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 (98/175)

 “갑옷을 보고 알아 차린 건가, 눈썰미가 좋군.”

사실 갑옷의 외형은 잘 기억도 나지 않고 시스템 창과 한세아의 방송을 보고 알게 된 거지만, 무슨 상관일까. 눈앞의 남자와 카메라 너머의 시청자들도 내 말에 납득을 하는 게 중요한 거지.

이러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적당히 에둘러 설명한 뒤 자기 자식을 잘 봐달라고 이야기할까, 아니면 케이든을 데리고 가려 할까.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 조용히 침묵을 유지하자 다시 한번 머리를 벅벅 긁은 아서 웰즐리가 크게 외친다.

 “아, 제기랄! 밖에 나가서 남자들끼리 툭 터놓고 이야기 좀 하자고.”

거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니 위압감이 장난 아니네.

남자들끼리 이야기를 하자는 말이 케이든 떼어 놓고 우리 둘끼리 가자는 뜻이었는지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는 북부 대공, 아서.

 “추, 충성!!”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악!!!”

그 덕에 손님용 건물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장마철 홍수에 휘말린 개미처럼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기 시작한다. 얌전히 숙소에 틀어박힌 줄 알았던 높으신 분이 갑자기 화가 난 것처럼 성큼성큼 뛰쳐나왔으니 병사들은 죽을 맛이겠지.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 자리 좀 빌리지.”

 “예! 알겠! 습니다!!”

아아, 느껴진다….

모험가 생활 10년 차 롤랑이 아니라 군필 복학생으로서 병사의 눈동자에 서린 생각이 읽히는 기분이다. 이야기는 손님용 거처에서 하지 왜 여기까지 튀어나와서 병사용 막사에서 지랄이냐고 눈으로 욕을 하는 게 느껴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 곰 같은 양반은 기어코 병사들의 쉼터로 보이는 텐트를 하나 차지한 채 테이블에 털썩 주저앉는다.

 “흐아, 먼저 이야기를 좀 할 게 있는데.”

주변의 병사들을 의식했는지 파장처럼 쭈욱 퍼져나가는 아서의 마력. 근처에 듣는 사람이 없다는 걸 꼼꼼히 확인한 그가 습관처럼 머리를 벅벅 긁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요양차 오는 귀족들 때문에 관심 가지지 않는 법을 아는지 빠르게 텐트로부터 멀어지는 병사들. 이제 이 텐트에는 나와 북부 대공, 그리고 끈질기게 따라 붙은 한세아의 카메라 드론밖에 없었다.

 “케이든은 내 아들이 아니라, 딸일세. 그러니 그 부분을 조금 조심해 줬으면 해.”

 “케이든이 여자라는 말씀입니까?”

이야, 그것부터 까는 건가.

내가 이미 케이든의 남장 사실을 알 리 없다며 단정을 짓고 설명을 시작하는 모습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자부심 같은 게 느껴진다. 설마 남장이 웰즐리 가문의 숨겨진 비기라도 되는 건가 싶은 모습.

내 어리둥절한 모습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고개를 끄덕거리는 아서 웰즐리.

 “이야기하자면 조금 복잡한데, 우리 가문이 왕실로부터 하사받은 마도구가 있거든. 그, 민심을 살필 때 주로 사용하는 변장용 마도구인데….”

 “왕실의 하사품이면 귀중한 물건 아닙니까?”

그걸 철부지 딸내미 가출용으로 써도 되는 건가?

 “흐하하, 그게, 이야기하자면 좀 길어서 말이야. 파티에 남자는 자네뿐이지 않나. 원래대로면 이야기할 게 아닌데, 혹시 같은 남자라고 생각해서 영 좋지 못한 일이 벌어질까 아버지로서 걱정이 되는구먼.”

튀어나올 뻔 한 뒷말을 목구멍 너머로 밀어 넣자 다시 한번 멋쩍게 웃어 보이는 아서. 그래도 뭘 숨길 생각은 없는지 부산스럽게 꼼지락거리다 이야기를 다시 시작한다. 꼼지락거리는 손가락, 움찔거리는 턱과 무안한 듯 쩝쩝거리며 움직이는 혀까지.

북부 대공이자 기사단장이라기보다는 무슨 간식 기다리는 곰처럼 보이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 내게는 두 딸이 있네. 언니는 아까 숲에서 만난 쪽, 앤 웰즐리. 동생은 케이든이라는 가명을 쓰며 자네 파티에 있는 케이티 웰즐리. 두 사람이 어릴 땐 사이가 참 좋았어.”

옛 기억을 회상하는 듯 아련한 눈이 되자 진짜 조련사 앞에서 웅크린 곰처럼 보인다. 내가 엉뚱한 감상을 품거나 말거나 아서 웰즐리의 말은 이어지고 시청자들의 채팅도 노도와 같이 쏟아졌다.

-왕실하사품(남장도구) 존나 없어보인다 진짜

-갑자기 라떼는말이야 시전중임 웨?

-폴리모프 마도구라 하면 까리한데 가출용 남장도구라 하니까 개쓰레기같음

-먼데 화장실 다녀오니까 눈나들 대신 흉터투성이 아죠씨가 있음?

-사이가 좋았던? 갑자기 출생의 비밀 같은거 나오려나

 “K-드라마식 스토리면 막 치정극도 나오고 새엄마도 나오고 그래야 하는데. 비비게임즈가 한국 게임사는 아닌 것 같아서 어떻게 스토리가 흘러갈지 모르겠네.”

마치 드라마의 도입부를 보는 기분이라 해야 할까. 시청자들도 한세아도 흥미진진하게 우리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네. 물론 나도 궁금한 건 마찬가지. 대체 무슨 사연이 있어야 북부의 공작 가문 막내 아가씨가 남장하고 용병이 된단 말인가?

출생의 비밀부터 혈족 간의 정치 다툼까지 온갖 이야기가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이라 이 세상에 오기 전 소문으로만 들은 K-아침드라마의 온갖 막장적인 설정이 저절로 떠오른다.

 “문제가 있다면 두 딸이 성인식을 치르고 난 뒤, 두 사람의 의견이 갈렸을 때려나. 평소 사이가 좋아서 후계와 관련된 이야기에 그렇게 격렬하게 다툴 줄 몰랐거든.”

 “후계자의 자리를 놓고 두 사람이 다툰 겁니까?”

 “후계자 자리를 놓고 다투었다…, 어찌 보면 그렇지.”

그러나 이어지는 아서의 말은 내가 상상하지도 못한 방향이었다.

 “두 사람 다 내 뒤를 이어 공작이 되는 건 싫다며 다투었거든.”

 “…예?”

히어로즈 크로니클의 귀족들은 유럽의 귀족을 K-판타지식 작위를 따 온 모양새였다. 판타지나 로맨스 판타지에서 나오는 중국식 오등작에 유럽식 작위를 멋대로 뒤섞은 방식.

그야 뼈대가 된 히로인즈 크로니클이 한국의 모바일 게임이었으니까 당연한 이야기겠지. 공주 기사는 물론이요 온갖 귀족 아가씨들이 튀어나오기 좋은 배경 아니던가.

그러므로 북부 대공 또한 여러 가지 작위를 한꺼번에 가지고 있었다. 너무 길다며 생략했던 자기소개처럼 북부의 대공이자 서리 늑대 기사단장이며 병사들을 이끄는 육군 대장, 장원의 영주이자 북부 산맥의 주인….

 “내 딸들은 외모는 어머니를 똑 닮았는데, 어째 하는 행동거지는 날 빼닮았더군. 정치와 엮이게 될 대공 작위에는 관심이 없다며 서로 다투는 걸 보니 얼마나 머리가 아팠는지.”

따라서 북부 대공이 된다는 것은 드넓은 북부의 주인이 된다는 것을 뜻하지만, 십 수개의 공식 칭호를 달고 정치와 필연적으로 엮이게 된다는 것 또한 뜻한다.

남편을 잃고 권력이 쇠락하여 사교회에서 수다만 떠는 여인들도 정치적으로 수십 명과 엮여 있는데, 북부 대공이라면 얼마나 많은 사람과 엮이게 되겠는가? 앤 웰즐리와 케이티 웰즐리, 북부의 두 자매는 그러한 미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매 중 북부 대공이 된 여인은 정치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정치적인 이유로 남편이 되고 싶은 사람이 수도 없이 접근할 것이며, 북부와 다른 지역의 거래를 위한 정치 외교에도 신경을 써야 하지.

반대로 북부 대공이 되지 않은 사람은 자유롭게 세상을 떠돌 수 있다. 정치적인 칭호는 북부 대공이 전부 가져가기 때문에 서리 늑대 기사단의 부단장이자 북부의 검으로서 정치와 한 걸음 멀찍이 떨어진 자유로운 삶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된 겁니까?”

 “언니인 앤이 제 동생이 자신보다 똑똑하다며 케이티의 성인식 직후 후계자 교육을 받도록 교사를 붙여주려 했지. 앤은 자신이 정치보다는 경제에 관심이 많다며 동생에게 대공 작위를 양보한 다음 북부의 재정을 담당할 생각이었거든.”

 “그리고 케이든, 아니 케이티 양은…?”

 “정치보다는 검술을 익히고 싶다며 검과 갑옷 한 벌 챙겨서 뛰쳐나갔다네. 성인식을 기념하며 가문의 마도구를 살펴보고 싶다고 말하더니, 비밀 금고에서 선조의 갑옷과 변장용 마도구를 챙겨서 그날 밤 바로 뛰쳐나간 거야.”

반쯤 포기했다는 듯 허망하게 중얼거리는 아서의 모습을 보자 마음 한구석이 측은지심으로 물든다. 그 모습이 마치 술 마시고 국밥집에서 우는 어느 가장의 모습처럼 느껴졌기에. 권력 싸움에서 언니에게 밀려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용병단에 들어간 아가씨… 정도를 상상했는데 정 반대라니.

후계자 자리를 강제로 양보하려는 언니와 절대 싫다며 가문의 금고를 털어 가출한 여동생.

북부의 대공이자 두 딸의 아버지로서 머리가 어지럽고 가슴이 착잡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거 참, 캐릭터성 하나는 확실한 두 사람이네.

-이게 후계자 다툼? 먼가 이상한데…

-귀족 아가씨의 정치적 짬때리기 배틀이라니

-북부 대공 얼굴 폭삭 늙은거 봐라 시발 ㅋㅋㅋㅋ

-은발이 아니라 불속성 딸내미 때문에 흰머리 난거였네

-어쩐지 북부대공인데 흑발이 아니더라 마음고생으로 머리가 다 새어버림

 “그래도 뭔가 피비린내 나는 가족 간의 혈투가 아니어서 다행이긴 한데… 케이든에 대한 이미지가 와장창 부서지는 시간이네. 되게 거리를 두길래 냉정하고 차분한, 쿨계열 검사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그 황당한 가문의 속사정에 어질어질한 건 나뿐만이 아닌지 한세아의 방송이 후끈 달아오른다. 딸들의 기묘한 다툼에 속 썩이는 아버지로서는 참 골머리 아픈 상황이지만, 구경하는 사람으로서는 이보다 재미있을 수가 없다.

 “잠깐만, 이러면 나는 케이든의 언니가 무조건 북부 대공이 되도록 밀어줘야 하네? 안 그러면 우리 파티의 든든한 후열 호위 검사 케이든이 북부 대공으로 강제 전직해서 파티를 떠나버리니까. 4★ 캐릭터가 그딴 이유로 날아가면 억울해서 잠도 못 자, 진짜로.”

-그러네 시발 ㅋㅋㅋ 언니한테 잡혀가면 파티 한자리 비어버림

-애초에 남장 푼 모습 보기전에 사라지면 민심 나락가는거 알지?

-아니 먼 ㅋㅋ 등장 NPC도 방송을 아네

-까놓고 말해서 일하기 싫다고 싸우는 백수희망자매 아님?

-북부의 공녀들인데 어째 둘 다 화속성이네 활활 탄다잉

결국, 가슴 아픈 사연을 품고 있는 냉철한 미녀 따위는 없었다. 동생에게 작위를 넘기고 느긋한 삶을 살려는 언니와 덤터기를 쓰기 싫어 가출한 철부지만 있을 뿐.

 “그래서 말인데, 혹시 내 딸이 모험가로서… 재능이 없다든가 하진 않지?”

 “한 명의 검사로서, 그리고 모험가 파티의 전위로서 아주 훌륭합니다. 모험할 때 긴장을 푸는 법이 없고 언제나 동료를 든든하게 지켜주는 데다, 검술 실력에서 기반을 둔 전투 능력도 아주 출중하거든요.”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