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81/175)

특유의 자존심 때문인지 끝까지 멈추라는 말은 하지 않는 그녀.

벌벌 떠는 허벅지와 함께 그 탄탄한 엉덩이가 다시 한번 움직이기 시작한다.

사람을 멋대로 납치해서는 열심히 즐기고 떠나버린 레베카. 올 때도 숲에서 뛰쳐나와 사람을 보쌈해가더니 갈 때도 대충 손을 휘적거리고선 겅중겅중 뛰어서 숲속으로 사라진다. 무슨 괴담에 나올 법한 모양새네.

그 덕에 한세아의 방송을 보고 안전지대 근처에서 합류하자 오묘한 침묵이 나를 맞이한다.

[방송센스대신방송섹1스님 1,000원 기부!]

파티원이납치되어서험한꼴을봤는데리셋하고따라가보자

 “너는 왜 유료 밴을 자처하냐. 그리고 너희들이 백날천날 울부짖어도 절대 안 보여줄 거니까 알고 있으라고.”

-그레이스랑은 붙여주면서 레베카는 왜?

-달달한 데이트가 보고싶은거지 납치착정야스가 보고싶지않은 한세아

-아니 납치역강간착정야스를 못볼거라면 우리는 웨 살아가는가?

-채팅창 시발 미쳐서 날뛰네

-퀘스트진행도 날렸는데 아침으로 리셋하는거 어떰

남자가 아는 여자에게 끌려가 덮쳐졌다. 이 기상천외한 사태에 입을 열 수 있는 건 한세아와 시청자들뿐이었다. 그 말 많던 샤를롯조차 조용히 주변을 탐색할 뿐. 말없이 숲을 뒤지고 다니다 보니 오크 사냥꾼의 함정이 반가울 지경이었다.

 “앞에, 하나 있습니다.”

 “그러네. 저기 바위 뒤에서 이끼늑대 가죽을 뒤집어쓴 채 이쪽을 보고 있어.”

일행 중 유일하게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메이드 마리가 구덩이 함정을 발견한다. 그와 동시에 지난번처럼 오크 사냥꾼을 포착하는 그레이스. 함정을 찾아내고 그 뒤에 숨어있을 오크 사냥꾼을 발견하니 둘이 쿵짝이 잘 맞는다고 해야 할까.

대놓고 위협을 할 생각이었기에 놈이 숨어있는 바위를 대놓고 손가락질한 그레이스. 그녀가 가리킨 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 나가 구덩이를 훌쩍 뛰어넘었다.

발목을 꺾고 상처에 식물독 따위를 가볍게 흘려 넣으려는 악질적인 함정. 물론 위치를 알고 밟지 않으면 휘둘러지는 나뭇가지보다 위협적이지 못한 종류다. 제 위치가 발각되고 갑옷을 입은 내가 대놓고 전진하자 후다닥 도망치기 시작하는 오크 사냥꾼.

 “그래도 하나 죽었다고 실패하는 퀘스트는 아니네. 하긴 특정 오크 사냥꾼을 따라서 가는 게 아니라 일단 오크 사냥꾼을 추적만 하면 되는 퀘스트였으니까 당연하려나. 그러니까 계속 리셋, 리셋 도배하면 진짜 채팅 검열 들어간다.”

-정의는 죽었다

-어째서우리는짐승녀납치역강강착정야스를보지못하는가?

-이게 게임이야 포르노야

-과거에는 문어와 함께 음란물로 지정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르네 게임위가 요즘 조용하긴허네

적당한 속도를 유지하며 오크 사냥꾼을 추적함과 동시에 방송 화면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레베카의 난입 따위는 없었다는 듯 그레이스를 앞세워 자연스럽게 나를 따라오는 일행들. 샤를롯과 마리 또한 초보 모험가 딱지는 떼었다는 듯 제대로 따라오고 있었다.

평온한 일행들과 달리 공포에 질렸는지 참 부산스럽게 도망가는 오크 사냥꾼. 흔적을 지우는 은밀함은 꿈도 꾸지 못하고 소리까지 내며 열심히 달린다.

그래도 이번에는 숲에서 뛰쳐나온 레베카가 오크 사냥꾼의 목을 쳐버리는 일이 없었다. 오크 특유의 튼튼한 몸 덕분에 나뭇가지나 덩굴 따위의 방해에도 끄떡없이 계속해서 달려나가는 녀석.

 “아니, 근데, 오크 사냥꾼, 흐악, 진짜 빠르네…?”

-산악행군 2트째

-말하다가 숨넘어가겠다 ㅋㅋㅋㅋ

-한씨 입 다물고 달리라고

-스탯보정 있는데도 힘든가?

-보정을 해도 법사니까 아직 힘들것지 머

방송 화면 속 한세아가 숨이 넘어가기 직전까지 몰리고, 같은 마법사인 샤를롯의 안색도 조금 어두워질 무렵.

뀌이이익-

꿰엑, 꿱!

열심히 달리던 오크 사냥꾼이 거의 구르듯 오크 부락 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터 잡은 지 꽤 오래되었는지 이미 완성된 목책. 그 굳건한 자태에 바닥을 나뒹굴던 오크 사냥꾼이 이쪽을 바라보며 의기양양하게 웃는다.

물론 한낱 오크 따위가 나무 울타리를 믿고 꿱꿱 시끄럽게 굴어봤자 무서울 리 있나. 그러거나 말거나 뒤이어 합류할 일행들을 기다리며 슬쩍 방송 화면을 확인했다.

[20층에 등장하기 시작한 오크 주술사와 부락에 대한 단서를 찾자]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오크 사냥꾼을 확인해 보자]

[오크 사냥꾼들이 정보를 전달하는 부락이 있다. 이곳의 주술사는…?]

샤를롯의 중얼거림에 한 번 갱신된 퀘스트 창이, 내가 오크 부락을 찾아냄과 동시에 다시 한번 갱신되었다.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가 케이든에게 부축을 받은 한세아 또한 뒤늦게 알아차리고 헐레벌떡 뛰어오는 중이고.

 “흠, 역시나. 오크 사냥꾼도 주술사의 휘하에 합류한 건가. 이러면 오크 사냥꾼도 함께 등장한 건가, 아니면 오크 주술사가 등장과 동시에 주변의 몬스터에게 일종의 신호를 보내는 건가? 역시 등장의 순간을 정확히 포착해서 확인하고 싶은데….”

오크 사냥꾼의 난입으로 부산스러워진 부락 앞에 하나둘 도착하는 일행들. 그레이스가 가장 먼저 수풀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나머지 파티원들도 하나둘 얼굴을 내밀어 목책을 확인한다.

지난번 봤던 짓다 말아서 구멍이 송송 나 있는 목책과 대비되는 굳건한 나무 방벽. 슬쩍 열린 문과 그 안으로 쏙 들어가서는 이쪽을 노려보는 오크 사냥꾼. 목책 위로 올라서서 우리를 확인하는 전사들과 전투를 준비하는지 왁자지껄 시끄러워지는 목책 너머의 상황까지.

 “목책 앞까지 적이 왔고, 사냥꾼이 쫓겨서 들어왔음에도 전사들이 이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명백히 이상한 모습이군요.”

 “그러게. 정말 확실한 지휘체계가 있나 본데. 아니, 흥분했는데 달려들지 않는 걸 보면 지휘자가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 있으려나.”

오크가 익숙한 케이든이 가장 먼저 특이한 점을 발견하여 일행들에게 말해준다. 지금까지 만났던 오크들은 눈만 마주치면 가장 앞에 서 있는 내게 돌진하는 단세포 같은 면모가 있었지.

하지만 목책 위의 오크들은 야만인이라기보다는 군인에 가까운 모양새로 흥분조차 하지 않고 이쪽을 냉정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게임식으로 비유하자면 3단계로 나뉜 기분이네. 평범한 오크를 기준으로 잡는다면 약화된 몬스터는 떠돌이 오크, 강화된 몬스터는 눈앞에 있는 …아직 명칭이 정해지지 않은 놈들, 이런 식으로.

 “놈들이 생각보다 많으니 내가 먼저 들어가서 놈들을 처리할게.”

 “혼자서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놈들이 사방팔방 도망만 치지 않는다면야.”

그래도 군인처럼 군기가 잔뜩 든 놈들이니 겁에 질렸다고 도망치지는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일행들을 숲속에 남겨둔 채 목책을 향해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날뛰어서 목책을 무너트리고 내부를 짓뭉갤 생각이 없었으니까.

돈까지 지급하며 연구 거리를 찾아 파티에 합류한 샤를롯이 있는데, 내가 다 때려 부숴버리면 그녀가 연구할 게 없잖아. 그리고 나 또한 실험해 보고 싶은 게 있고.

한세아가 고민…은 별로 하지 않고 내게 쥐여준 스킬, ‘방패술의 달인’. 사용 시 방패로 받아낸 모든 공격을 반격한다는 탱커 전용 스킬인데 정작 사용한 적이 없다. 아직은 원거리 공격을 하는 몬스터가 별로 없었으니 당연한 이야기.

꿰악, 꿰악!

뀌이이익―!

내가 대놓고 앞으로 걸어가자 오크들이 당황하는 게 명백히 보인다. 목책 사이로 나무문이 내려와 황급히 입구를 가로막고, 목책 위로 이끼늑대 가죽을 두른 사냥꾼들이 올라와 활을 겨눈다.

화살을 쏴 주면, 나야 좋지.

방패를 들어 올리고 입술을 달싹거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한세아도 마법 쓸 때마다 매직 미사일이니 스파크니 입 밖으로 주문을 외우던데 나도 그래야 스킬을 쓸 수 있나 보다. 다른 NPC들도 입 밖으로 기술명을 외칠까? 아니면 나와 한세아만 시스템 때문에 입 밖으로 말해야 하는 걸까.

 “오, 방패 빛난다. 저게 내가 전에 골랐던 롤랑 스킬인가 봐. 지금까지 쓴 적 없던데 이제야 쓰네. 하긴 원거리 공격하는 건 오크 사냥꾼이 처음이구나. 솔직히 고블린 돌팔매 따위에 6★이 스킬로 반격하는 것도 좀 웃기지.”

-그 만월 늑대가 브레스를 쏘는데요

-늑대쟝은 노룩패스해서 패턴이 없습니다 아시겠어요?

-마력 두르니까 몸이 번쩍거리네 저게 오러임?

-온몸이 빛나는 중무장 갑옷전사를 쏠 용기가 있네

-근데 번쩍거리니까 존나 표적지같긴 한데 나였어도 쐈음

방패를 들어 올린 채 앞으로 나가며 가려진 시야 쪽에 슬쩍 한세아의 방송 창을 띄워둔다. 본격적으로 마력을 운용하며 스킬을 사용하자 숨길 수 없을 수준으로 하얗게 빛나는 갑옷과 방패. 카메라 드론이 달라붙어 촬영하기 시작한 건 당연한 수순이다.

빛나는 방패를 들어 올리고, 화살이 날아들며, 한세아와 시청자들이 몇 마디 떠드는 그 짧은 시간.

바람을 가르며 날아온 화살이 방패를 두들기려는 순간 빛으로 변해 휙- 하고 사라지더니 목책 위의 오크 사냥꾼들이 바닥을 나뒹굴다 마석으로 변한다. 방송 카메라로 보고 있던 시청자들이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할 수준으로 빠르게.

 ‘역시 마력으로 되돌려 주는 건가.’

한세아가 선택한 스킬은 ‘모든’ 공격에 대한 반격 기술이다.

아무래도 날아온 투사체를 그대로 되돌리는 건 아닌 것 같네. 시청자들과 한세아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마력으로 강화된 내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방패 위에 덧씌워진 마력 장벽에 분쇄된 화살과 그 화살의 궤적을 역주행하는 마력의 탄환.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진 모르겠으니 대충 넘겨버릴까. 그레이스도 패시브 스킬을 얻었을 때 몸이 잠깐 민감해졌다가 적응했잖아. 자신이 스킬을 얻었다고 알게 되지는 않고 그저 실력이 더 나아졌다는 느낌으로.

패시브 스킬을 마력으로 받아치는 거라고 설명했으니, 이 스킬도 방패술의 일종이라고 주장하면 플레이어이자 마법사인 한세아가 반박할 순 없겠지.

 ‘어째 늘어나는 게 거짓말뿐인 것 같기도 하고…?’

조금은 자조적인 생각을 하며 후속 공격이 없는 오크 부락의 문을 몸으로 밀어 박살 내며 들어갔다.

달려드는 오크 전사들은 패시브에 의해 바닥에 널브러진 뒤 마석이 되어 사라진다. 아무래도 오크 주술사가 사용한 광폭화의 주술 때문인 것 같은데.

평범한 오크 전사라면 패시브를 맞고 그로기 상태에 빠지지만, 광폭화 상태가 되며 공격력이 증가하고 방어력과 체력이 감소하게 되니 패시브 데미지에 픽하고 죽어 쓰러지게 되는 것이다.

화살을 날린 오크 사냥꾼들은 스킬에 반격당해 죽고, 광폭화 상태로 뛰어든 오크 전사들은 패시브 반사데미지에 죽는다. 마을 한복판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기만 해도 제 동족 수십 마리가 픽픽 쓰러지며 죽어 나가는 두려운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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