준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무래도 대공께서는 병사들과 함께 식당에서 식사하실 것 같으니까요.”

 “아, 그런가요?”

2층에서 쪼르르 내려온 아이린이 식재료를 얼마나 다듬을지 고민하는 사이 철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두 기사가 내려온다. 병사 식당에서 함께 식사하는 북부 대공이라니.

북부에서는 그가 병사들과 같은 밥을 먹는 게 익숙할진 몰라도 여기서는 아닐 텐데. 보면 볼수록 병사들이 불쌍해지는 기분이 든다. 쉼터로 쓰이는 텐트도 빼앗겨, 생활관 주변에서 고민할 게 있다며 빙빙 맴돌아, 밥도 편히 먹지 못하게 같은 식당에 들어와….

 “뭐야, 롤랑 왔어?”

기사들이 떠나자 내려오는 것은 한세아와 그레이스였다. 케이든은 북부 대공 일행과 마주하는 일이 없도록 방에 꼭꼭 숨어 있을 생각인 것 같네.

이전까지의 나였다면 그 모습이 냉정하고 칼 같은 태도라 생각했겠지만, 아서의 푸념을 전부 듣고 나니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마치 곤란한 일이 생기자 외면하고 제 방에 숨은 사춘기 여학생과 하등 다를 바 없지 않나?

 “그래서, 저 북부 대공님이랑 남자만의 이야기를 했다며, 무슨 이야기야?”

 “그게 이 층까지 들렸나?”

 “그렇게 목청이 좋은데 전부 들렸지.”

방 안에서 카메라로 전부 촬영했으면서 우연히 들은 척하기는. 그래도 이번에는 말을 더듬거나 눈동자가 굴러가지는 않네. 한세아의 능청스러운 질문에 그레이스도 눈을 반짝거리며 달라붙는다.

하기야 왕족 바로 아래인 대공을 만났는데 호기심이 안 생기기도 힘들겠다. 그 높으신 분이 요상한 태도로 일행에게 달라붙는다면 더욱더.

 “공작가와 얽힌 이야기라, 내가 직접 말해줄 순 없을 것 같은데.”

 “그래? 그건 좀 아쉽네.”

 “아, 그런가….”

대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촬영한 한세아는 아쉽다고 말하면서도 아쉬운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게이머 겸 방송인으로서는 훌륭하지만, 연기의 길로 나가면 0점에 가까운 모양새.

물론 시무룩해져서는 안 그래도 얇은 눈매가 아래로 축 처진 그레이스는 곁에 있는 한세아의 어색한 대답을 눈치를 채지 못했다.

 “그래, 솔직히 공작가의 비밀 이야기를 떠벌리고 다닐 순 없잖아. 가서 밥 먹을 준비나 하자고. 아이린은 이미 주방에서 스튜를 끓일 준비를 하고 있어.”

 “하긴, 귀족들 이야기니까… 근데 왜 남자끼리 이야기를 했지?”

아쉬워하는 그레이스를 주방으로 보내자 한세아는 케이든을 데리러 다시 이 층으로 올라갔다.

아이린이 끓인 스튜는 언제나처럼 맛있었으며, 일행들은 북부 대공의 비밀 이야기가 뭔지 궁금해하는 눈치였지만 딱히 캐묻지는 않았다. 귀족의 비밀 이야기는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딱히 알아서 좋을 건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거기에 북부 대공의 일행들도 저녁 식사 이후 어디론가 스윽 사라져서 숙소에 돌아오지 않았고.

 “저, 롤랑 님?”

 “왜?”

 “…아뇨, 아닙니다.”

다만 케이든만이 잘못을 저지르고 부모에게 숨겨 제 발 저린 잼민이처럼 끙끙 앓을 뿐.

그런 사소한 일을 제외한다면 퀘스트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퀘스트 창의 퍼센트 게이지는 우리가 신성력이 가득한 숲을 걸을 때마다 쭉쭉 차올랐고, 넓은 공터에는 히든 피스니 기연이니 보스 몬스터라고 할 무언가가 하나도 없는 상황.

 “아니, 이게 진짜 아무 일도 없이 끝난다고? 이러면 좀 당황스러운데… 진짜 공터가 아니라 무언가 숨겨진 비밀 장소라도 있나?”

-불속성 북부자매 소개하고 끗?

-축복받은 숲인데 몬스터가 있으면 이상하기도 하고

-설정상 모두에게 평등한 은혜래자너

-근데 오크는 진짜 없을 듯 아예 흔적도 없잖아

-산책 시뮬레이션 2일차… 넥슨이 다람쥐를 여기에 뿌려놨네

따듯한 숲속을 걸으며 들풀 내음과 새 지저귀는 소리를 즐기는 일행들과 달리 조금씩 초조해지는 한세아. 게이머로서 퀘스트에 숨겨진 스토리나 추가 보상이 있을지도 모르는 곳인데, 하나도 발견하지 못할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다.

지팡이를 들고 그레이스의 곁에서 마력을 휘두르는 주제에, 얼굴이 찌푸려지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니 시청자들과의 대화를 듣지 못하는 그레이스도 눈치를 챌 수준.

 “한나,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어? 아니면 수상한 점이라던가….”

 “아, 아뇨 언니. 오히려 반대에요. 탐지되는 게 하나도 없어서 오히려 불안한 거라서.”

 “그런 거였어? 뭐, 살다 보면 그런 날도 있는 거지. 오크가 없어도 의뢰는 성공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한세아의 사심 섞인 변명에 그레이스가 귀엽다는 듯 픽 웃는다. 돈을 받았으니 뭐라도 나오길 바라는 모습이 성실함 때문이라고 생각하겠지. 사실은 손해 보기 싫어하는 게이머의 본능 때문인데.

공터를 하나둘 더 지나가며 퀘스트의 게이지가 거의 80% 가까이 차오른 상황. 50%쯤에 뭐가 나온다더니 나온 건 곰 비스므레한 북부 대공뿐. 그마저도 퀘스트와는 전혀 상관이 없던 인간이다.

채팅창에서 숨겨진 보상이니 히든 퀘스트니 온갖 이야기가 나오니 마음이 조급해질 수밖에.

 ‘근데 진짜 아무것도 없나?’

조급한 한세아의 마음은 둘째 치고 숲은 참으로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4★ 탐색꾼이 패시브 스킬로 강화된 탐색 능력을 사용해 숲을 헤집고 다니는 데 나오는 게 하나도 없잖아.

20층 퀘스트 주제에 4★으로 찾는 게 불가능하다면, 오직 5★만을 위해 만들어진 퀘스트라는 뜻이다. 5★, 그것도 궁수나 도적 등 탐색 계열 5★이 없으면 클리어할 수 없는 초반 퀘스트라니, 설마 그따위로 만들진 않았겠지.

 “숲에 진짜 아무것도 없나 봐요. 역시 여신님의 축복을 받은 숲.”

 “그러게, 있는 거라곤 토끼랑 다람쥐뿐이야.”

점점 조급해지는 한세아의 마음도 모른 채 일행들이 도란도란 대화를 나눈다. 퀘스트 창에 대해 모르는 일행들에게 있어 이번 의뢰는 날로 먹는 의뢰에 가깝지.

왕족과 고위 귀족에게만 허락된 귀한 숲을, 신성력을 듬뿍 만끽하며 이틀 정도 산책하면 되는 의뢰라니. 숲에서 맡는 피톤치드 따위와 비교도 안 될 신성력의 세례를 받는 상황인데 돈을 받는 게 아니라 돈을 내도 모자랄 상황 아닌가.

그렇게 아무 일 없이 퀘스트 창의 퍼센트 게이지가 점점 차오른다. 80%에서 85%로, 90%에서 95%―

 “……여기가, 마지막인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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