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되게 이상한 장면이구나.
아이린은 무려 5★의 ‘예비 성녀’지만 스스로 이야기한 것처럼 치유의 성법에는 약한 모습을 보인다. 최강의 보호막, 평균 이상의 정화, 평균 이하의 치유, 불가능한 강화까지. 그러다 보니 기절한 여자를 치유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수밖에.
“옷이 지저분하군요. 아무래도 조금 씻겨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나가 있자, 케이든.”
“…아, 네.”
이럴 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깡통 전사인 나와 케이든이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동안 나머지 일행들은 바삐 움직인다. 전사라기보다는 남자라서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해야 하나.
주술사를 질질 끌고 연구실로 사라진 샤를롯과 달리 메이드 마리는 이쪽을 돕기 위해 남았다. 흙먼지로 지저분해진 옷을 벗기고 물수건으로 몸이라도 닦아 줄 생각인 듯 남자인 나와 남장 중인 케이든에게 슬쩍 눈짓을 보내는 마리.
“나는 묽은 수프라도 끓여 올게. 한나, 도와줄래?”
“아, 그러네. 깨어나면 뭐라도 먹여야겠죠?”
그레이스와 한세아는 인벤토리에서 냄비와 그릇, 밀가루 따위를 주섬주섬 챙기며 주방으로 향했다. 그와 동시에 장마철 빗줄기보다 거세게 쏟아져 내리는 채팅들.
-거 메이드한테만 일시키지말고 씻기는거 도와줘야지
-스프를 끓이든 사골을 우리던 카메라는 놓고가!!!!
-가슴에 무친련들… 아니 그냥 무친련들…
-솔직히 쪼오금 역하긴 해
-뇌절치다 고소장 받을 샛기들이 좀 많아진 듯?
게임이 19금 가상 현실 게임인지라 반강제로 19금이 걸린 방송이라 해도 대놓고 여자 알몸을 보여 줄 생각은 당연히 없겠지. 시청자 대부분도 그 사실을 알고 있어서 반쯤 장난으로 질타할 뿐.
…대부분의 시청자가 말이야.
“이야, 무슨 여름철 모기도 아니고 밴이 백 단위로 날아다니네. 잘 모르는 사람 있을까 봐 말하는데, 채팅창을 매니저 혼자 관리하는 거 아니다? 가상 현실 게임이 등장했는데 채팅창 관리 알고리즘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 채팅 관리 봇도 엄청나게 강화된 거 알고 채팅 쳐.”
한세아의 중얼거림이 빈말이 아니라는 것처럼 엄청난 속도로 차단당하는 채팅들. 사람의 마우스 클릭 속도로는 불가능한 속도에 다들 화들짝 놀란다. 시청자 수가 몇 배로 늘어난 김에 엄한 채팅을 쳤는데, 알고 보니 전부 검열당하고 있었다는 소리였으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시간은 흘러갔고 결국 기절해 있던 여자는 정신을 차렸다. 아무리 아이린의 회복 효율이 높지 않다지만 굶은 것 말고는 특별한 부상이 없었기에 생각보다 빨리 일어난 여인.
“크흠, 으…으흐……여기, 는?”
“20층의 안전지대예요. 당신은 오크에게 붙잡혀 있다가 모험가 파티에게 구출된 상태죠. 당신은 누구신데 오크에게 붙잡혀 있던 거죠?”
“샤를롯 양, 캐묻기 전에 몸부터 추스르게 해야겠어요. 자아, 자매님? 조금 식혀 두었으니까 천천히 마셔보세요.”
침대에서 겨우 정신을 차린 여자에게 아이린이 부드럽게 웃으며 수프 그릇을 내민다. 며칠 굶은 환자를 위해 묽게 끓인지라 아이에게 이유식을 먹이는 것 같네. 그 자애로운 모습에 어지럽던 채팅창도 잠시, 잠시… 멈출 리는 없구나.
마망에 대한 그릇된 성욕이 잔뜩 표출된 채팅창에 당혹한 한세아가 뒤로 한 걸음 빠져 시청자들을 말로 조지기 시작했다.
“흐, 감사합니다…. 혹시, 다른 사람들은…?”
“오크 부락에서의 생존자는 당신뿐이네요.”
“후, 역시 그렇게…, 되었군요.”
식은 수프를 마시고 기력을 되찾았는지 눈동자에 힘이 조금 들어온 여자. 특이하게도 모험가가 싹 다 죽었다는 말에 슬픔보다는 당연함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태연한 태도를 눈치챈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다들 설명을 기다리듯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다. 딱히 숨길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다 마신 수프 그릇을 내려놓고 목을 가다듬은 뒤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저는 왕국 제2 기사단 소속 조세핀이라 합니다. 임무를 위해 모험가를 고용해 오크들의 이상 현상을 조사하는 와중이었죠.”
동료의 죽음이 아니라서 그다지 슬퍼하지 않은 걸까. 그렇게 여기사 조세핀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자면 왕궁 인근에 갑작스럽게 오크의 무리가 출현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만월 늑대의 사건과 비슷하게 탑 내부의 오크가 탑 외부로 공간이동을 해서 뛰쳐나간 모양. 하지만 비슷한 사건이라 해도 파급력은 전혀 다르다.
영주 없는 자유 도시에 몬스터가 출현해 시민들이 피해를 본 것.
왕궁 인근에 몬스터가 출현해 귀족과 왕족을 향해 위협을 한 것.
왕실 기사단부터 귀족들의 호위병까지 있으니 피해는 당연히 후자가 적다. 하지만 신분제도가 있는 세상에서 시민의 피해와 왕족의 피해는 감히 같은 저울에 올려 둘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나지.
“이 때문에 모험가를 고용하여 조사하던 중 몇몇 오크 주술사가 떠돌이 오크 따위를 규합해 오베르뉴 숲에 거점을 만들려는 걸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조금 허무맹랑한 이야기인데. 나는 탑에 들어 온 적이 없는데 당신들이 탑에서 나를 구출했다고 말 하는군요.”
멋쩍다는 듯 웃어 보이는 여기사의 말에도 모두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물론 이쪽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한세아만 빼고. 탑 밖에서 납치되어 탑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보다 조금 무서운 이야기.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오베르뉴 숲이라는 단어가 무겁게 귓가에 때려 박힌다.
“만월 늑대처럼 탑 내부의 오크가 밖을 마음대로 오가는 건가? 알고 이용하는 거라면 오크가 만월 늑대와 뿔늑대보다는 똑똑한가 보네… 그런데 다들 왜 그래?”
“조세핀 양, 오베르뉴 숲이라고 하셨습니까?”
“예. 오베르뉴 숲이기에 왕국 기사단이 곧바로 조사에 착수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쪽 세상에 대한 상식이 부족한 한세아. 그런 한세아에게 콩깍지가 쓰여 있는 그레이스가 옆에 착 달라붙어 소곤소곤 설명을 시작했다. 오베르뉴 숲은 화전민 마을 출신 사냥꾼인 그레이스도 이름은 들어 본 장소니까.
오베르뉴 숲은 왕족들이 사냥하는, 여신에게 축복까지 받은 사유지다.
단순히 뿔늑대 같은 게 튀어나왔다면 상관없었겠지. 문제는 오크가 명백히 지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과 주술사가 전략 따위를 세운다는 점. 왕실 소유의 숲에 자리를 잡은 오크가 모험가는 사살하고 기사는 납치한다는 건―
“…오크 따위가 왕족 시해를 노린다고?”
“…세상에.”
놈들이 명백히 인간의 계급을 분류할 줄 안다는 뜻이다.
평민과 귀족을 구분할 줄 아는 오크가 왕궁 인근까지 쳐들어가서는, 왕실 소유의 숲에 숨어든 상황. 케이든의 황망한 중얼거림이 그제야 한세아가 상황을 파악했다.
※
기력을 되찾은 여기사는 안전지대의 경비들과 함께 오크 부락으로 되돌아가 제 장비를 챙겨 탑 밖으로 향했다. 마음 같아서는 붙잡아 놓고 꼬치꼬치 캐묻고 싶지만, 신분의 벽은 그리 쉽게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
고작해야 모험가가 궁금하다는 이유로, 왕실의 명을 받아 임무를 수행 중인 여기사를 붙잡아 둘 수 있겠는가. 보고 후 반드시 보상하겠다는 여기사가 돌아간 뒤 나는 반쯤 농담으로 한세아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 파티 리더, 정말 큰 일인데.”
“뭐가?”
“화가 잔뜩 난 레베카 말고, 눈에 불을 켠 왕실 기사단을 상대로도 경쟁하게 생겼으니까.”
다른 사람들도 이런 타임 어택 퀘스트를 하게 될까 궁금할 정도로 이상하게 흘러가는 메인 퀘스트. 레베카야 우연의 결과라고 쳐도 왕실 기사단의 개입은 다들 비슷할 것 같은데.
여기사 조세핀이 기사단으로 돌아가 보고를 한다면 기사단은 주저 없이 토벌 명령을 내릴 것이다. 고작해야 오크 따위가 감히 왕실의 축복 받은 숲을 더럽히는 상황인데 검을 빼 들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퀘스트 보상이 두 가지로 나뉘어 있는 건가? 일반적인 클리어와 추가 보상 같은 느낌으로.’
만월 늑대의 때도 그렇고, 이번 오크 사건도 그렇다. 플레이어가 스스로의 힘으로 타임 어택에 성공한다면 부가적인 보상이 붙는 거지. 게이트 이용비가 무료라든가, 부산물의 대가로 장비를 받고 스킬 포인트를 받는다든가.
반대로 플레이어가 타임 어택에 실패하면 외부의 요소가 개입하는 거지. 만월 늑대를 사냥하는 모험가와 마법사들, 오크를 토벌하는 왕실 기사단 같은 느낌으로.
유저를 위한 편의 시설인 10층 단위의 게이트는 언제나 개방되지만, 요금 무료나 장비, 스킬 포인트 추가 획득 같은 기회는 타임 어택에 성공해야 얻는 것 같은데. 탑의 꼭대기를 공략하라는 것부터 해서 타임 어택에 참 진심인 놈들이다.
“뭐 어쩌겠어. 샤를롯 양이 뭐라도 알아내길 바라는 수밖에 없지.”
-결국 여기서도 운빨ㅈ망겜이야?
-오크와 여기사가 등장했는데 게임이 이상하게 흘러가
-왕실 시해범(오크) ㅇㅈㄹ ㅋㅋㅋㅋㅋ
-오크와 공주님도 은근 클리셰아니냐
-오크와 (망국의)공주님과 여기사? 먼가 늘어나거든요
왕족이라는 단어 두 글자에 아리따운 공주님을 떠올리며 설레발을 치는 시청자들. 내가 알기론 왕국에는 왕자님들밖에 없을 텐데. 귀족 영애들은 있어도 공주님은 없을 거다.
카메라를 보고 말해 줄 수 없어서 참으로 안타까운 기분이었다.
오크가 여기사를 건드리지 않았으며 진지하게 왕족 시해를 노린다. 이 요상망측한 사태에 불타오르는 시청자들. 타임 어택을 하지 않으면 보상이 줄어들고, 타임 어택을 하려면 동료의 ★이 높아야 한다는 미친 운빨 게임이라는 건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이게 K-게이머인가?
어째서 오크가 여기사를 범하지 않는가에 대해 열렬한 토론을 하는 게 무슨 전문가들의 열띤 토의에 가까운 수준이네. 그 노도와 같은 기세에 한세아조차 채팅창 관리를 관리 봇에게 넘기고 한 걸음 물러날 뿐.
“왕실 기사단이라…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들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