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화 (93/175)

 “온종일 마차를 타느라 피곤하신 것 같은데, 올라가서 쉬는 건 어떨까요? 식사는 방으로 보낼 수 있으니까요.”

탁자 위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는 눈동자, 쉴 새 없이 꼼지락거리는 손가락, 평소와 달리 힘없이 벌어진 입술까지. 공녀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창백해진 케이든의 모습이 마차 여행의 후유증이라 생각하는 아이린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평소의 케이든이라면 괜찮다며 묵묵히 자리를 지키겠지. 하지만 수상할 정도로 공녀라는 단어에 크게 반응한 케이든이 고개를 살며시 끄덕인다.

 “먼저, 올라가서 조금 쉬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케이든이 비틀비틀 계단 위로 사라진다.

고기가 듬뿍 들어간 따스한 스튜로 배를 채우고 침대에 누워 웹 서핑을 하기를 한참. 날이 밝아오고 마부가 마차를 다시 준비한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네. 하루 푹 쉬었더니 괜찮아졌습니다.”

수프로 가볍게 배를 채우는 동안 아이린이 케이든의 곁에 착 달라붙어 섬세하게 돌봐주기 시작한다. 워낙 사무적이고 말이 적은 케이든이다 보니, 아픔과 피로를 내색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말 안 듣는 아이를 돌봐주듯 케이든의 곁에 달라붙는 아이린. 남장을 한 상태여서 그런지, 이토록 가깝게 다가오는 사람이 처음인지 조금 당황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두 여인이 분위기를 훈훈하게 만드는 동안―

 “롤랑! 마차에서 내려 같이 뛰지 않겠나?”

 “미쳤나, 진짜.”

나의 사생팬 1호이자 뇌까지 근육에게 침범당한 제임스는 열심히 내 곁에 달라붙으려 하고 있었다.

모험가의 도시에서 수도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이틀. 이 역참이 거의 중간쯤에 세워져 있으니 남은 거리는 발로 뛰어서 가자는 게 정상적인 사람의 의견은 아니지 않나. 마차가 딱 우리 일행을 태울 크기인지라 못 타는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뛰어서 가자니.

 “난 편한 게 좋으니까 너 혼자서 뛰라고.”

 “말은 그렇게 해도 늘 편안한 길로 가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다! 너의 그 완벽한 육체가 그 증거!”

 “어우, 씨발.”

그거야 튼튼한 몸을 믿고 무식하게 다녔을 때의 이야기고. 지금은 마차에 느긋하게 앉아 인터넷 창으로 밀린 동영상을 봐야 한다고. 온갖 게임 공략 방송부터 내가 모르는 비디오 게임 풀 영상까지 봐야 할 게 얼마나 많은데.

잘 닦인 도로를 달리는 마차와 마차를 이끄는 말 옆에서 나란히 달리는 근육질의 거한.

참으로 기괴한 모습으로 우리는 역참을 떠나 수도 인근의 축복받은 오베르뉴 숲으로 향했다. 방음 처리가 된 마차의 벽 너머로 다각다각 말발굽 소리와 함께 쿵쾅거리는 묵직한 사람 발소리까지 들리니 인터넷 창을 보면서도 신경이 쓰이네.

물론 마차는 우리 일행을 위해 준비된 상태인지라 근육 덩어리 제임스가 탈 자리는 없었다. 저 부담스러운 근육맨을 딱히 태워 주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그렇게 말과 사람이 나란히 달리는 기괴한 여정이 이어진다.

 “저어, 도착했습니다.”

 “흐음,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네.”

그 덕에 여행길 내내 부담스러웠는지 안색이 미묘해진 마부가 마차 입구를 똑똑 두드려 도착 사실을 알린다. 기사단에 고용될 정도로 숙련된 마부지만 인간과 마차가 나란히 달린 경험은 없겠지.

아무 생각 없이 공원에서의 버드 피딩 영상을 보며 시간을 낭비하니 기분이 확실히 상쾌해졌다. 그리 생각하며 마차에서 가장 먼저 내리자 눈앞에 보이는 넓디넓은 숲.

축복받았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고 싶은 것인지 겉으로 보기에도 탑의 숲과는 비교할 수 없이 찬란하고 아름다운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울창하게 솟아올랐음에도 햇볕이 아름답게 내리쬐는 숲은 마치 나무 하나하나를 관리한 것 같은 모양새였으니까.

[한세아 님의 방송이 시작되었습니다!]

[한세아_두근두근! 축복받은 숲에서의 서브 퀘스트]

 “우와… 밖에서 보기만 해도 감탄이 나오는 숲이네.”

 “여기까지 따스함이 느껴지다니, 참 좋은 숲이긴 하네.”

그 뒤를 따라 내리는 건 슬그머니 방송을 시작한 한세아와 그레이스. 뒤이어 케이든과 아이린도 내려 다 같이 숲을 바라보며 감탄성을 내뱉었다. 숲 초입에 세워진 검문소 비슷한 공간에 마차가 멈춰 선 상황이지만, 코끝을 간질이는 상쾌한 공기가 머리를 시원하게 만들어 줬기 때문이다.

왕실 소유의 숲답게 아무나 들어갈 수 없도록 숲 주변을 군부대 비슷한 걸로 둘러싼 것처럼 보인다. 하기야 이렇게 숲 주변까지 신성력이 새어 나온다면 통제할 만하네.

 “의뢰를 받은 모험가 한나 양의 파티, 도착했습니다.”

 “확인했습니다. 이쪽으로… 제임스 기사님?”

 “어, 그래. 검문하느라 수고하는 데 안내는 내가 해 줄게.”

 “어, 알겠습니다. 그런데 마차랑 같이…, 오신 겁니까?”

마차 앞에 옹기종기 모여 일행들과 함께 신선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고 있으니 기다란 장창을 쥔 병사들이 마차 쪽으로 다가와서는 화들짝 놀란다. 마차에서 내린 것도 아니고 그냥 뒤에서 툭 튀어 나왔으니 놀랄 수밖에.

병사들도 사람이 마차랑 같이 뛰어다니는 기행에 익숙하지는 않은지 말을 더듬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아무래도 제임스가 타고 온 말을 찾으려는 것 같은데… 두 발로 뛰어왔다는 걸 인정하지 못한 건가.

이상하다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병사들을 뒤로한 채 군부대 비슷하게 생긴 숲의 검문소 내부로 쏙 들어가는 제임스. 그 뒤를 따라 내부로 들어가자 간이 건물들이 잔뜩 있는 게 진짜 군부대를 떠오르게 만든다.

-어우 시발 짬내난다

-서브 퀘스트를 깨러 논산으로 갔네

-시발 이세카이 군부대를 보게될줄이야 ㅋㅋㅋ

-숲으로 간다더니 숲에 있는 군부대를 가네

-방송 시작하자마자 검문중인 헌병이 나오는데 머임?

병사는 군인, 기사는 간부.

입구에서 검문 중인 병사들과 이야기하며 설렁설렁 넘어가는 제임스의 꼴이 출입 절차 무시하고 부대로 들어가는 군 간부 닮아서 그런가? 시청자들도 방송이 시작하자마자 짬 냄새가 난다며 우는소리를 한다.

그 우는 소리의 목적이야 뭐, 뻔하지. 시커먼 사내놈들 보여주지 말고 어여쁜 여캐를 보여달라는 투정 아니겠는가. 검문소의 내부를 한 바퀴 대충 훑어본 카메라가 마차에서 내려 몸을 풀고 있는 그레이스와 아이린에게 돌아오자 환호성을 내뱉는 꼴일 뻔하디뻔하다.

 “이쪽으로 와, 롤랑. 슬슬 해가 지니 오늘은 여기서 묵고 가야 할 거야.”

 “하긴, 애매하게 일찍 도착했네.”

 “지금부터 탐색하기엔… 확실히 숲이 좀 넓네요.”

제임스의 말에 좌에서 우로 느긋하게 고개를 돌리며 숲을 바라보는 그레이스가 곁에서 작게 중얼거린다. 무슨 수평선이나 지평선이 펼쳐져 있듯 고개를 최대한 돌려도 시야가 숲의 나무로 꽉 차 있는 수준.

아무리 왕성 인근의 숲이라 해도 오크들이 몰래 숨어들어서 부락을 건설하려고 시도하는 넓은 장소다. 늦은 오후부터 탐색을 시작하면 밤을 꼴딱 새워도 시간이 모자라지.

 “어제오늘 이틀 연속으로 마차를 타고 모험가의 도시에서 왕성 근처의 숲까지 달려온 상태야. 특이 사항은 없… 다기보다는 길 안내를 하는 저 기사가 롤랑의 지인이고, 마차랑 나란히 달리는 근육 마초라는 점?”

-갑자기 술마시고 방송함?

-롤랑 친구 근육 마초가 마차를 끌었다고?

-마차를 같이 탄게 아니라 마차랑 나란히 달렸다는 게 먼 소리여

-캐릭터 하나는 확실하네 시발 ㅋㅋㅋㅋ

-방송 끈 사이에 무슨일이 벌어진건데

터벅터벅, 병사들의 열렬한 시선을 받으며 부대 내부로 진입한다. 숲이 워낙 넓어 기사단에 더불어 일반 병사들까지 있다 보니 진짜 군부대랑 다를 게 없구나.

여기사가 있다지만 그 수는 소수. 부대 내부에 있는 건 별 하나 붙어 있지 않은 평범한 병사들이다. 시커먼 남자들만 있다 보니 미녀 집단인 우리 일행에게 시선이 쏠리는 건 당연한 흐름.

그래도 왕실 인근의 축복받은 숲을 지키는 병사들이다 보니 군기는 확실한지 열렬한 시선을 보내올 뿐 별다른 일은 없었다. 여기가 무슨 당나라 군대도 아니고 기사가 인솔하는 모험가에게 일개 병사가 시비를 걸 리 없지.

 “이 막사를 사용하면 돼. 손님맞이를 위해 관리를 한 장소니 건물 내부의 시설은 마음껏 사용하고. 식사를 준비할 수 있는 주방이 있긴 한데, 원한다면 식당으로 와서 함께 식사해도 좋아.”

 “준비해 둔 식량이 있으니 식사는 우리가 해결할게.”

뜨거운 시선을 받으며 향한 곳은 이 층짜리 목조 건물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나무로 만든 컨테이너 생활관처럼 생긴 주제에 화덕과 침실, 샤워실까지 구비되어 있는 멀끔한 건물. 손님용이라는 게 빈말은 아니었는지 깔끔하게 정리된 내부에 일행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주변을 돌아다니는 게 전부 병사들이다 보니 군용 텐트 따위에서 자게 될까 봐 조금 걱정을 한 모양이다.

 “식량이 있어?”

 “우리 마법사가 실력이 좀 뛰어나거든.”

제임스의 질문에 나는 자연스럽게 한세아의 인벤토리를 언급했다. 일종의 무조건 반사라고 해야 할까, 인벤토리로 놀려 먹는 게 왜 이렇게 재미있는지 모르겠네. 또다시 시작된 한세아 띄우기를 눈치채버렸는지 슬그머니 뒤로 빠져 침실로 향하려는 한세아.

하지만 한세아 천재 마법사 설을 굳건히 지지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지. 소매치기를 붙잡는 경찰처럼 자연스럽게 한세아의 팔을 휘감은 그레이스가 활짝 웃으며 한세아를 재촉한다.

 “한나! 준비도 할 겸 주방에 식재료를 꺼내 놓는 게 어때?”

 “아, 언니….”

 “아공간 마법인 인.벤.토.리.에서 저녁거리를 미리 꺼내 놓자.”

한세아가 아니라 제임스가 들으라는 듯 인벤토리 네 글자를 또박또박 끊어서 발음하는 그레이스의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나온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