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테노르가 샤를롯의 연구실 문 앞에서 뗑깡을 부린 이상 소문이 퍼지는 건 순식간이겠지. 샤를롯도 그 점을 알고 있는지 분하다는 듯 입술을 짓씹는다. 안테노르가 지위로 그녀를 찍어누르진 않지만, 귀찮게는 굴 수 있으니까.
열어달라고 무릎을 꿇고 방문을 두드리는데, 고위 마법사의 그런 추태가 소문이 안 날 리 있나. 경비병들이 숙덕대고 수정구를 관리하는 마법사도 입이 근질거릴 텐데.
“좋아요. 마탑이 전부 달려드는 것보다는 안테노르 님 한 명과 엮이는 게 조금 더 나을 테니까…, 어쩔 수 없죠.”
샤를롯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타이밍 좋게 똑똑- 노크 소리가 울린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건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피곤한 안색의 한세아와 싱글벙글 웃고 있는 안테노르.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퀘스트 창이 새로 갱신된 모양이다.
※
그렇게 한 번 대화가 시작되니 지진 부진하던 퀘스트의 흐름이 급류를 탄 듯 빠른 속도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모험가 길드가 고용한 수십 명의 레베카 용병 단원들이 20층을 헤집고 다니고, 왕실 기사단의 개입을 눈치를 챈 귀족들에게 고용된 모험가들도 20층으로 온 상황. 거기에 더해 안테노르의 조수 마법사들까지 숲을 뒤지기 시작했다.
…연구실에서 혹사당하다 말고 육체노동까지 하게 되다니, 불쌍한 놈들.
“오크다!”
“주술사! 주술사는 없나?”
“이런, 저놈들이 주술사만 들고 튄다!”
“놔둬! 평범한 주술사다, 색이 옅어!”
그러다 보니 20층에는 오크보다 사람이 많아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우리 파티도 탐색하다 보면 모험가와 오크를 거의 3:1 비율로 만났으니 말 다 했지. 아는 얼굴도 벌써 수십 번이나 숲속에서 마주한 상황이다.
물론 사람이 많다고 해서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우리 파티에게는 퀘스트를 진행 중인 플레이어가 있었으니까.
[어째서 오크 주술사는 포로를 감금해 둔 걸까. 숲에 있는 수상한 제단 때문일까…?]
안테노르와의 대화 이후 다시 갱신된 퀘스트 창이 대놓고 숲의 제단을 찾으라고 지시했거든. 이에 화색을 띤 한세아가 일행들에게 수상한 마력을 감지했노라 말하자 의심하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 그녀를 믿고 따른다.
만월 늑대를 사냥할 때도 저렇게 지팡이를 치켜세운 채 추적했으니 이번에도 그러려니 하고 믿는 것이다. 우글우글한 모험가와 용병들에게 위기감을 느꼈는지 대놓고 퀘스트 창과 미니맵을 열고 열심히 걸음을 옮기는 그녀.
[어째서 오크 주술사는 포로를 감금해 둔 걸까. 숲에 있는 수상한 제단 때문일까…?]
[숲의 깊숙한 곳, 수상한 제단 앞에서 대규모 전투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렇게 지팡이를 치켜세운 채 앞장선 한세아의 화면에 퀘스트 경고창이 갱신 되는 것과 동시에 그레이스가 무언가를 감지한다.
“앞쪽에 대규모 전투가 일어나고 있어. 그런데, 수가 이상하게 많은데…? 지난번에 봤던 오크 부락보다 그 수가 많은 것 같아.”
“이런, 다른 모험가들이 뭘 찾았나 본데.”
-아니 여기사랑 이야기한지 하루밖에 안지났는디
-막타 뺏기려하면 경고창 살벌하게 뜨네 ㅋㅋㅋㅋ
-퀘스트창 갱신된거보면 스토리진행 아님? 무조건 먼저 찾나본데
-진짜 모험가들이 못찾을때까지 운빨좆망리세겜 해야될듯?
-위치 찍어뒀다가 1리셋은 무조건하것네
안전지대에서 나와 퀘스트 창을 보고 제단을 향해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는데, 벌써 다른 모험가들이 선수를 친 상황. 그 어마어마한 속도감에 시청자들의 한탄이 마구 올라온다. 한세아가 타임 어택에 실패하면, 6★이 없는 시청자들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니까.
물론 스토리상의 강제 패배처럼 모험가들이 등장하는 게 퀘스트 순서상 정해진 것 아니냐는 채팅도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결국 우리보다 먼저 온 놈들이 있다는 것.
슬슬 그 소란스러움이 내게도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졌기에 한세아와 그레이스를 제치고 내가 앞으로 달려나갔다. 기나긴 숲이 끝나고 갑작스럽게 확 트이는 시야. 무언가 수상하다는 걸 증명하듯 어둑해진 숲.
그리고 눈앞에 등장한 피라미드.
…피라미드?
“뭐야, 저건…?”
“제단이 엄청나게 크네?!”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아니라 마야의 피라미드를 닮은 커다란 석조 건물이 눈앞에 등장한다. 제단이라더니, 저런 제단일 줄은 몰랐지. 어두운 숲속에 떡하니 등장한 마야 피라미드와 그 꼭대기로부터 뛰쳐나오는 오크들.
마야 피라미드에 대해 모르는 일행들은 그 커다란 크기와 많은 수의 오크들에게 놀랐고, 나와 한세아는 그냥 대놓고 디자인을 베낀 모습에 놀랐다. 커다란 피라미드에서 돌계단을 타고 뛰쳐나오는 문신투성이의 오크 전사라니, 이런 걸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냐고.
“이봐! 우리 좀 도와줘! 보상을 욕심낼 생각은 없으니까, 제발!”
우리가 피라미드를 발견하고 놀랐듯이, 피라미드 앞 공터에서 오크와 맞서 싸우던 모험가 파티도 숲속에서 공터로 튀어나온 우리를 발견했다.
두 명의 탱커와 한 명의 창잡이, 그리고 궁수 한 명. 꽤 유능한 파티인지 마법사도 사제도 없이 고작 네 명이서 무수히 쏟아져 내리는 오크를 상대로 버티고 있었다. 물론 버티기만 할 뿐 조금씩 물러나면서 포위되는 게 위태로워 보이는 모험가들.
-나 이거 공포영화에서 본 장면 같은데
-저게 오크야 좀비야
-아니시발 퀘스트 존나 어지럽네 ㅋㅋㅋㅋ
-안에 들어가면 파라오크 있냐?
-시발 제단은 제단이긴 한데 얼탱이가 없네
그 무수히 많은 오크 대가리의 숫자에 시청자들이 반쯤 해탈한 상태로 채팅을 친다. 오크 부락 하나는 대놓고 수십 마리의 오크 전사가 있더니, 제단에 오니 이제는 백 단위를 넘어 어쩌면 천 단위의 오크가 쏟아지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게임사가 유저를 엿 먹이기 위해 만든 건 아닌지 피라미드 주변의 숲속에서 다른 모험가들과 용병들이 하나둘 뛰쳐나오기 시작한다. 뀍뀍 울어 재끼는 오크가 이만큼 모여 있으면 탐색꾼이 없어도 반경 수백 미터 안에서는 소란을 듣고 찾아올 수 있겠네.
그리고 그 소란을 듣고 찾아온 것은 20층의 모험가들뿐만이 아니었다.
“으하하하하햣! 처음 보는 구조의 제단에서 오크가 마구 샘솟는다니?! 이것 참, 흥미롭군!”
5★의 마법사이자 별의 버프를 받기 전부터 43층에 도달한 마탑의 최고위 마법사. 수다스러운 영감님처럼 느껴지지만, 탑에서 머무는 만큼 실전 능력 하나는 마탑 제일가는 노괴가 등장한 것이다.
허공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안테노르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아, 이건 일종의 이벤트 컷씬이구나.
저 무수히 많은 오크를 플레이어가 전부 잡을 필요는 없겠네.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된 20층의 이변에 흥분했는지 마력을 미친 듯이 끌어올린 안테노르에 의해 숲의 어둠이 한층 더 짙어진다. 마치 사악한 마왕이라도 강림하는 것처럼 피라미드 위로 몰려드는 먹구름.
“어, 엎드려! 아니면 나무 뒤로 숨어!”
“저 미친 영감이 진짜?!”
어둠과 뇌전을 품은 먹구름이 피라미드 위를 덮어버리자 사색이 된 모험가들이 그 즉시 몸을 돌려 제단에서 멀어진다. 돈과 의뢰 때문에 20층에 온 모험가들인 만큼 그들을 보호할 수 있는 사제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쪽은 쉴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한세아와 보호의 성법에 특화된 아이린이 있지. 말 하지 않아도 눈치를 챘는지 곧바로 뭉쳐 마법과 성법을 발휘하는 그녀들.
새파란 마나 쉴드가 일행들을 감싸고, 새하얀 신성력 보호막이 일행들을 넘어 앞에서 오크를 막아주고 있던 이름 모르는 모험가 파티까지 덮어버린다. 풍선 부풀어 오르듯 영역을 넓힌 성법에 오크들이 뒤로 밀려나 나뒹군다.
“가, 감사합니다. 수녀님.”
“쏟, 아, 져, 라아아아아―!”
바닥에 주저앉은 창잡이의 감사 인사에 아이린이 대답하기도 전에 세상이 갑작스럽게 백색으로 물든다. 피라미드 크기의 먹구름에서 일시에 쏟아져 내린 벼락이 오크를 지져버리고 피라미드의 돌계단을 반들반들하게 녹여버린 것이다.
삐이이이이익―
골을 뒤흔드는 굉음에 비틀거리는 일행들을 살펴보자 갑작스럽게 무언가가 보호막을 따다닥- 두드린다. 창공에서 내리 찍힌 뇌전의 후폭풍으로 마석이 마치 총알처럼 날아들기 시작한 것이다.
-연구실에 있을 할배 뛰쳐나온거 보면 NPC가 물량 밀어주는거 맞는듯
-저게 마법이라면 내 파티원이 쓰는건…?
-레벨업하면 우리도 저거 쓸 수 있나
-아니시발저게5★이면 6★롤랑은대체먼데?저거맞고버텨설마?
-아이린마망이 저정도는 아닐텐데, 같은 성급이여도 능력차이 조지게있나봄
그 많던 오크들은 녹아내리다 못해 부산물조차 온전히 남기지 못했고, 먹구름을 보고 도망치던 모험가들은 후폭풍 때문에 볼링핀처럼 숲속을 나뒹군다.
“윽, 나 먼저 간다!”
“롤랑?”
그리고 나는 지글거리는 피라미드를 향해 달려들었다.
번쩍이는 번갯불 속에서, 시뻘건 무언가가 네 발로 뛰듯이 피라미드 안으로 뛰쳐 들어간 걸 보았기 때문에.
10층의 만월 늑대와 20층의 오크 왕국은 엇비슷한 면모가 있다.
탑의 마력을 이용할 줄 알게 된 특이 개체가 탑 밖으로 뛰쳐나온다. 이에 모험가 길드에서 토벌 의뢰를 내걸게 되며, 무수히 많은 NPC가 플레이어의 경쟁자로서 끼어들게 된다. 이후 보스와의 조우 직전 이벤트 신이 하나 등장하지.
만월 늑대의 경우 달려들어서 쥐어박으려 해도 한 번 울어 보이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오크 왕국의 경우 플레이어가 감당할 수 없는 오크들의 군세가 쏟아져나와 고위 마법사의 손에 싹 쓸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