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이 앞에 남은 건 보스전뿐.
‘저 미친년이, 진짜?!’
안테노르는 광역기를 사용한 직후니 반쯤 탈진 상태일 것이다. 애초에 우리 파티에 의뢰하는 방식으로 계약을 맺었으니 끼어들어도 상관없고. 하지만 폭음과 후폭풍 속에서 자세를 낮추고 네 발로 짐승처럼 뛰어 들어간 레베카는 이야기가 다르다.
그녀가 아무리 눈 뒤집힌 짐승처럼 군다 해도 수백 명의 용병을 이끄는 용병단주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 뜻은 그녀의 밑에 머리를 좀 쓸 줄 아는 놈들이 여럿 있다는 뜻이고.
레베카가 술값을 받겠다며 오크 보스의 모가지를 뜯어버리면, 길드와 계약한 레베카 용병단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토벌 의뢰에 대한 대가를 주장하겠지. 레베카가 처리했으니 전리품은 레베카 용병단의 것이라고 주장하면 누가 반박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달린다. 발밑으로 느껴지는 단단하면서도 매끈한, 녹아내린 피라미드를 밟고 거의 날 듯이 도착한 피라미드의 꼭대기. 습관적으로 한세아의 방송창을 켠 채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이번에는 반응속도 조아따
-살다살다 피라미드 탐험뱅송을 보게되네
-방금 빨간색이 슉 지나갔는데 설마 레베카눈나떴냐?
-빨간색은세배빠르거든요
-고위 마법 보니까 바지 축축해지긴 한다 뽕맛쥑이네
눈앞에 보이는 건 불길하기까지 한 새빨간 마법진이 도배 된 꼭대기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컴컴한 입구. 구조도 피라미드를 본떠왔는지 꼭대기에 어두컴컴한 입구로 들어가 아래로 향하는 모양새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다른 모험가들보다 먼저 정신을 차리고 피라미드를 향해 뛰어오는 일행들이 보인다. 보호막과 쉴드 마법 덕분에 후폭풍에 휘말리지도 않았고, 고막을 찢어버릴 수준의 소음에 뇌가 흔들리지도 않아 곧바로 따라오는 그녀들.
순간 이동 기능이라도 있는지 어느새 등 뒤로 따라붙은 카메라 드론을 꼬리처럼 달고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무슨, 세 걸음 만에 꼭대기에 가 있어?!”
-방금 오별따리가 번개폭탄도 쐈는데 육별따리 점프에 놀라는게 맞냐?
-그래서롤랑은저번개맞아도안죽냐3182931번물었다
-걍 카메라 회수해라 머 보이는게 없네
-롤랑한테 불 좀 키라고 전해줘
-어둠의 자식 생각나네 불 좀 켜고 살아라
[담임선생님이 1,000원 기부!]
불 좀 켜고 살아라. 너희가 무슨 어둠의 자식들이냐?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지는 익살맞은 남자의 목소리. 세상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게 있다는 걸 엉뚱한 방향으로 확인한 덕분에 크흡, 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열심히 뛰다 말고 실실 웃는 게 이상해 보일 법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복도에 몸을 처박아서 기합성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가는 시청자들.
마법진이 잔뜩 그려진 피라미드형 제단답게 내부에는 마력을 이용한 조명이 있었던 것 같지만 바깥에 떨어진 번개가 문제였던 것 같다. 벼락을 맞은 가전제품이 멀쩡할 리 없는 것처럼 고위 마법 세례를 받은 피라미드 내부도 정전 당한 아파트 같은 꼴이 된 거지.
그 덕에 어둑어둑한 복도를 몸으로 들이받으며 달리고 있었다.
-어두워서 뭣도 안보이는데 소리만 들으면 롤랑이 멀 존나 들이박고있음
-눈이 암순응하기 전에 그냥 몸으로 때워버리는 듯?
-몸이 나쁘면 머리가 고생한다더니 존나 편하게가네
-ㅋㅋ 라이트 마법 웨배움? 걍 뛰어가면 되는데
-라이트 들고 뛰어가는 한세아보다 눈감고 달리는 롤랑이 빠르네
“앞에서 들리는 쿵쿵 소리가 걍 들이받으면서 가는 소리야?”
다행인 점은 눈이 조금씩 어둠에 적응하며 조금이나마 앞이 보인다는 것과 피라미드 지하로 내려가는 구조인지라 나선 계단처럼 단순하게 빙글빙글 아래로 돌아 내려가는 통로라는 것.
복도의 벽에 어깨를 들이박는 일이 줄어들고 어둠에 익숙해지자 점점 발에 가속도가 붙는다. 그런데도 앞이 조용하다니, 레베카 이건 네 발로 짐승처럼 뛰더니 진짜 야행 동물처럼 어둠 속을 달린 건가.
딜러용 스킬 중에 매의 눈이나 야수의 안광 따위의, 눈 관련된 스킬이 있던데 그런 걸 가지고 있기라도 한 걸까. 야전에 능숙한 용병이니 어둠 속에서 시야를 확보하는 요령이 있을지도 모르고.
그렇게 한참을 뛰어 내려오자 등장하는 널찍한 공터.
“뒤져어어어엇―!”
아무래도 피라미드를 넘어 지하까지 내려왔는지 엄청나게 넓은 공터에서는 역시나 레베카가 붉은 머리카락을 짐승 갈기처럼 휘날리며 날뛰고 있었다.
어둑한 공터를 조금이나마 비춰주는 건 토템 위에 올려진 화로. 일렁이는 불꽃이 미처 몰아내지 못한 어둠 속에서 새빨간 갈기가 불똥처럼 휘날릴 때마다 수 마리의 오크가 연기로 변해 바스러진다.
소환수로 앵벌이 하는 걸 막기 위해서인지 마석도 부산물도 하나 없이 사라지는 변종 전사와 변종 주술사들.
“이 미친 인간이! 감히 내 대업을!”
“대업이고 나발이고, 술값 내놔 씨발놈아!”
레베카와 맞서는 건 오크… 추장이라고 해야 할까? 인디언의 머리 깃털 장식 같은 걸 치렁치렁 매달고 있는 덩치 커다랗고 새카만 오크가 하나 있었다. 주술사인지 흑마법사인지는 몰라도 손을 휘두를 때마다 소환되는 변종 오크들.
퀘스트 때문에 생포했던 오크 주술사처럼 문신이 그려져 있고 색이 진하며 덩치가 큰 오크 전사. 하지만 덩치가 조금 커지고 보스에 의해 강화되었다 해도 결국은 오크다. 눈 뒤집힌 5★ 근딜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지.
‘보스 막타는 안 뺏겼네.’
일정 시간마다 쫄을 무한 소환하는 기믹의 보스처럼 보이는데, 다행인 점은 레베카가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소환된 전사들을 손수 때려죽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보스로 보이는 오크 추장은 열심히 꿱꿱거리며 잡몹을 소환 중.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며 왕족 시해를 노리는 놈이다. 부하를 소환하는 걸 멈추는 순간 머리와 몸통이 이별한다는 걸 눈치챘는지 식은땀까지 흘려가며 소환에 박차를 가하는 모습이 안쓰러울 수준이다.
“네놈들만 아니었다면, 내 원대한 계획이 이루어졌을 텐데! 우리 종족의 숙원이!”
당장이라도 뛰어들어서 보스를 박살 낼까 생각했는데, 어지간히 억울했는지 놈이 빼애액- 하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악당이 주인공에게 제 계획을 낱낱이 설명하는 전형적인 모습처럼?
레베카도 변종 오크의 손맛을 보느라 보스를 죽일 생각이 없어 보여 이어지는 놈의 말을 기다렸다.
“축복받은 숲을 차지하고 증오스러운 인간의 왕국을 무너트릴 수 있었을 텐데!”
아니, 그게 될 리가 없잖아.
머리가 좋은 만큼 제 죽음에 대해 직감을 한 건지 말이 많아진 오크 추장. 하지만 오크는 오크였다는 걸 증명하듯이 이 오크 추장의 계획은 너무나도 허무맹랑한 것이었다.
여신의 축복을 받은 오베르뉴 숲은 말 그대로 축복받은 숲. 인간의 관리가 없어도 식물이 무럭무럭 자라고 달콤한 열매가 맺히며 작은 짐승들이 번창하는 장소다.
그곳을 거점 삼아 기본적인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 무한히 소환할 수 있는 변종 오크의 군세로 왕국을 전복시킨다― 라는 게 놈이 열심히 떠들어대는 원대한 계획이다. 물론 탑 내부에서의 경험밖에 없는 우물 안 개구리의 망상일 뿐.
“…참, 헛된 꿈을 꾸는 몬스터로군요.”
“애초에 그 오크 군대, 마법사 한 명한테 쓸려나갔잖아.”
뒤늦게 합류한 일행들이 그 절규에 가까운 외침을 듣고 작게 중얼거린다. 안타깝게도 이곳은 산을 가르고 하늘을 뛰노는 초인이 존재하는 판타지 세상. 변종 오크를 무한대로 소환할 수 있다 해도 의미가 없다.
녀석이 보고 겪은 인간은 하필이면 두 종류. 20층에 상주하는 ‘중급 모험가’와 조사를 위해 파견된 ‘여기사’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런 귀찮은 잡일을 하는 여기사가 기사단의 고위 간부일 리 없다. 평민인 모험가들과 함께 숲에서 오크의 흔적을 탐색하는 임무를 맡았으니 종자 딱지를 막 떼어낸 말단 기사였겠지.
모험가도 기사도 변종 주술사를 통해 사냥할 수 있었으니 인간을 얕잡아 볼 수밖에. 상급 모험가와 고위 마법사, 왕국 기사단을 상상하지도 못한 오만한 오크 대가리의 결과가 이 꼴이다.
“슬슬 듣고 싶은 이야기도 다 들었으니 처리할까.”
당장 보스 몬스터를 죽이러 갈 것처럼 굴더니, 덩치 큰 변종들을 맨손으로 패 죽이는 게 마음에 들었는지 소환된 몬스터만 열심히 때려잡는 레베카. 그 덕에 하소연에 가까운 계획 설명을 끝까지 들었다.
시간상으로 슬슬 한세아 이후 다른 모험가들이 안쪽으로 난입할 수 있는 타이밍이다. 따라서 방패와 철퇴를 꾸욱 고쳐잡고 앞으로 나서니 무언가가 내 앞을 막아세운다.
열심히 변종 오크를 때려잡던, 레베카가.
“음?”
“야, 좀만 기다려.”
“뭘 기다립니까, 대체.”
“저거 좀 특이한 것 같은데 반씩 나눠 먹자고, 인마. 척하면 척해야지 37층에서 내려가더니 감 다 죽었네.”
보스를 반씩 나눠 먹자는 게 무슨 소리인지 몰라 당황했지만, 이번에는 한세아가 눈치 빠르게 그녀의 말을 알아들었다. 카메라와 함께 앞으로 나서 레베카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는 한세아.
“반씩 나눠 먹자는 게, 설마 저 오크를 생포하자는 뜻인가요?”
“엉, 그거야. 니가 롤랑보다 낫네.”
“얕보지 마라, 인간 놈들아!”
“아오 씨…. 야, 롤랑! 네가 저거 변종만 좀 처리하고 있어 봐!”
오크 보스를 무슨 꿔다 놓은 보릿자루 취급하는 레베카가 특유의 껄렁한 말투로 한세아에게 설명을 시작한다. 우리가 오크 주술사 변종을 생포했던 것과 같이, 저런 특이 개체는 부산물보다 생포하는 게 훨씬 비싸게 팔린다는 이야기.
마탑에 실험체로 넘겨도 좋고, 탑 밖으로 나갈 수 있다면 왕국에 넘겨서 집단으로서의 신용과 명성을 얻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