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든 씨는…?”
“아, 저는 장비의 수리 때문에 참여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따돌리는 것처럼 느껴질까 걱정했는지 세 여자의 시선이 모이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저어 보이는 케이든. 남장 여자에 공녀라는 신분을 숨기고 있어서 그런지 마음을 살짝 열었다 해서 사적으로 친해지는 건 아직 멀었나 보다.
케이든이 남장한 검의 공녀라는 걸 아는 한세아와 달리, 남성 파티원이라 생각하는 그레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별다른 아쉬움을 표출하지 않는다.
나 스스로 말하기엔 부끄럽지만, 그레이스에게 중요한 건 아직 서먹한 관계인 케이든이 아니라 짐꾼으로서 따라오게 될 나다. 물론 한세아에게는 케이든의 마법 갑옷도 중요한 사안이라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는 그녀.
“그때 말했던 가문의 갑옷이죠? 고쳐지면 꼭 보여주세요.”
“예. 당연한 이야기지만 제가 입고 나올 테니까요.”
“아, 그렇구나….”
한세아의 어벙한 대답에 다시 한번 케이든의 입꼬리가 씰룩거린다. 그야 갑옷은 고치면 입고 나오겠지, 설마 고쳤다고 꼭꼭 숨겨놓고 안 보여주겠니.
그녀 자신도 자기가 한 말이 웃긴지 어색하게 웃어 보이자, 고개를 까닥 숙여 인사를 한 케이든이 먼저 자리를 뜬다. 마치 웃음보가 터지기 전에 자리를 피하는 것 같은 황급한 발소리와 함께 길드 밖으로 사라지는 케이든.
“저, 크흠, 저도 신전으로 가볼게요.”
“내일 봐요, 아이린 언니….”
재빠르게 웃음을 참으며 사라진 케이든과 달리 아이린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만 웃어버렸다. 기침하는 척 입을 가렸지만, 히죽 올라간 입꼬리는 부정할 수 없는 웃음의 증거. 한세아의 어벙한 대답이 귀여웠는지 상냥한 눈동자가 한세아를 바라본다.
차마 상냥한 아이린에게는 쓴소리를 할 수 없는지 뺨이 퉁퉁해져서는 내게 화살을 돌리는 그녀. 그마저도 그레이스와 아이린이 이해한다는 듯 따스한 눈길로 한세아를 바라본다.
“…롤랑, 너무 대놓고 웃는 거 아니야?”
“뭐 어떻게 해, 저 두 사람도 너 귀여워서 웃는데.”
“……읏?!”
마법사 한나 파티의 지도역이자 게시판의 짠해좌로서, 좀 더 노력을 많이 해야겠다는 다짐을 절로 하게 만드는 훈훈한 모습이었다.
[히어로즈 크로니클 갤러리]
―✪ 20층 이벤트 사람마다 다른듯
―✪ 뽕맛을 아는 BB게임즈
―✪ ??? : 수도에 갈 땐 뭘 준비해야 하죠?
―✪ 골드 달달하게 빠는것도 오히려 좋아
―✪ 기사단 뽕맛 미쳤는데 시발 ㅋㅋㅋ
10층에 이어 20층의 메인 시나리오가 정복되었다. 정작 중요한 보상은 기사단과 마탑의 알력다툼으로 인해 미뤄진 상황이지만 그것까지는 시청자들이 알 바 아니고.
한 발 더 앞서나가는 랭킹 1위의 행보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그 뒤를 바짝 쫓아가는 맞수가 있다면 더욱더 열광하는 것 또한 당연한 이야기. 한세아라는 개척자를 통해 20층의 스토리에 진입한 유저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20층 이벤트 사람마다 다른듯
[피라미드에서 몰려오는 오크들.GIF]
[숲에서 뛰쳐 나온 기사들.GIF]
한세아 방송에서는 마법사가 번개로 오크를 지졌는데
여기서는 칼잽이들이 손수 수확하고있음
┗수확은 시발 ㅋㅋㅋ 표현이 얼탱이가 없네
┗애초에 모험가 길드장 와꾸부터 다르지 않냐?
┗NPC들 랜덤성 있는 듯 우리도시에 롤랑없슴
┗신전에 아이린 있는지 확인하러간놈도 있던데 없다더라
┗확실히 마법사에 비해 보는 맛이 없다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게시글 속에서는 내가 봤던 것과 똑같은 피라미드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곳으로부터 오크가 쏟아져 내리는 장면까지는 같다지만 마법사 대신 왕국의 기사단이 등장해 오크를 처단하는 게 보인다.
‘나는 복제되지 않은 건가…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만월 늑대 때와 달리 본격적으로 NPC들이 개입하는 상황이다. 따라서 다른 유저들도 자신들의 세상에서 롤랑과 그레이스, 아이린과 케이든을 찾겠다며 이곳저곳 샅샅이 수색하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롤랑 2호기의 출현 소식 따위는 없었지만 반쯤 자랑에 가까운 NPC 콘테스트가 일어나는 건 필연적인 흐름.
별이 몇 개인가, 얼굴이 예쁜가, 성격이 좋은가, 가슴이 큰가― 온갖 적나라한 욕망이 뒤섞인 채 자기 세상의 NPC들을 자랑하는 게시글이 범람해서 되려 읽는 재미가 떨어졌다. 미녀 자랑도 하루 이틀이어야지, 몇십 페이지가 깡그리 도배되어 있으니 어이가 없을 지경.
‘갤러리에서는 볼 게 없네….’
다각다각, 귓가에 울리는 말발굽 소리를 배경음 삼아 인터넷 창을 뒤진다. 한창 수다를 떨던 그레이스와 아이린은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서로에게 기댄 채 잠이 든 모습이다. 케이든은 상념에 젖은 듯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고, 한세아는 허공에 손가락을 꼼질대는 중.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중이라 방송을 켜지는 않았지만, 시스템 창이나 미니맵 따위를 보고 있는 건지, 아니면 나처럼 인터넷을 할 수 있는지 허공을 콕콕 누르는 중이다. 누구는 팔짱을 낀 채 손가락도 숨기고 하는데 한세아는 아주 대놓고 하네.
중간중간 킥킥 웃지만, 케이든이 아무런 반응도 없는 모양을 봐서는 인터넷을 하는 것 같다. 허공을 쿡쿡 누르며 헤헤 웃는다니, 누가 봐도 미친년이잖아.
“…정찰 임무라니, 오크들이 정말 남아 있을까요?”
두 사람은 꿈나라로 향했고, 두 사람은 남들 몰래 인터넷을 즐기는 와중 홀로 사색에 잠겨 있던 케이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신의 축복을 받은 숲에 오크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러 간다니, 참 모순적인 상황이니까.
여신의 축복을 받은 장소에 몬스터가 등장해 여기사를 습격했다. 퀘스트와 플레이어의 존재를 모른다면 정말 불길한 사건의 징조처럼 느껴지겠지.
어쩌면 케이든의 남장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지 손가락을 급히 휘둘러 인터넷 창을 닫은 한세아도 이쪽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참, 여러 가지 의미로 게임에 진심인 한세아의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나올 것 같았다.
“어느 정도는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습니까?”
“여신께서 축복을 내린 숲이지, 몬스터가 사멸되는 정화의 장소는 아니니까. 수도에 있을 때 병약한 농노가 숨어 들어가도 열매로 연명하며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답고 안전한 숲이라는 소문이 돌았어. 그 정도면 오크 한두 마리 정도는 숨어 살 수 있겠지.”
“롤랑, 축복받은 숲이 정확히 어떤 장소야?”
아무래도 케이든은 문득 든 의문을 입 밖으로 꺼낸 것인지 딱히 대화를 이어 나갈 생각이 없는 모양새다. 그러자 인터넷 서핑도 질렸는지 눈을 반짝 빛내는 한세아가 내게 냉큼 질문을 던진다.
방송이 켜져 있든 꺼져 있든 한세아라는 인간의 행동 원리는 참으로 단순해서 모든 게 투명하게 드러난다. 지난번처럼 내게 질문을 던져 정보를 미리 알아 둔 다음, 방송이 켜지면 시청자들에게 잘난 척을 할 생각이겠지.
방송인으로서 게임 예습에 철저하다고 해야 하나?
“나도 직접 가 보지는 않았지만, 수도의 귀족들에게 들은 이야기는 꽤 있어. 허풍이 좀 섞였을지도 모르지만….”
한세아의 질문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지만,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이쪽을 바라보는 케이든. 그리고 시청자들에게 아는 척을 할 생각에 싱글벙글 들뜬 한세아. 문제가 있다면 내가 아는 이야기가 정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말을 곱게 해서 수도의 귀족들에게 들은 거지, 나한테 수도 인근의 아름다운 숲 이야기를 할 사람이 누구겠는가? 당연히 밤이 외로워서 침대로 나를 끌어들인 귀부인들이 내 팔을 베고 속닥거린 이야기들이지.
기사단의 업무라던가 사냥을 위해 직접 방문한 귀족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귀부인들의 사교회에서 떠도는 소문들. 당연하지만 정보의 신빙성이 상대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다. 한세아 저거, 괜히 아는 척하다가 다 틀려서 시청자들에게 놀림거리가 되는 건 아니겠지?
…근데 그것도 재미있을 것 같은데.
“오베르뉴 숲은 말 그대로 여신께서 축복을 내린 숲이야. 토양은 비옥해지고, 공기는 맑아지며 신성력과 생명의 기운이 넘쳐나는 숲이지. 왕족과 일부 고위 귀족들이 사냥을 나서는 이유도 그 신성력 때문이고.”
“신성력이 가득한 숲인데 오크가 숨어 있다니… 뭔가 아이러니하네.”
“여신님의 자애는 살아 있는 모든 것에게 평등하거든. 언데드 따위가 아니라면 한낱 오크라 할지라도 신성력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그 숲이 엄중하게 관리받는 중이고.”
RPG 게임에서 힐 스킬에 데미지를 받는 건 언데드 종족이지, 오크 따위의 그린 스킨이 아니잖아. 그러다 보니 풍요로운 숲에 오크가 자리를 잡게 되면 호주를 점령한 토끼처럼 그 수가 득실득실 늘어날 수 있다.
물론 나도 가 본 적 없는 숲이고, 애초에 여신의 축복을 받은 장소에 오크 따위가 기어들어 간 게 전대미문의 역사적 사건이긴 하다.
이 왕국에도 조선왕조실록 같은 기록서가 있다면 이번 국왕의 이름에는 거의 똥칠이 된 수준이 아닐까? 왕이 얼마나 부덕하고 기사단이 얼마나 무능하면 오우거도 거인도 아니고 오크한테 성역을 침범당하냐면서.
“숲 안에 들어가는 것만으로 신성력의 세례를 받을 수 있으며, 숲에서 나고 자란 열매와 짐승 고기는 몸에 좋다는 이야기까지 있더라고. 사교회에서 잔뜩 과장된 소문일지도 모르지만 어느 정도는 진실이 섞여 있겠지.”
“그런 귀중한 장소에 왜 우리 파티를 부른 걸까?”
“의뢰를 맡긴 것 자체가 일종의 포상일 거야. 20층의 의뢰를 거절했다 해도 일단 우리는 왕실 기사단의 일원을 구출한 모험가니까.”
한세아가 시청자들에게 말한, ‘이거 일종의 히든 퀘스트 아니야?’가 날카로운 의견이라는 거지. 오크에게 납치된 여기사를 구출하면 그에 대한 포상으로 의뢰가 날아오는 방식인 것 같다. 내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는 두 사람.
의뢰 자체가 포상이라면 의뢰를 한 쪽이 마차와 마부를 보내 수도로 모셔오는 이유가 곧바로 설명되기 때문이다.
중세 시대의 마차라는 건 덜걱거리고 흔들려서 멀미는 물론이요 좌석에 쿠션 따위 없어 엉덩이와 등허리에 멍이 들 것 같은 흉악한 물건. 하지만 왕실 기사단이 보낸 마차는 쿠션도 있고 흔들림 방지도 되어 있으며 바깥의 소음도 줄여주는 방음벽까지 설치가 된 고급 물건이다.
“어쩐지 마차가 엄청 고급지더라… 도시에 처음 올 때 탔던 마차와는 비교도 안 되네.”
“용병단에서도 이 정도 마차는 사치라고 구매할 생각도 하지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