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화 (84/175)

 “그러게. 탑 안의 오크가 왕가의 축복 받은 숲에 숨어들다니. 솔직히 다른 사람이 이야기했으면 주정뱅이의 헛소리라고 생각했을 거야.”

 “최대한 빨리 이변을 해결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그렇게 시청자들이 오크에게 분노하고 있는 사이 일행들은 오베르뉴 숲 때문에 당황하고 있었다. 특히 아이린은 사명감에 눈동자가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게 보일 정도. 여신에게 축복받은 숲을 오크가 더럽혔으니 수녀로서 좌시할 수 없겠지.

왕국 사람들에게 유명한 축복 받은 숲에 오크가 등장했다니. 그래도 다행인 점은 사태가 커진 만큼 모험가 길드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는 점 정도?

그냥 오크가 오베르뉴 숲에 자리를 잡았다면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탑에서 나온’ 오크가 오베르뉴 숲에 자리를 잡는다면 정치적으로 귀찮은 이야기가 된다. 어쩌면 왕국이 모험가 도시의 자유를 침해할 핑곗거리가 생기게 될지도 모르지.

 “그래도 다행인 건 아직 오크 놈들이 활동하지 않았다는 거야. 자리를 잡았을 뿐이지 귀족과 왕족에게 덤벼들지는 않았어. 여기사를 왜 납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주술사가 데려와서 주술사의 집 안에 숨겨뒀다는 건, 사악한 의식이라도 치르려고 한 걸까요?”

 “하긴, 그 오크 놈들이 손도 대지 않고 곱게 납치해 뒀다는 걸 생각해 보면 제물 말고는 생각나는 게 없네. ”

히어로즈 크로니클인 이 세상은 히로인즈 크로니클을 배경 삼아 만들어진 판타지인 만큼 있을 건 전부 있었다. 수집 요소가 있는 씹덕 게임에 마녀나 흑마법사를 모티브 삼은, 음침하지만 색기 넘치는 누님 캐릭터는 반쯤 필수 요소니까.

로브인 척하는 신도시 미시룩 같은 걸 입은 누님들이 시약 냄비 앞에서 땀에 홀딱 젖어 몸매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던가, 반대로 장난기 넘치는 미소녀가 사실 위치크래프트의 천재라는 설정은 아주 익숙하지 않은가?

 “사악한 주술, 혹은 흑마법인가. 뭐가 나와도 이상하진 않겠군.”

 “뭐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니?”

 “왕국의 넓고 많은 숲 중 하필이면 여신에게 축복받은 숲에 자리를 잡았으니까. 주술적으로 의미가 있어서 그런 것인지, 흑마법사가 여신을 모독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오크라서 그런 것인지 알 수가 없어.”

한세아의 질문에 진지하게 답해주면서도 조금 헷갈린다. 이건 퀘스트가 더 진행이 돼야지 윤곽이 드러나겠는걸.

상대가 인간이라면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수상쩍은 집단이 왕족을 노리며 사악한 수단을 쓰려는 거지. 하지만 상대가 오크라는 점에서 10년간 쌓아 올린 상식이, 일종의 고정관념이 머리를 어지럽게 만든다.

어떻게, 오크가?

추리 소설에 나온 밀실 살인 사건의 범인은 사실 피해자가 키우는 새끼 고양이(생후 4개월)와 공범 앵무새(2세)였습니다― 같은 느낌. 지능적으로 불가능하고 왜 그런지도 모르겠으며 개연성은 밥 말아 먹은 느낌이라고.

 “하긴, 상대가 오크니까요.”

 “오크가 신성 모독과 왕족 시해라니…. 참 이상한 일이긴 하네요.”

 “그래도, 목책에 있던 놈들은 조금 더 똑똑하고 군인 같아 보이긴 했어. …결국, 오크였긴 했지만.”

저벅저벅, 숲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일행들. 샤를롯과 마리는 안전지대에 남겨둔 채 우리는 탑 밖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유는 단 하나, 안테노르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변종 주술사를 생포해 와서 샤를롯이 관찰하기 시작한 상황이다. 연구실 내부에 있던 안테노르가 소식을 들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테지. 거기에 휘말리면 오늘 하루의 모험담을 처음부터 끝까지 몇 번이고 반복해서 설명해야 할 수도 있다.

이미 한 차례 시달린 일행들이라 그런지 안전지대에서 벗어나는 건 만장일치로 찬성표를 받았다. 변종 주술사를 챙겨간 샤를롯에게 정보의 독점을 요구하기도 했고.

 “샤를롯 양과 안테노르 님이 뭐라도 알아냈으면 좋겠네.”

 “왕실 기사단이 움직이는 것보다 빨리 움직여야 하니까. 이러다 보상을 홀랑 빼앗길 수도 있겠어.”

 “으, 무슨 경쟁자가 이렇게 많아?”

 “모험가의 삶은 원래 경쟁자로 가득한 거야.”

 “언니, 그 경쟁자가 왕실 기사단인 건 좀 너무하지 않아요?”

20층을 곧바로 벗어나 아래로, 아래로 향하는 일행들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식량을 챙기고 탑에서의 숙박을 각오한 채 20층에 왔건만, 하루 만에 커다란 실마리를 찾아냈으니까. 레베카에 이어 왕실 기사단이라는 라이벌이 등장하긴 했지만, 정보를 많이 얻었으니 상관없겠지.

조세핀이라 불린 여기사가 돌아간다 해서 왕실 기사단이 곧바로 움직일 리는 없었다. 높으신 분들의 엉덩이는 무거운 게 상식이니까. 여기사 한 명의 정보 때문에 곧바로 우르르 움직이진 않겠지.

적어도 사실 확인을 위해 한 번 정도는 더 조사하려 하거나, 모험가 길드에게 정보를 요구하지 않으려나. 그런 점을 생각해 보면 아직 승산은 있다.

높으신 분들의 엉덩이가 무거운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상식이지만, 그 묵직한 엉덩이가 가벼워지는 경우 또한 있다. 지금처럼 더 높으신 분들에 의해 자기 밥줄이 날아가게 생긴 상황이 대표적인 예시겠지.

 “벌써 원정대가 꾸려졌다고?”

 “원래 위층으로 향하려던 용병단의 보급대와 급히 계약을 맺었대. 레베카의 용병단이라던데, 롤랑이 아는 사람이지?”

 “아, 그렇게 된 건가.”

하필이면 기호품 마차를 싸악 털려버린 레베카의 용병단. 그리고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 왕실이 개입하기 전에 사태를 해결하려는 모험가 길드.

타이밍이 딱 맞아떨어지는 모양새라서 그런지 금전적인 손해를 보더라도 용병들과 싸그리 계약한 모양이다. 아마 모험가 길드 말고도 후원을 하는 귀족들도 급히 지갑을 열었겠지. 만월 늑대를 사냥한 이후 우리를 찾아온 허영심 가득한 귀족들이.

돈만 있으면 모험가들을 통해 명예를 구매할 수 있는 자유 도시의 삶을 만끽하던 귀족들이다. 인제 와서 왕국이 모험가 길드에 손을 뻗는 걸 보고만 있을 리 있나.

 “이번에도 원정대에 껴 있다가 오크 대장 모가지를 쓱싹 하려고?”

 “그야 당연하지, 엘리스. 만월 늑대를 잡았더니 게이트가 튀어 나왔잖아. 이번에는 마법사들이 뭘 만들어 낼지 기대하고 있다고.”

 “하긴, 그런 기대감을 품고 다들 20층, 30층으로 내려온 사람이 꽤 많더라.”

일행들이 합류하기 전의 이른 아침. 엘리스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퀘스트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대충 알 수 있었다. 역시 길드 접수원들의 왕언니다운 정보력이네.

모험가들도 사람이다 보니 계획적인 일정으로 살다 보면 자주 보게 되는 접수원이 생긴다. 탐험과 휴식을 반복하며 살아서 돌아올 때마다 만나는 미녀 접수원이 있다면 반하지 않더라도 호감이 쌓이는 건 인간으로서 당연한 이야기지.

모험가가 무슨 극비사항을 요구하는 정보원도 아니다 보니 미녀 앞에서는 입이 가벼워지기 마련이다. 요즘은 30층으로 내려왔다, 한동안 20층에서 더는 올라가지 않을 것 같다. 그런 사소한 잡담들이 모여 엘리스에게로 흘러가는 것이다.

 “이번 원정대는 지난번보다 참가자가 많겠네.”

 “그렇지? 귀족들이 지갑을 열어서 용병도 잔뜩 고용했고, 10층에서의 일 때문에 다른 모험가들도 욕심이 좀 생긴 모양이야. 그런 너희 파티에 온 의뢰가 하나 있는데.”

 “의뢰?”

 “그래, 의뢰. 탑에서 무슨 일을 하고 다니면 갑자기 왕실 기사단에서 의뢰를 보내는 거야?”

왕실 기사단에서 모험가 한나 파티를 지목한 의뢰. 누가 생각해도 어제 귀환한 여기사 조세핀과 관련이 있겠네. 하나둘 합류하기 시작한 일행들과 함께 테이블에 머리를 맞대고 의뢰서를 읽어보았다.

여신님의 은혜로운― 생략하고, 왕실의 이름 드높이는― 여기도 생략하고. 온갖 미사여구를 제외하다 보니 절반쯤 생략하고 넘겨버린 기다란 편지지.

필요 없는 부분을 싹 쳐내고 읽은 결과 그들이 내건 의뢰 조건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만월 늑대를 사냥하였고 여기사를 구출했으며 변종 주술사를 생포한 모험가 한나 파티에게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을 요청하는 의뢰였으니까.

 “길잡이라, 받아들일까요?”

 “아니, 받아들이지 않는 게 더 좋겠어. 다행히 왕실의 이름으로 내려온 게 아니라 기사단의 이름으로 길드에 온 의뢰네.”

 “음? 보상이 꽤 후한데 어째서?”

자연스럽게 거절하려는 내 말에 일행들의 놀라서 나를 바라본다. 길 안내만 해도 금화를 쥐여주겠다는 의뢰를 왜 거절하냐 이런 뜻이겠지. 그 순진한 모습이 귀엽다는 듯 배시시 웃어 보이는 엘리스.

역시나 미남 미녀를 선호하는 그녀답게 기다란 의뢰서를 콕콕 손가락으로 짚으며 나 대신 설명을 해 주기 시작한다.

 “여기를 보면 ‘왕실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문구가 있지? 기사단이 왕실을 들먹이는 경우는 공적을 양보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야. 길잡이로서 금화를 받는 대신, 의뢰 도중 얻게 되는 공적은 전부 독식하겠다는 말이지.”

 “그렇다는 건…?”

 “아무래도 만월 늑대를 사냥하고 그 부산물로 게이트를 만든 일 때문인 것 같아. 탑 내부로 향하는 게이트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수익들. 수도의 귀족들이 탐낼 만한 이야기지?”

이 의뢰를 받아들이면 플레이어는 대량의 금화를 손에 넣을 수 있지만, 추가 보상은 받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20층 게이트 이용권, 스킬 포인트, 장비 업그레이드 등등 돈으로 살 수 없는 귀한 보상들을 포기할 순 없겠지.

결국, 왕국의 기사단이 라이벌이 되었다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공적을 전부 양보하는 대신 금화를 손에 쥘 것이냐, 아니면 원정대에 참가해 오크 보스의 목을 노려 보상을 독식할 것이냐.

 “이건 쉬바, 못 먹어도 GO를 외쳐야 하는 상황 아니냐? 게임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니고 여기서 쫄아가지고 빠꾸를 외친다고? 마! 막타 뺏기면 장소 외워뒀다가 리셋하면 되는 거야!”

-으딜 오크 상대로 여기사가 깝침?

-1위로 달리고 있는데 멈출 이유가 없제

-왕의 앞에 서지마라

-10층 보상 못먹은 사람은 골드 타먹겠는디

-동료 스노우볼이 어디까지 굴러가는건데

게이머이자 방송인인 한세아에겐 고민의 가치도 없는 질문이었다.

원래 RPG 게임이란 게 그런 것 아니겠는가. 최대한 욕심을 부렸다가 실수하면 세이브 포인트로 돌아가는 거지. 리셋 버튼 한 방이면 그날 아침으로 돌아갈 수 있는데 도전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조금 진심으로 뛰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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