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보니 한세아를 놀리는 게 왜 이리 재미있나 했더니, 내가 기사단 놈들한테 당하던 과도한 칭찬 세례와 닮아 있어서 그렇구나. 플레이어인 한세아가 인벤토리 기능으로 천재 취급을 당하든, 빙의자인 내가 롤랑의 근육질 육체로 극한의 노력파 취급을 당하든 똑같이 부끄러울 뿐이니까.
“오오, 이게, 무슨…?”
“어때요, 대단하죠?”
“정말 대단한데! 저 마법이 널리 퍼진다면 보급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되겠어. 이봐, 롤랑! 어디서 저런 마법사를 찾아온 거야?”
지금껏 봐 왔던 반응 중 가장 격렬하게 호응하는 제임스의 모습에 한세아의 양 뺨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좌청룡 우백호도 아니고 좌그레이스 우제임스가 양옆에서 천재, 혁신, 보급의 여신 따위의 단어를 내뱉기 시작했거든.
보급의 여신이라니, 제임스 이 새끼는 수도에서 음유시인이랑 놀아나더니 낯간지럽고 느끼한 말에 너무 익숙해졌단 말이지.
그 느끼하기까지 한 찬사에 바르르 떠는 한세아가 시청자들의 엄호 사격에 더는 버티지 못하고 후다닥 주방으로 뛰어 들어간다. 물론 도망쳐봐야 콩깍지가 단단히 씐 그레이스에게는 천재 마법사의 겸손함에서 비롯된 부끄러움으로 보일 뿐.
“한나는 가진 재능과 능력에 비해 좀 소심한 것 같아. 저 정도 마법이면 뽐내도 무방할 텐데.”
“마법을 딱히 자랑하고 싶지 않나 봐.”
“겸손을 아는 마법사라, 참 좋은 동료를 찾았구나 롤랑.”
“두 분, 대화 나누세요. 저는 식재료 정리를 도와주러 가야겠네요.”
그렇게 마지막까지 한세아의 등 뒤에 데미지를 꾸역꾸역 욱여넣은 그레이스가 아이린과 함께 주방으로 쪼르르 향한다. 자연스럽게 남게 된 것은 나와 제임스, 그리고 정신을 어딘가에 맡겨두고 온 케이든.
공녀라는 단어 두 글자를 들었다고 그 무뚝뚝한 케이든이 테이프 붙은 고양이처럼 고장이 나 버렸다. 되게 냉철한 줄 알았는데 그냥 사람 대하는 게 서툴렀던 걸까?
“아, 그리고 막사의 샤워 시설은 개인용이 아니라 단체용이니 일행들이랑 상의 잘하고 사용해라. 같이 들어가고 싶은 사람이 있어도 좀 참아주고. 여기 방음용 마도구는 없어.”
“…같, 이 말씀입니까?”
“그래. 여자 셋 남자 둘이니까 너희 둘이서 같이 씻으면 되겠네. 이전에 왔던 손님들은 워낙 뜨거워서 그런지 밤에 침대 삐걱거리는 소리도 들리더라. 여기 침대가 그리 고급스럽진 않거든.”
가벼운 음담패설에 얼굴이 시뻘겋게 변하는 케이든을 보고 제임스가 크캬캭 시끄럽게 웃는다.
무뚝뚝하고 냉철한 게 아니라 그냥 사람 대하는 게 서투른 건가…?
케이든의 남장은 참으로 감쪽같다.
짐승 같은 감각의 소유자 레베카, 상급 모험가 롤랑, 고위 기사 제임스 등 다양한 인물들이 그녀의 남장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다. 목울대부터 골격에 체형, 피부와 목소리 등 모든 것이 완벽히 남성의 것이라고 해야 하나.
솔직히 말해서 남장이라기보다는 판타지 소설에 나올법한 폴리모프? 같은 마법에 가깝다고 봐야겠지. 정작 마력조차 느껴지지 않아서 마법을 통한 변장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었지만.
그러다 보니 여자 멤버들이 전부 주방으로 향했다고 음담패설을 내뱉기 시작한 제임스는 평소대로의 모습인 거지. 여자 앞에서 음담패설을 내뱉는 놈은 아니지만, 남자끼리 있다면 스스럼없이 이야기할 녀석이니까.
“숲 내부로 들어가는 건 허가가 나지 않아도, 신성력을 받기 위해 검문 부대 내부에 오는 귀족은 가끔 있거든. 허리가 좀 약해진 늙은이들이 오는데 여자를 데리고 오는 경우가 있어서 곤란하지. 한창 혈기왕성한 놈들이 잔뜩 있는데 앙앙거리는 소리가 막 나면….”
“저, 저도 짐 옮기는 걸 도우러 가겠습니다.”
아무래도 멍하니 있다가 얼굴이 벌게진 케이든을 동정에 숙맥인 신병처럼 생각한 것인지 말이 짓궂어지는 제임스. 모험가와 관련된 업무를 맡고 병사들과 직접 부대끼는 놈이다 보니 어쩔 수 없나.
음흉하게 웃어 보이며 허리까지 앞뒤로 흔드는 모양새는 기사가 하기에는 너무 추한 행동이지만… 그래도 할 때는 하는 놈이다. 능력이 있으니까 고위 기사까지 올라간 거지.
그래도 근육 마초가 허리를 꿈질거리는 모습이 추한 건 어쩔 수 없다. 그 흉측한 움직임에 더는 버티지 못하고 케이든이 도망을 칠 정도. 사실 내가 보기에도 역겨웠으니 여자인 케이든이 참기에는 힘들었겠지.
“흠, 너무 심했나? 듣기로는 용병 출신이라길래 좀 가까워지려고 한 건데. 용병치고는 참 순수한 소년이네.”
“친해지려고?”
“원래 남자끼리는 야한 이야기를 하면서 친해지는 거야. 병사들이랑 편하게 지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냐.”
명백하게 분위기를 못 이기고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는 케이든의 모습에 멋쩍게 웃어 보인 녀석이 슬쩍 다가온다. 제 딴에는 호의를 표하는 접근법이었나. 남중 남고 군대 공대 테크트리 비슷하게 모험가-군대-기사단에 얽힌 근육 마초답다고 해야 하나.
한세아의 방송 창을 흘낏 쳐다보니 인벤토리를 가지고 열심히 놀려먹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케이든이 합류해서 이런저런 추측이 나오고 있는 상황. 카메라가 주방에 있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한 뒤 제임스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 이야기한 공녀 관련된 거, 농담이냐 짚이는 게 있어서 꺼낸 이야기냐?”
“반반이라고 할 수 있지. 명령이 내려오긴 했는데 어디서 내려온 명령인지는 뭉개져 있어. 고작 모험가에게 오크 탐색 의뢰를 하는 게 기밀 임무처럼 빙빙 돌려서 내려왔다는 거야. 기사단에 그런 식으로 명령할 수 있다는 건….”
“확실하게 높으신 분의 입김이 끼어들었다는 거네.”
머쓱하다는 듯 뒷머리를 벅벅 긁은 녀석이 주저 없이 대답한다. 가볍고 경박해 보이는 데다 뇌까지 근육이 찬 녀석이지만 이런 거로 헛소리를 할 녀석은 아닌데… 진짜 캐릭터 퀘스트가 서브 퀘스트와 연동이 된 상황인가?
한세아의 퀘스트 창은 그녀가 방송 창에 시스템 창을 공개해야 볼 수 있으므로 추측밖에 할 수 없는 상황. 고민해 봐야 명확한 정답을 찾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는 게 없는데 고민해서 뭐 하겠냐. 아무튼, 정보 고맙다.”
내 말에 그럴 것 같았다며 씩 웃어 보이는 제임스의 얼굴이 조금 열 받기는 하네.
※
병영 내부에서의 하룻밤은 아무런 일 없이 빠르게 흘러갔다.
한세아는 침대에 머리를 대는 순간 게임이 저장되며 다음 날 아침 눈을 뜰 것이고, 마차 여행으로 피곤한 일행들은 의뢰를 위해 조용히 잠자리에 들었다. 나야 뭐, 푹신한 침대에 누워 인터넷 삼매경에 빠져 있었고.
축복받은 숲에서 흘러나오는 신성력을 담당하는 군 부대답게 싸구려 침대에 대충 지은 건물이지만 안락함이 느껴진다.
“…다들, 좋은 아침.”
“네에, 좋은 아침이네요. 여신님의 은총 덕분인지 몸이 가벼워요.”
그 덕에 아침 일찍 일어난 일행들에게선 한 점의 피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볼 수 있는 건 무방비하게 드러난 미인들의 뽀얀 피부뿐. 숙소에서 갑옷을 입고 지낼 리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물론 피부가 드러난다고 해 봐야 평범한 셔츠 차림이지만 평소 가죽 갑옷이나 수녀복 따위로 완전 무장을 했을 때 보다 가벼운 차림이지만 고작 그것만으로도 흥분해 날뛰는 채팅창의 시청자들.
-예비성녀의 성이 性이라는 데 한세아의 오른손목을 건다
-이게 진행도 세계 1위의 품격이지
-어제 그 근육몬이 걱정 할 만 하네 군부대에 저러고 돌아다니면 ㅋㅋ
-서브퀘 한 번 하겠다고 3일… 탑 고층 존나 무서워지는데
-신은 한반도에 존재했고 히어로즈 크로니클을 스트리밍중이다
팔뚝 좀 드러나고 셔츠 덕분에 몸의 굴곡이 가려지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신을 찾으며 감사 인사를 올리는 주접이 볼 만 했다. 5분 전, 그러니까 내 기준으로는 어젯밤까지만 해도 인붼퉈리~ 하면서 한세아를 놀려 먹던 놈들이라 더 재밌네.
숙소에서 내려와 가볍게 씻은 일행들이 길드 테이블에 모이듯 식당의 테이블에 모여 앉았다. 아침부터 거창하게 먹을 건 없으니 어제 끓였던 스튜를 다시 데워 가볍게 배를 채우고 의뢰 이야기를 시작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빠르게 그릇을 비운 그레이스.
“오늘부터 숲을 탐색하면 되는 건가?”
“그래. 이야기를 들어보니 병사들은 숲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 같아.”
“숲, 꽤 넓어 보이던데… 오래 걸리겠군요.”
대화가 시작되니 다들 한 두 마디씩 던지기 시작한다. 대체적인 감상은 고작 다섯이서 탐색하기엔 숲이 너무 넓다는 점. 하기야 탑의 숲은 통로를 찾으면 끝이지만, 여기서는 오크의 흔적을 찾아야 하니 느낌이 좀 다르지.
“그런데 오크가 없다는 걸 증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그러네요. 숲의 모든 장소를 돌아볼 순 없을 텐데….”
그 점이 사뭇 걱정스러운지 이야기를 계속 나누는 일행들. 중간중간 내게 호기심 가득 담긴 눈빛을 보내오지만, 이 경우에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없다. 그야 그럴게 오크 탐색은 서브 퀘스트니까 퀘스트 완료는 한세아의 몫이잖아.
한세아가 방송에 제대로 보여주지 않은 퀘스트 창에 진행도 따위가 있지 않을까. 미니맵도 있고 퀘스트 창도 있으니 알아서 할 수 있겠지.
“그야 뭐, 오크가 머무를 수 있을 법한 장소에 한나가 마법으로 표식을 남긴다든지 여러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지. 어때, 한나? 가능하겠어?”
“아, 음, 가능할 것 같아. 마, 마력으로 쐐기를 박아두면 체크할 수 있을 것 같아…?”
저저, 눈동자 굴러가는 거 봐라.
그래도 퀘스트 창에 오크 탐색에 대한 힌트나 진행도 따위가 나타나긴 하는지 말을 더듬긴 했어도 자신 있게 오크를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하는 한세아. 그 모습에 다 먹은 그릇을 치우던 그레이스와 아이린이 부드럽게 미소짓는다.
파티의 리더가 능력이 좋아서 일행들이 가장 걱정하던 부분을 완벽히 처리할 수 있다고 장담하니 기쁠 수밖에. 뭐, 믿음직스러운 리더를 바라보는 눈빛이 아니라 어린 동생이 심부름 성공하는 걸 바라보는 언니의 눈빛에 가깝긴 한데… 저것도 인망이라고 볼 수 있으니 상관없겠지.
“식사도 끝났으니 다들 장비 챙겨서 나갈 준비를 하자. 아마 며칠 걸릴 것 같은데 신성력 듬뿍 받아간다 생각하자고.”
“알겠어, 챙겨서 건물 입구로 나갈게.”
시청자들의 절규를 뒤로하고 장비를 챙겨 건물 입구로 모이는 일행들. 건물 바깥으로 나오자 역시나 병사들의 시선이 다시 몰려든다.
일행들이 미녀라서 모인 시선도 있지만 축복받은 숲을 관리하는 병사들이다 보니 아이린에게 인사를 하는 병사가 꽤 많네. 여신의 은총을 곁에서 보는 사람들이니 종교에 푹 빠져들 수밖에 없겠지.
그렇게 갑옷을 차려입고 장비를 점검한 뒤 숲으로 향하려 들자 우리 쪽으로 후다닥 뛰어오는 병사 한 명. 우리 파티원들이 부지런해서 당황했는지 흐트러진 모습으로 헐레벌떡 달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