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을 대충 들어보면, 일종의 사이드 퀘스트 같은 느낌이네. 메인 시나리오 다음은 캐릭터 퀘스트, 그다음은 사이드 퀘스트가 열린 것 같은 모양새다. 물론 진짜 퀘스트인지 아닌지는 한세아가 알겠지.
결정은 리더인 네 몫이라는 듯 슬쩍 눈짓을 준 채 생각을 하는 것처럼 한세아의 방송 창을 슬쩍 보았다. 그녀도 퀘스트 창을 급히 여는 걸 보니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
“오, 서브 퀘스트 열렸네. 역시 퀘스트는 깨고 가는 게 좋겠지? RPG 유저로서 퀘스트를 무시하고 지나가면 찝찝하단 말이야.”
-미니맵에 느낌표 남아있으면 숨을쉬기어려운병
-도시 맵핑도 그렇고 찐또배기 RPG유저네 증말
-보상 먹튀당하는거 개오반데 왜케불안하지
-엘리스눈나 먹튀떡밥 자꾸 던지면 무섭다고~
-효율을 위해 21층을 가라고? 어이, 네놈은『가짜』구나?
갑작스럽게 추가된 세 번째 선택지. 이제 20층에 머무르거나, 21층을 향해 나아가거나, 처음 열린 서브 퀘스트를 진행할 것이냐 세 가지의 선택지가 던져졌다. 그 덕에 무슨 천하 삼분지계를 당한 중국처럼 왁자지껄 시끄러워진 채팅창.
이번만큼은 곧바로 선택할 수 없는지 깊은 고민에 빠진 한세아가 채팅을 하나씩 읽기 시작한다. 평범한 RPG 게임이었다면, 그녀가 평범하게 게임을 소개하듯 진행 중이었다면 곧바로 서브 퀘스트를 깨러 갔겠지.
하지만 한세아는 전 세계 진행도 1위의 랭커. 최초 클리어의 명예와 보상을 위해 바쁘게 달려가는 중이다. 스피드런을 하는 중 이벤트 신과 스토리 장면을 스킵 없이 읽으면 시청자들에게 욕을 먹게 되는 것과 비슷한 상황.
메인 시나리오 보상을 기다리며 내실을 쌓기 위해 20층에 머무르자.
1위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빠르게 진행해도 보상은 알아서 올 것이다.
게이머로서 서브 퀘스트를 보지 않고 넘어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 갈래 길 앞에 서게 된 한세아가 깊은 고민 끝에 겨우 입을 연다.
한세아는 방송인이기 이전에 게이머였다.
“아, 씨! 솔직히 궁금해서 못 참겠어. 서브 퀘스트가 등장했는데 남들이 알려주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 깰 때까지 내용을 모를 거 아니야? 이거 안 하고 넘어가면 꿈에서도 나올 것 같은데.”
-고건맞지 참고넘어가면 가짜임 ㄹㅇ
-꿈에서도 게임을한다? 개쌉이득이긴 한데
-여차하면 롤랑던지기로 끝낼수있자너 무조건 고지
-효율보다는 낭만을 추구하는게 RPG정신
-보상 달달할수도 있으니까…
대부분의 시청자도 그녀의 선택을 지지하는 분위기다. 한세아가 1위로서 빠르게 달리든 말든 시청자들은 볼거리만 풍족하면 그만이니까. 한세아에게 과몰입해서 1위를 빼앗기는 게 아니냐고 안절부절못하는 시청자도 있지만…
“우리 파티에 6성 롤랑이 있는데 이런 거 찍어 먹지 않으면 누가 보여주겠어, 그치? 누구한테 따라잡힐 것 같지도 않은데 보상 챙길 수 있는 건 싸그리 챙겨가야지. 그리고 사건을 해결한 모험가를 초청한다며? 금화를 받거나 막타 뺏긴 유저는 축복받은 숲에 못 들어가는 거 아니야? 그냥 서브 퀘스트가 아니라 히든 퀘스트 같은 느낌인데 롤랑빨로 들어가 봐야지.”
한세아의 자신만만한 발언에 다들 수긍하고 넘어가게 된다. 아무리 이벤트 신이라지만 5★ 안테노르가 번개로 오크를 지워버리는 걸 목격했으니 6★ 롤랑도 그만큼 강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을 테지.
물론 강하냐 약하냐를 따지면 내가 더 강하긴 하고, 안테노르가 전력으로 사용한 마법도 버틸 수 있긴 한데… 문제는 내가 퓨어 탱커라는 점. 고블린을 투포환처럼 던졌을 때도 그렇지만 이 탱커라는 직업은 남에게 뭔가를 보여줄 수 있는 수단이 없다.
거인의 일격도 흘려내고 용의 숨결도 견뎌내지만 그걸 무슨 수로 증명해. 당장 20층 따리 한세아 파티 앞에 산악 거인과 드래곤이 등장할 리가 없는데. 이제 오크를 잡았는데 거인과 드래곤은 무슨.
“이번 의뢰, 받아보자. 솔직히 축복받은 숲이 궁금하기도 하고 수도 쪽에 가보고 싶기도 해.”
“확실히 여신에게 축복받은 숲은 궁금하긴 하네.”
“의뢰를 받아서라지만 오베르뉴 숲에 들어갈 수 있게 되다니, 여신님을 모시는 몸으로서 너무 기대되네요.”
내 능력의 증명에 대해서는 넘어가고, 한세아가 시청자들을 설득한 뒤 일행들에게도 이야기를 꺼낸다. 서브 퀘스트 뿐만 아니라 수도와 축복받은 숲을 맵핑 할 생각이 가득한 그녀. 일행들도 축복받은 숲이 궁금한지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한세아의 의견에 따른다.
왕실 기사단의 의뢰보단 축복받은 숲에 더 무게를 둔 모양새지만 이해는 된다. 사실 축복받은 오베르뉴 숲은 나도 아직 방문해보지 못한 장소니까.
고위 귀족과 왕족을 위한, 여신의 축복이 내린 숲. 당연히 평민인 모험가가 아니라 왕실 기사단이 전담하는 장소다. 모험가 나부랭이가 흔적을 조사한다고 들어갈 수 있는 장소가 아닌데 퀘스트 덕분에 열린 것 같네. 공간 이동을 하는 특이 개체다 보니 추적이 가능한 한세아를 찾는 것이리라.
“그러면 기사단 쪽에 의뢰를 수락했다고 연락할게?”
“네. 부탁드려요, 언니.”
“뭘 부탁까지야. 이게 내 일인데. 아마 오늘 연락을 보내면 내일쯤 마차가 올 거야.”
생긋 웃어 보인 엘리스가 테이블에서 일어나 자리를 뜬다. 그나저나 내일 마차가 온다니, 그러면 오늘은 탑에 갈 수 없겠는데. 20층 행 게이트가 아직 존재하지 않으니 당일치기 모험을 하기에는 좀 부담스럽다.
다른 일행들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시선이 한세아에게 모인다. 파티의 리더에게 일정을 묻기 위해 자연스럽게 모이는 시선을 보니 한세아가 리더로서 준수하게 이끌었다는 게 느껴지네.
하지만 리더로서는 인정받았지만, 거짓말 분야와 눈치 분야에서는 평균점 이하인 한세아인지라 시선을 곧바로 눈치채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시청자들의 채팅을 읽느라 파티원들의 시선을 못 느낀 상황.
“한나, 그러면 오늘은 어떻게 할까. 아직 아침이라지만 내일 의뢰를 위해 떠날 걸 생각하면 탑에 들어가는 건 시간이 애매할 것 같은데.”
“아, 그러네. 오늘은 탑에 가지 말고 수도에 갈 준비를 하는 게 좋겠어. …그러면 뭘 준비해야 하지?”
한세아의 엉뚱한 질문에 케이든의 입꼬리가 움찔거린다. 우리 남장여자 공녀님도 슬슬 파티원들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 것 같네. 남자인 내게는 아직 거리감을 느끼고 있지만 무뚝뚝하고 사무적이던 태도에서 적극적이며 웃음도 내비치게 되었으니까.
시골에서 모험가의 도시로 직행한 그레이스도, 도시의 신전에서 한평생 나고 자란 아이린도 대답하지 못하고 눈동자만 데구루루 굴린다.
“준비할 건 딱히 없어. 시골로 향하는 거라면 물자가 부족할 수 있으니 준비를 해서 내려가야 하지만, 우리는 수도로 올라가는 거니까. 보급이 부족하면 구매를 할 수도 있고 기사단에 지원을 받을 수도 있지.”
“아, 그렇겠네….”
-머리가 진짜 짠해져버린…
-이거 먼 짠스라이팅임? 맨날 짠해좌 글 컨닝하더니 진짜 짠해졌음?
-시골촌놈이 서울가는 준비물 검색하는 기분이었어요
-내일 마차 탈 때 신발 벗고 타는거 알지?
-댓글로 놀리는놈들도 준비물 뭐있는지 같이 고민했으면서 ㅅㅂㅋㅋㅋ
한세아와 그레이스, 아이린이 납득 했다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거리자 결국 케이든의 입꼬리가 참지 못하고 지렁이처럼 꿈틀거린다. 어벙하게 고개를 흔드는 세 미녀와 그걸 구경하며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는 남장 미녀.
말로 표현하니까 뭔가 오묘한 장면인지라 시청자들도 웃음을 참는 사람이 없이 한세아를 놀리는 채팅이 도배된다.
“웃어? 어어, 할 것도 없는데 확 방송 끄고 숲에 도착해서 켜는 수가 있어?”
그러고 보니 방송 스케쥴에 맞춰서 키겠다더니 거의 매일 꼬박꼬박 방송 중인 한세아. 카메라에 그레이스와 아이린을 보여주지 않겠다는 엄포를 놓으며 자신을 비웃는 채팅창을 탄압하기 시작한다.
일주일에 네 번 방송을 켜겠다면서 매일 게임을 하고 방송하는 게 훌륭한 중독자의 모습에 가깝다. 인터넷 창을 통해 확인했을 때, 지난번에 사흘 쉰 거 말고는 연달아 방송 중인 것 같은데 몸은 괜찮은 걸까.
“응, 붙잡아봐야 늦었어~ 지금 생각해 보니까 어차피 오늘 방송 키기로 약속한 날도 아니네? 퀘스트 진행 상황 알려줬고, 서브 퀘스트 생긴 거 보여줬고, 마차 내일 온다고 했고, 스토리 진행 없이 재미없는 부분 혼자서 하기로 했지? 오늘 방송은 여기까지, 수고~”
뭐야, 진짜 껐네.
케이든과 함께 일행들을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으니 시청자 상대로 열심히 반격하던 한세아가 정말로 방송을 꺼버렸다.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절규와 도배를 반복하는 채팅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검게 변해버린 그녀의 방송창.
허공을 떠다니던 카메라 드론이 스윽 사라지자 홀가분하다는 듯 쭈욱 기지개를 켠 그녀가 작게 웃으며 그레이스의 곁에 착 달라붙는다.
“언니, 시간도 비는데 장비 구경이나 하러 갈래요?”
“장비 구경?”
“네. 이번에 보상 들어오면 뭐 하나 살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언니도 장비 받은 거, 갑옷뿐이니까 손가락 보호대 같은 거 구경하러 가요.”
카메라가 꺼지자 이번에도 한세아는 그레이스와 함께 돌아다닐 생각인가보다. 케이든은 아직 거리를 두느라 사적인 동행을 하지 않고, 아이린은 신전에서 아이들을 위해 봉사를 하느라 밖에 놀러 다니는 일이 적다.
애초에 케이든은 남장한 상태니까 같이 쇼핑하러 다니자고 말하는 것도 조금 이상하긴 하겠네. 그러면 나는 남는 시간 동안… 숙소에 박혀서 인터넷이나 할까.
“아이린 언니도 같이 가실래요?”
“아뇨, 제안은 고맙긴 한데… 오늘은 보육 수녀님들이 저녁에 아이들한테 동화책을 읽어 주기로 해서요. 저도 한 손 거들러 가야겠어요.”
역시나 아이린은 배시시 미소지으며 아이들을 돌보겠다고 말한다. 방송이 켜져 있었다면 마망이라는 단어로 도배될 것 같은 부드러운 미소. 그 모습에 그레이스도 한세아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린다.
이번에는 거절했다지만 세 사람은 말을 놓고 언니 동생 사이가 될 정도로 붙어 다니긴 했거든. 시간이 빌 때는 시장을 같이 돌아다니기도 하고, 반대로 신전에 가서 봉사하기도 하며 엄청 친해졌다.
하긴 5★ 사제가 파티에 들어왔는데 인벤토리로 심부름 정도는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지. 다른 게이머들도 신전에 봉사하러 가는 것으로 5★을 얻을 수 있다면 매일 가지 않을까? 가챠 게임에서 캐릭터 한 번 뽑겠다고 성지순례도 가는 게 게이머인데.
“확실히 골무가 낡았으니 새로 사고, 화살도 보충하는 게 좋겠네.”
“그럼 롤랑, 와서 짐 좀 들어줘요.”
“……나? 아니, 인벤토리는.”
“에이, 말이 그렇지 장비 보는 거 도와달라는 뜻이죠. 그레이스 언니도 나도 좋은 장비를 파는 곳이 어디인지 모르니까.”
세 사람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걸 듣고 있는데, 갑자기 내게 불똥이 튄다. 인터넷 창에서 한세아의 방송을 끄고 다른 방송을 뒤적거리고 있다가 당한 불의의 기습 공격. 내게 짐을 들어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한 한세아의 눈동자가 음흉하게 빛난다.
방송은 종료했으니 이제 내일까지 사적인 욕심을 채우겠다, 이건가. 무슨 미연시 게임을 하듯 나와 그레이스의 관계를 이어주려 드는 그녀. 하긴 그레이스의 고향에 갔을 때부터 대놓고 나와 그레이스가 단둘이 되게 하였었던 게 한세아다.
게임 속의 게임이라 해야 하나, 일단 한세아는 게이머로서 캐릭터들의 커플링을 만드는 데 진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기야 히로인즈 크로니클은 물론이요 온갖 게임마다 저런 유형의 플레이어가 있긴 하지.
“그래, 뭐. 좋은 장비는 많을수록 좋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