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력이 약한 저 두 사람이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것만 봐도 마차가 얼마나 좋은지 알 수 있지.”
도시에서 수도로 가는 길이 아무리 포장이 잘 되어 있다 해도 결국은 중세 판타지의 대로변이다. 하다못해 현대의 아스팔트 도로도 차량이 덜컹거리는 구간이 있을 텐데 중세의 도로를 마차로 달리면 흔들리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지루한 마차 여행 도중 꿈나라로 떠나버린 그레이스와 아이린은 서로에게 기댄 채 새근새근 잘도 자고 있으니 마차가 얼마나 고급품인지 알 수 있었다.
“하긴, 언니들 되게 편안하게 자네. 나도 한숨 잘까….”
축복받은 숲 이야기에서 고급 마차 이야기까지 흘러버린 잡담. 다시 조용해진 마차 안에는 색색거리는 자그마한 숨소리만이 울려 퍼진다. 그렇게 멈추는 일 없이 굴러갈 것 같던 마차가 조용히 발걸음을 멈춘다.
자장가처럼 작게 뭉개져 들리던 말발굽 소리가 잦아들고 살짝 덜컹거리며 멈춰 선 마차. 그 흔들림에 예민한 그레이스가 먼저 눈을 뜨자 똑똑- 마차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모험가분들? 역참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밤은 이곳에서 묵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손님을 모시고 강행군을 할 생각 따위 없다는 듯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마차가 멈춰선 곳은 커다란 마구간이 있는 여관. 기사단이 사용하는 장소인지 특이하게도 다른 손님들은 하나 없이 깨끗하기만 한 건물이 우리를 반긴다.
깨어 있던 케이든과 내가 내리자 뒤이어 내리는 한세아와 그레이스, 아이린. 신선한 공기를 폐부에 가득 채우며 기지개를 켠 그녀들이 건물 안으로 쏙 들어간다.
“어서 오세요, 모험가분들. 위층으로 올라가시면 방이 전부 비어있으니 편하실 대로 사용하시면 됩니다.”
바깥은 텅 비어있고 손님 하나 없다지만 내부는 관리를 위함인지 세 명의 여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한 명이 요리하고 두 명이 건물을 관리하는 건가.
해가 어둑하게 졌다지만 그레이스와 아이린은 마차에서 푹 잠을 잔 상태다 보니 방에서 쉴 필요는 없어 보이네. 그리 생각하며 1층의 테이블에 앉자 일행들도 우르르 몰려와 2층으로 갈 생각도 없이 테이블에 앉는다.
“날도 어둑해졌는데 바로 식사부터 할까.”
“그거 좋지!”
“…음?”
밥부터 먹자는 말에 익숙하지만 별로 듣고 싶지는 않던 목소리가 들려온다. 왕국 기사단과 엮였을 때 어쩐지 불안하더라니. 분명 여관을 관리하는 건 세 명의 여자들이었는데 갑자기 들려온 낯선 남자의 목소리. 일행들의 목이 홱 돌아가 갑작스럽게 대화에 끼어든 불청객을 확인한다.
앉은 상태에서 목이 아플 정도로 올려봐야 할 거구의 남자.
왕국 기사단 소속의 기사이자 모험가와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는 남자.
“이야, 롤랑! 정말 오랜만이군, 술이나 한잔할까?”
“아니, 그건 좀….”
그리고, 나의 부담스러운 아저씨 팬 1호.
모험가 중에서도 내게 반한 사람이 많은 것처럼 기사 중에서도 나를 기꺼운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꽤 많았다.
신전의 사제들이 타락하지 않고 신앙심을 지키는 것과 같이 대부분의 왕국 기사들은 기사도와 명예를 숭상하며 동료애를 중요시하는 땀내 나는 근육 마초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커다란 덩치와 선명한 근육질에서 호감을 사고, 동료를 버린 적 없는 모험가여서 인정을 받은 상태. 문제가 있다면 뇌까지 근육 단련을 한 기사들이 너무 끈적하게 달라붙는다는 점일까.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그다지 사명감이 투철하지도, 영웅적인 면모가 있는 것도 아니다. 애초에 군필 복학생이 여캐에 미쳐 매크로 돌리다 이세계 빙의를 했는데 영웅적인 면모 따위가 있을 리 없잖아.
내가 다치지 않는 선에서, 내가 손해 보지 않는 선에서 이것저것 했는데 몸뚱어리가 6★ 사기캐여서 ‘다치지 않는 선’이라는 게 남들보다 훨씬 멀리 있었을 뿐.
“그래서 말이야, 그때 롤랑 저 녀석이―!”
“설리반, 늘어난 게 검술 실력이 아니라 수다 실력이야?”
“근육도 확실히 늘었다고, 봐! 그리고 제임스라고 부르라니까.”
“이름으로 부르기 싫어, 부담스럽다고.”
“하하! 수줍어하기는.”
하지만 그런 사실을 모르는 저 근육 덩어리들은 나를 세상에서 제일가는 의리남 따위로 생각하고 끈끈하게 들러붙으려 드니 조금 고통스럽다. 악의를 가지고 비난을 한다면 무시하겠지만, 온갖 호들갑을 떨며 칭찬을 하니 쪽팔려서 뒤질 것 같다고.
거기에 더해 수도의 미망인, 귀부인들과 뜨거운 밤을 보낼 때마다 ‘여자를 아는 진짜 남자’ 따위로 추앙을 하니 창피함은 배가 된다. 그레이스의 옆에서 내 모험담에 과장 90%를 첨가하는 모습을 보니 머리가 다 아프네.
팔뚝을 드러내며 알통을 자랑하는 녀석. 확실히, 아이린 머리통보다 저놈 팔뚝 알통이 커다란 수준이니 자랑할 법하네. 내 육체가 그리스 조각상 같은 육체라면, 저놈은 헐크 미니어처 같은 육체다.
“의뢰에 대해 말해줄 게 있어서 여기까지 온 거냐?”
“엉? 그렇지.”
“뭐야, 대답이 왜 그래.”
“사실 별로 말해줄 건 없는데 술이나 한잔하려고 뛰어왔거든.”
“…뛰어왔다고?”
“고작 마차 타고 하루 거리인데 뭐. 땀 좀 흘릴 겸 아침부터 달려와서 씻고 기다리고 있었지.”
어쩐지 마구간이 비어있는데 이 새끼가 있더라.
그래도 의뢰에 대해 설명을 할 생각은 있는지 주접부리며 근육을 과시하다 말고 제대로 테이블에 앉는 제임스 설리반. 열혈 근육 마초는 늘 상대하기 피곤하다는 걸 또다시 깨우치게 하는 행동거지에 벌써 피곤함이 몰려든다.
과장 잔뜩 섞인 내 무용담을 듣던 일행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자 씨익 웃어 보이는 녀석. 저래 보여도 입담은 좋아서 설명 하나는 잘한단 말이지. 괜히 모험가 담당 업무를 맡은 게 아니다.
“일단, 대외적인 의뢰는 오베르뉴 숲에 있을 오크 탐색이야.”
“대외적이라는 건?”
“롤랑, 일단 한 번 물어보겠는데… 마지막으로 수도에 들렀을 때 무슨 일 없었지?”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야.
대놓고 숨겨진 사정이 있다는 듯 말하는 제임스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한다. 아니, 마지막으로 수도에 들렀을 땐 한세아가 이 세상에 접속하기 전이라 별로 기억에 남는 게 없는데.
평소대로 의뢰를 끝마치고 보상을 핑계 삼아 귀족 부인의 침실에 슬그머니 기어들어 가는 일 말고는 없었다. 짐작이 가는 게 전혀 없어 눈동자만 굴리는 내 표정을 보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녀석.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마. 기사단에서도 이번 의뢰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지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니까.”
“이상하다는 건, 역시 모험가에게 의뢰를 맡긴 게 이상하다는 거냐?”
“그렇지. 솔직히 말해서 오베르뉴 숲의 탐색이라면 우리 기사단이 맡는 게 맞아. 아무리 바쁘고 일손이 없다 해도 여신님의 축복을 받은 숲이라고. 다른 업무를 미뤄두더라도 기사들을 차출할 명분이 있는데… 굳이 모험가 파티를 지목했으니까.”
제임스의 묵직한 목소리에 일행들이 그건 맞다는 듯 저절로 고개를 끄덕거린다. 어디 평범한 귀족 가문의 장원도 아니고 왕족의 축복 받은 숲에, 고작 오크를 잡기 위한 의뢰라니 수상하긴 하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딱히 짚이는 점은 없었다. 내가 건드린 귀부인들이라 해도 정치와 권력에서 밀려나 사교회에서 수다를 떨며 외로움을 참아내는 여인들. 오베르뉴 숲에 모험가를 집어넣을 정도의 권력을 지닌 사람은 없었으니까.
“뭐, 어디서 그런 이야기가 시작되었는지 모르는 데다 정말 의뢰가 너희 쪽에 가버렸지만 나쁜 건 아니지. 기사단에 있는 녀석 중 네 실력을 아는 놈들이 꽤 있기도 하고.”
“이야기만 들어보면 나쁠 건 없겠네. 우리는 예정대로 숲을 탐색하고 오크를 처리한다.”
“그야 그렇지. 그나저나 롤랑, 이 죄 많은 친구야. 설마 지난번 수도에 왔을 때 너도 모르는 사이 어느 공녀님이라도 하나 꼬신 건 아니겠지?”
“갑자기 무슨 공… 녀?”
뜬금없는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눈동자가 케이든을 향해 굴러갔다. 공녀, 검의 공녀 케이든이 우리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듣고 있잖아. 나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듣던 한세아 또한 눈동자가 대놓고 케이든을 향해 돌아간다.
다행인 점이라면 케이든의 시선은 제임스에게 못 박혀 있는지라 우리 두 명의 수상한 반응을 눈치를 채지 못했다는 것. 거기에 더해 제임스 이 둔하기까지 한 근육 덩어리는 눈치가 더럽게 없어서 그런지 껄껄 웃으며 화제를 엉뚱한 곳으로 돌린다.
“음? 축복받은 숲을 모험가에게 열어 줄 정도라면 꽤나 권력이 있어야 하거든. 롤랑, 저 친구가 수도에서 아가씨들에게 얼마나 인기가 있는데. 그래서 첫눈에 반한 높으신 분의 따님이 얼굴이라도 한 번 다시 보고 싶어서 부른 게 아니냐는 말이 나왔지.”
“…헤에, 그 정도인가요?”
“그럼! 자유로운 모험가의 활약상은 언제나 귀족들에게 있어 인기였거든. 숲에서 여우 따위를 잡은 것과 광활한 초원에서 몬스터를 사냥한 이야기는 전혀 다르니까. 거기에 저 친구는 얼굴도 수도의 도련님들보다 곱상하기까지 하니 인기가 없는 게 더 이상한 일이고.”
흥미롭다는 듯 추임새를 넣는 그레이스의 반응에 신이 잔뜩 나서 떠드는 제임스. 뭐라도 더 듣고 싶다는 듯 눈을 빛내는 그레이스와 적당히 흥미를 느끼는 아이린과는 달리 케이든은 혼이 빠져나간 모양새다.
눈의 초점이 흐릿해지고 입술이 슬쩍 벌어지는 게 누가 봐도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의 모습. 한세아가 옆에서 고개를 돌린 채 빤히 쳐다봐도 눈치를 못 채는 게 여간 심각해 보인다.
‘아니, 진짜로? 서브 퀘스트인데 캐릭터 퀘스트가 엮일 수 있나?’
순서를 생각한다면 검의 공녀보다 예비 성녀의 비밀이 밝혀지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는데. 물론 수도에 올라가도 밝혀지지 않을 순 있다. 지금 저 모습은 일종의… 스토리 떡밥 같은 느낌.
제임스의 과정 섞인 내 무용담에 다시 빠져든 그레이스의 옆에서, 적당히 경청하던 아이린이 케이든의 멍한 표정을 발견한다.
“어머, 케이든 씨? 많이 피곤하신가요…?”
“아,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