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88/175)

 “어, 이거 어쩌지? 생포해도 메인 퀘스트가 깨지나? 근데 생포하면 게이트 못 만드는 거 아니야? 실험한다고 오래오래 살려뒀다가 게이트 안 생기면 나만 좆 되는건데. 리셋도 그날 아침으로, 정확히는 수면하기 버튼 누른 날 아침으로 돌아가는 거라 그 때가 되면 되돌리지도 못해.”

이 합리적인 제안에 문제가 있다면 바로 한세아의 퀘스트. 아무래도 보스 몬스터를 생포해서 팔아넘긴다는 기상천외한 해답을 내려본 적 없는 그녀가 불안해하기 시작한다. 최초의 가상 현실 게임인 데다 진행도 1위가 한세아니 정보가 없는 게 당연하지.

보스를 생포해서 더 많은 보상과 명성을 얻을 것이냐

보스를 사냥해서 안전하게 퀘스트를 클리어할 것이냐

시청자들의 의견도 중구난방으로 갈라져 이 소리 개 소리 온갖 의견이 표출되고 한세아 또한 깊은 고민에 들어가는 상황. 그 모습을 답답하게 쳐다보던 레베카가 한 마디 던지려 할 때, 나는 결정을 내렸다.

이럴 땐 안전빵이 맞지. 생포했다가 마탑이 아니라 왕궁에 홀랑 넘어가 버리면? 20층 게이트를 포기하고 10층에서 30층까지 걸어 올라가게 된다고.

 “이, 이 새끼들이이이!”

계속되는 무시에 때맞춰 분노하는 오크 족장. 필살기 같은 느낌인지 양손을 휘적휘적 휘두르니 공동에 휘몰아치는 마력이 소형 태풍처럼 응집되어 날아든다.

 “…방패술의 달인.”

물론,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속삭인 내 목소리에 그 불길한 마력은 고스란히 주인에게 되돌아간다.

오크 보스는 살아있는 것보다는 죽어버리는 게 더욱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생포한다면 더욱 많은 보상을 받을 수 있겠지만, 중요한 건 당장 받게 될 금화와 명예 따위보다는 20층으로 직행할 수 있는 게이트기 때문이다. 탑의 상층으로 가는 원정대의 여정이 단축될수록 모험가들은 더욱 쉽게 탑을 개척할 수 있으니까.

마법사들이 엉뚱한 실험을 하기 위해 게이트 제작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연구를 시작한다면, 왕국이 기사를 인질 삼고 왕실의 숲을 침범한 오크를 데려간다면, 신전이 여신의 축복을 받은 땅을 더럽힌 오크를 정화해 버린다면―

더 큰 보상을 욕심내다가 20층의 게이트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아, 이 개새끼 진짜.”

 “아이, 미안하다니까요.”

 “시발럼이 말이야….”

그 때문에 나는 오크 보스를 죽였다.

레베카와 한세아가 대화를 나누는 중, 분노한 오크 보스의 광역기술을 그대로 반사해서 죽였다. 허공에 휘몰아치던 불길한 마력이 방패에 맞닿는 순간 고스란히 돌아가 제 주인을 갈기 발기 찢어버린 것이다.

…이거 방패로 받아칠 수 있는 투사체면 즉사기도 반사할 수 있나?

아무튼, 그 결과물은 바닥을 나뒹구는 오크 보스의 부산물과 잔뜩 삐져서 입술이 앞으로 잔뜩 튀어나온 레베카. 탱탱한 입술을 비죽 내밀고서는 꿍얼거리며 그녀가 나를 툭툭 주먹으로 후려친다.

-애교스러운데 저거 맞으면 보스도 뒤지것는디

-사운드파일만 삑난것같네 ㅋㅋㅋ 존나살벌해

-가볍게 툭툭치는데 왜 갑옷에서 카득콰득 소리가나냐

-보고있으니 학창시절 떠오르는데 카메라좀돌려줘

-니 지건이 제일 아파 윽윽

물론 43층의 모험가가 툭툭 후려치면 변종 오크도 일격에 온몸이 으스러져서 뒤졌다는 걸 생각해보면 맞을 때마다 몸이 덜걱덜걱 흔들리는 게 엄살은 아니다. 등판이나 팔뚝을 레베카가 후려칠 때마다 앞뒤로, 좌우로 흔들리는 내 몸.

이번 건 내가 나쁜 놈이라 할 말이 없어 조용히 얻어터졌다. 고통은 없지만, 머리가 좀 정신없이 흔들리네.

레베카는 내 일행들이 다 올 때까지 기다려준 뒤 협상을 하려다 뒤통수 맞고 막타를 스틸 당한 상황이다. 이럴 때 화가 안 나면 모험가나 용병이 아니라 보살이고 부처지. 이렇게 툭툭 두들기기만 하면 오히려 내가 미안할 지경이다.

 ‘외모 버프를 받으면서 마음씨도 좀 고와졌나?’

겉으로 보기에 애교스럽게 툭툭 두들기는 게 아니라, 패드립을 박으며 턱에 주먹이 날아와도 변명할 이야기가 없는 게 내 처지다. 게임 퀘스트에 대해 모르는 레베카에게는 10년을 알고 지낸 놈이 보상 때문에 뒤통수를 친 기분일 테니까.

실수로 반격했다… 같은 씨알도 안 먹힐 소리는 하지 않는 게 도움이 되겠지.

겉으로 보기에는 애교스럽고 귀엽지만, 내용물은 사람 두개골은 물론 변종 오크 두개골도 짓무른 홍시처럼 박살 낼 수 있는 주먹이 허공을 휙휙 가른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덜 삐졌는지 뒤통수를 노리지 않는 그녀의 주먹.

 “새끼가 나눠 먹으려고 기다려줬더니 응? 홀랑 먹어버리네.”

 “그, 한 방은 버틸 줄 알았지.”

 “아래에서 방패 가지고 놀더니 손대중하는 법도 까먹고, 잘났다 아주?”

조금은 우습지만, 레베카가 삐진 이유는 내가 막타를 쳐서 보상을 차지할까 봐 삐진 게 아니다. 덩치 커다란 변종 오크를 남겨 두고 있었는데 내가 일격에 죽여버려서 삐진 거지. 요컨대 손맛이 부족해서 삐졌다는 뜻이다.

발걸음 소리 울리듯 일정하게 울려 퍼지는 툭 퍽 쾅 하는 자잘한 소음에 조금씩 움찔움찔 반응하는 우리 일행들. 그 덕에 피라미드형 제단 아래에서 다시 바깥으로 나가는 동안 불편한 공기가 유지되었다.

 “윽, 수다쟁이 영감이네. 넌 이번 거 다음에 다 토해낼 줄 알어.”

어둑한 복도의 끝,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향하는 입구에서부터 작게 기척을 느꼈는지 마지막으로 등판을 한 대 퍽 때리고 도망치는 레베카. 근접형 전사 주제에 무슨 탐색꾼 수준의 기감이라도 지닌 걸까?

치를 떨며 숲속으로 쏙 도망쳐버리는 뒷모습을 일행들과 함께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안테노르가 허공을 날아서 피라미드를 내려가는 우리 일행들에게 다가온다.

이런 경우가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다는 거 아닐까? 마력을 잔뜩 써서 초췌해진 얼굴, 하지만 열기와 흥분으로 데굴데굴 굴러가는 커다랗게 뜨인 눈. 좋게 말하자면 열정으로 가득 찬 학자지만 나쁘게 말하자면 눈 뒤집힌 광인처럼 보인다.

 “몸 좀 추스르고 들어가 보려 했는데 벌써 나오다니, 이거 참 아쉽구만! 안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몸을 추스르기는 개뿔, 피라미드의 밑바닥부터 재료까지 샅샅이 조사하느라 안으로 들어올 생각도 못 했을 거면서. 탐구되지 않은 미지 앞에서 몸을 사리는 마법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 봐야 어찌 알았냐면서 자기가 알아낸 온갖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떠들겠지.

레베카의 분노를 상대할 땐 납작 엎드려서 흐르는 대로 흘러가길 기다려야 한다면, 안테노르를 상대할 땐 최대한 아는 걸 먼저 말해버리고 도망쳐야 한다. 대화를 시작해서 정보가 오고 가는 형식이 되면 수다가 하루를 훌쩍 넘길 수 있거든.

 “안에는 특이한 주술을 다루는 오크들의 우두머리가 있었죠. 아무래도 공간 관련된 주술을 아는지 변종 오크 전사와 주술사를 소환할 줄 알던데요.”

 “허어, 오크가 오크를 소환한다니. 그, 부산물은…?”

 “한나? 인벤토리에서 물건 좀 꺼내 줘.”

보스 몬스터인 만큼 부산물을 잔뜩 떨어트린 녀석. 다행인 점은 흙바닥에 파묻힌 만월 늑대와는 달리 평평한 돌바닥에 널브러졌다는 점이다. 부하 몬스터들이 마석과 부산물 없이 연기로 바스러져 사라진 점도 있고.

오크 추장의 부산물 중 가장 눈에 띄는 건 머리에 쓰고 있던 커다란 인디언 깃털 모자. 그 외에도 목에 걸면 배꼽까지 내려갈 것 같은 커다란 목걸이와 손목에서 시작해 팔뚝까지 휘감아야 하는 구슬 팔찌 등 다양한 장신구들이 있었다.

허공에서 한 아름 튀어나오는 부산물과 마석에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안테노르. 딱 봐도 부산물과 인벤토리 중 어떤 거로 이야기를 나눌까 고민하는 게 느껴진다.

 “영감님, 거 약속한 건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야 당연하지. 20층에도 게이트를 만들 수 있으면 그 자체만으로 재밌을 테니까.”

 “게이트 만드는 게 재미…, 알겠으니까 꼭 게이트가 우선입니다.”

그러니 맹수의 주의를 끌기 위해 고깃덩이를 던지듯 게이트의 이야기를 꺼낸다. 숲에 어떻게 돌로 지은 피라미드가 있는지에 대한 강연을 듣고 싶지 않았으니까. 심지어 한세아는 안테노르의 앞에 서기도 싫은지 부산물을 내게 건네주고 내 뒤에 숨듯이 자리를 잡았다.

물론 안테노르야 그런 한세아의 반응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손에 쥔 부산물을 요리조리 돌려볼 뿐이다. 인벤토리는 지난번에도 봤지만, 오크 추장의 부산물은 태어나서 처음 보니 더 우선이라 이거지.

그 모습이 불안해 괜히 한 마디 더 꺼내게 된다.

 “탐구하다 보니 재밌어서, 뭐가 떠올라서… 이러면서 차일피일 미루지 말고. 게이트 먼저 만들고 마음대로 가지고 노세요 제발.”

 “거, 참. 걱정도 많구만. 10층에서 만든 경험이 있으니 게이트 정도야 뚝딱 만들 수 있어!”

 ‘그게 문제지, 경험이 있다고 다른 실험부터 하면 몇 주를 처박힐지 모르니까.’

욱하며 목구멍 너머로 튀어나올 뻔한 딴지를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집어삼켰다. 아무리 편한 사이라 해도 일단은 이쪽이 아쉬운 소리를 하는 처지니까. 이 영감이 말이 좀 과도하게 많을 뿐이지 이렇게 부탁한 걸 무시할 사람은 아니기도 하고.

일단은 이 영감에게서 벗어나 길드로 향하는 게 최우선이다. 슬슬 입이 간지러운지 부산물에서 시선을 떼고 한세아에게 눈을 돌리는 빈도가 잦아지는 게 보인다.

-저저저저 슬슬 아가리모터 시동걸린다

-한세아 이제는 즐기는거임? 시청자 갈아버리는 것?

-과거로돌아간다면한세아에게전사로전직하기미션을걸어줘

-마법사 토크를 스킵하고 싶으면 돈을 내라고 ㅋㅋ

-이게 월드 클래스의 개미털기? 만 단위를 털어버린다고?

 “다들 입 좀 다물어봐. 나도 지금 존나 쫄리니까… 이대로 기절한 척해서 마을까지 업혀 가고 싶다. 아니, 연구실에 다시 가느니 업혀 가는 게 아니라 이대로 질질 끌려가도 좋은데.”

그 불온한 기색을 눈치챈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등 뒤에서 살벌한 중얼거림이 들려온다. 하긴 천하의 레베카가 잔뜩 삐져서 심통을 부리다 말고 질색을 하며 도망을 칠 정도니 말 다 했지.

한세아의 의견에는 나도, 일행들도 찬성하는 눈치다. 케이든은 레베카 용병단에서 한 번 겪어보았고, 나머지 일행들은 안전지대에서 한세아와 함께 휘말린 적 있으니까.

파티의 리더는 아니지만, 파티를 지도하는 상급 모험가로서, 이제 중급 모험가가 된 우리 파티원들을 지켜야 할 의무가 내게는 있었다. 몬스터로부터의 보호가 아니라, 괴짜 마법사의 정신 공격으로부터 탱커답게 일행을 지키는 거지.

 “아 참, 저 제단 아래로 내려가면 지하 공동이 나오는데 대충 보니 제단보다 넓던데요. 아마 지하까지 땅을 파고 대규모 공사를 한 것 같아요.”

 “오크가, 제단을 세운 것으로도 모자라 굴착과 토목 공사를…? 흠, 알겠네. 가볍게 살펴보기만 하고 곧바로 게이트 제작에 착수하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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