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6화 (96/175)

 “…이쪽은 기사단의 의뢰를 수행 중인 모험가 집단입니다. 더 접근하기 전에 신원을 밝혀주시길 바랍니다.”

 “…….”

다른 모험가가 이 숲에 있는 게 아닌 이상, 상대가 인간이라면 일단 우리보다 신분이 높은 게 확정적인 상황. 인기척이 느껴지는 수풀 너머를 향해 외치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커진다.

인기척을 마구 내는 걸 봐선 기습을 할 생각은 없는 것 같고, 이쪽이 말을 걸어서 당황한 것 같은데… 진짜 누구지?

 “흠, 으흠… 잠시 실례하겠네. 숲을 돌아다니다 잠시 길을 잃어서 말이야.”

수풀을 헤집고 튀어나온 것은 곰처럼 커다란 덩치의 남성이었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큰 체구니 어림잡아도 2m는 되지 않을까.

덩치 때문에 나뭇잎이 잔뜩 붙은 값비싼 가죽 코트, 몸으로 밀고 나와서 그런지 잔뜩 헝클어진 짧은 은색 머리카락. 위압적인 얼굴에 뺨부터 목까지 쭈욱 이어진 흉터투성이의 험상궂은 외형까지.

 “아니 무슨, 대륙 중앙의 왕실의 숲에서 북부 대공이 튀어나와…?”

자연스럽게 NPC의 정보를 읽은 한세아가 화들짝 놀라 중얼거린다. 왕국에 10년 살면서 소문도 들어본 적 없는 북부 대공이라는 게 눈앞에 등장한다니, 케이든의 부탁으로 북쪽에 갔어도 북부 대공에 관한 이야기는 한 번 들어본 적 없는데.

…이런 사람이 우리 왕국에 있었어?

북부 대공.

판타지 계열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캐릭터의 유형으로서 말 그대로 북쪽의 대공을 뜻한다. 아무래도 북쪽은 춥고 척박한 땅이라고 묘사가 되다 보니 북부 대공은 그 척박한 땅의 지배자로서 냉혹하고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으니까.

히어로즈 크로니클의 북부는 대충 러시아를 판타지로 스까서 버무린 것 같은 장소. 눈 덮인 산맥이 있고 설원이 있는 척박한 땅이거든. 따라서 곰 대신 등장한 흰곰 같은 북부 대공이 있기에 참 어울린다고 생각된다.

 ‘우리 왕국에 북부 대공이라는 게 있었… 나?’

문제가 있다면 북부 대공의 존재 자체.

얼마 전 케이든의 부탁으로 북부에 다녀 왔을 때도 그렇고, 귀부인들의 수다를 들으며 다양한 정보를 접했음에도 북부 대공에 관한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야 왕국이니까 어느 귀족이 다스리는 게 당연하지만, 그게 북부 대공이라는 이야기는 못 들어봤다고.

신장 2m의 흉터투성이의 은발 벽안 근육질 거한이라니, 사교계의 입 가벼운 아가씨들이 쑥덕대기 딱 좋은 외모 아닌가?

 “요양하러 숲에 들어와서는 잠시 길을 잃어서 그런데… 혹시 길 안내를 부탁해도 되겠나? 귀찮게 구는 하인들을 두고 잠시 산책을 나왔거든. 수상쩍다고 생각된다면 숲 밖으로 나가자마자 바로 기사들을 불러도 좋네.”

 “음, 죄송하지만 저희는 숲 내부를 탐색하는 중입니다. 해가 질 무렵에나 숲 밖으로 나갈 것 같습니다.”

내가 잠시 생각에 빠지는 동안 슬그머니 앞으로 나선 케이든이 거절의 말을 내뱉는다. 딱딱하게 굳은 안색,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와 힘이 꾸욱 들어간 게 옆에서 명백히 보이는 턱까지. 누가 봐도 ‘나 사연이 있어요.’라고 온몸으로 주장하는 모양새였다.

 “숲을 탐색한다 해도 좋아. 내가 좀 심각한 길치라서 말이야, 방해는 하지 않을 테니 조용히 따라다니게 해 주게.”

 “숲이 깊지 않으니 기사들을 불러드릴까요?”

 “허허, 기사단의 의뢰를 진행 중인 모험가들에게 그리 폐를 끼칠 순 없지.”

거기에 더해 이어지는 미묘한 공방까지. 끈덕지게 들러붙으려는 북부 대공과 어떻게든 일행에서 떼어내려는 케이든의 대화에 일행들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한다. 그 사무적이고 냉철하던 케이든이 초대면의 귀족에게 무례하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밀어내고 있었으니까.

 “저어, 케이든 씨? 일단 신원 확인을 위해서라도 저희와 함께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길을 잃으신 분이라면 돕는 게 맞고, 아니라면 침입자를 발견한 상황이니까요.”

그런 두 사람의 말다툼 아닌 말다툼을 중재하는 것은 아이린.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자 북부 대공과 케이든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입을 다문다.

함께 다녀야 한다고 말하는 아이린의 말에 헤벌쭉 웃는 얼굴이 된 북부 대공과 반대로 소태 씹은 얼굴이 되어 인상이 와락 찌푸려진 케이든. 그 격렬한 반응에 중재안을 내놓은 아이린이 되려 놀랄 정도였다.

 “흐하하, 역시 사제님이시군요. 호의를 감사히 받겠습니다.”

 “아, 네. 그게 맞… 죠.”

그렇게 숲에서 곰처럼 튀어나온 북부 대공이 일행에 합류하게 되었다.

지팡이를 들고 앞장서는 한세아와 그 옆에서 오크를 탐색하는 그레이스, 그리고 그 두 명을 호위하는 나. 조금 거리를 둔 채 걸어오며 주변을 살피는 아이린과 그녀를 호위하는 케이든, 그리고 케이든 옆에 딱 달라붙은 북부 대공.

오솔길이 넓지 않다는 걸 생각해보면 저 남자가 뒤에 서는 게 맞긴 하지. 하지만 누가 봐도 케이든에 관심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인 접근이었다. 신장 2m의 거구가 성큼성큼 걷지 않고 보폭을 맞추는 게 뻔히 보였으니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자네의 허리춤에 걸려 있는 그 검, 참 독특하게 생겼군. 한손검 치고는 길쭉한데 특이한 검술을 사용하나 보군?”

 “네.”

그레이스는 열심히 오크를 탐지하고 있지만, 수상함을 느낀 한세아는 카메라까지 뒤에 붙인 채 열심히 케이든과 북부 대공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 덕에 나 또한 한세아의 방송을 통해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볼 수 있었고.

허리춤에 걸려 있는 검부터 입고 있는 갑옷 등 온갖 자질구레한 주제를 통해 어떻게든 이야기를 이어나가려는 북부 대공. 그리고 무슨 질문을 받아도 단답형으로 끊어버리며 대화를 차단해버리는 철벽과도 같은 케이든.

그 요상한 분위기에 사이에 낀 아이린만 안절부절못할 뿐이었다.

 “저 사람이 북부 대공이고, 케이든이 검의 공녀면 부자 관계…. 아니, 남장 중이었지. 부녀 관계인 건가? 분명 서브 퀘스트인데 왜 캐릭터 퀘스트처럼 진행이 되는지 모르겠네. 그나저나 아빠가 5★이고 딸이 4★이면 별수저라고 해야 하나?”

-동료가 남장여자라는 걸 까먹는 지능? 이거 참 짠하네요…

-북부대공인데 왜 털이북실복실한 코트를 안입었을까

-햇볕 내리쬐는 초여름의 숲에서 털코트입고 돌아다니면 미친놈인줄 알고 기사단에 넘길듯

-무슨 사춘기 딸내미한테 말거는 아부지같네

-나이만 보면 늦은 사춘기 맞을지도 모름 ㅋㅋㅋㅋㅋㅋ

시스템 창이 없다면 알 수 없는 정보, ‘북부 대공’과 ‘검의 공녀’라는 호칭 덕분에 한세아와 시청자들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한다.

북부를 담당해야 할 높으신 분이 왕국 중앙에 있는 축복받은 숲에서 툭 튀어 나왔으니 신빙성이 꽤 높을 수밖에 없기도 하고. 거기에 한세아와 시청자들은 주방에 가느라 듣지 못한 제임스의 이야기도 있지 않던가?

어디의 공녀라도 꼬신 거냐, 기사단에 높으신 분이 명령을 내렸는데 정체가 숨겨져 있다―

이런 정보들을 전부 종합해 보면 생각할 수 있는 건 딱 하나뿐이긴 하지. 케이든이 북부 대공의 딸이며, 집 나간 딸을 보기 위해 북부 대공이 몸소 행차해 우연을 가장한 채 접근했다는 것.

 “모험가라고 들었는데, 평소에는 어떤 의뢰를 받는지 이야기를 해 줄 수 있나?”

 “탑에서 몬스터를 잡습니다.”

케이든은 고작해야 용병단 따까리에서 중급 모험가가 된 주제에 축복받은 숲에 들어올 수 있는 고위 귀족을 향해 무례하게 구는 상황이다. 저 퉁명스럽고 단답형인 대답은 상대방이 자신의 아버지라서 나올 수 있는 반응이겠지.

…어라, 그러면 몰락한 귀족 가문의 후계자가 아니라 그냥 가출 소녀인 건가?

몰락한 가문을 부흥시키기 위해 밑바닥에서 기어 올라가는 냉철한 공녀님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낯가림이 심한 가출 공녀님이라니. 머릿속에 정리된 이미지가 너무 확 바뀌니 당황스러울 지경이다.

 “저러면 남장을 한 이유가 아빠한테 안 들키려고 한 건가? 그런데 바로 들켜버려서 우리 파티한테 딸 보려고 접근을 한 거고? 우리 공녀님, 생각보다 덤벙대는 성격이구나. 되게 무뚝뚝하고 냉철해서 똑 부러지는 줄 알았는데.”

-숨겨진 비밀이 가출 시발 ㅋㅋㅋㅋㅋ

-가출 하겠다고 남장 vs 길 잃은 척 가출 딸내미 찾아옴

-이런건 북부 대공이 아니야아아아앗―!

-로판도 먹는 누렁이로서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캐릭터네요

-아니 오크 찾기 퀘스트가 아니라 가출한 딸내미 찾기 퀘스트냐구

대공과 공녀라는 관계 때문에 시청자들 사이에서도 케이든이 가출 소녀라는 의견에 힘이 실린다. 검의 공녀라는 호칭도 있고, 고장이 난 마법 갑옷도 챙겨 나온 상태니 뭔가 배경 스토리가 있긴 하겠지.

하지만 남장 여자 가출 아가씨라는 단어의 조합은 일단 사람들을 웃게 만들기에는 차고도 넘쳤다. 시청자들의 뇌리에는 이미 딸바보 팔불출 북부 대공과 철없는 가출 소녀 케이든으로 이미지가 굳혀진 것 같네. 물론 내가 봐도 그 의견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가까웠다.

북부 대공의 딸이 아니라 다른 공작의 딸이면 이렇게 직접 보러 올 이유가 없잖아. 애초에 마법 갑옷의 수리 재료가 싸그리 북쪽 필드에서 나오는 것만 봐도 북부 가문의 갑옷이라는 걸 증명하는 것 같고.

나와 한세아, 그리고 만 단위의 시청자들의 시선을 느낄 리 없는 두 부녀가 티격태격 정다운 대화를 나눈다.

 “자네는 모험가로서 이루고 싶은 꿈이 있는 건가?”

 “저는 탑을 오를 겁니다.”

 “흐음, 탑을 오른다… 모험가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은 건가? 참으로 원대한 꿈이긴 하군.”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계속해서 딸내미에게 말을 거는 북부 대공, 세 마디 이상 이어서 말하지 않는 케이든, 그리고 그사이에 껴서 안절부절못하는 아이린까지. 심지어 그레이스도 뒤에서 벌어지는 일이 신경 쓰이는지 슬금슬금 고개가 움직인다.

사정을 모르는 그레이스와 아이린이 보기에는 케이든이 처음 보는 귀족에게 대놓고 눈치를 주는 것 같겠지.

 “오늘은 여기까지 탐색하고, 슬슬 숲 밖으로 나가면 될 것 같은데. 저분도 밖으로 안내해야 하니까.”

 “네.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니니까요.”

아이린이 불쌍해 보였는지 탐색의 중단을 이야기하는 한세아. 그녀의 말에 두 부녀의 사이에 낀 아이린이 화색이 되며 고개를 열렬히 끄덕거린다.

숲을 관통해버릴 생각은 없는지 슬쩍 방향을 꺾어 왔던 길과 비슷한 방향으로 일행들이 나아가는 중에도 부녀의 대화는 끝나지 않는다. 검, 갑옷, 우리 일행들, 모험가의 도시와 탑, 길드와 의뢰, 숙소와 관련된 이야기까지.

 ‘그나저나 말 진짜 많네.’

누가 봐도 명백한 딸바보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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