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화 (79/175)

 “그럼 내가 선두에 서서 따라갈 테니 내 흔적을 따라서 와.”

탐색꾼처럼 곧바로 찾아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어디에 있는지 이렇게 콕 집어서 말해주면 놓칠 리 없다. 고개를 끄덕이는 그레이스를 뒤로하고 숲 안으로 겅중 뛰어 들어가자 들려오는 급박한 발소리.

함정을 건너뛰고 나무를 디디며 자신에게 직선으로 달려올 줄 몰랐다는 듯 기척도 숨기지 못하고 후다닥 도망친다.

나뭇가지 바스러지는 소리, 나무줄기 급히 밀쳐내는 소리, 채여서 날아가는 낙엽, 경사에서 구르는 자갈 소리까지. 뭔가 공포 영화의 살인마가 된 기분으로 헥헥 달려가는 오크 사냥꾼의 등 뒤를 거리를 유지하며 쫓아갔다.

-몹한테 감정이입이되는데

-저러고쫒아오니까 존나무섭네

-하필 철퇴들고 쫒아오니까 진짜 살인마같음

-갑옷입고 산에서 뛰는거 보니까 대단하긴 하네

-한세아 뜻밖의 산악행군 ㅋㅋㅋㅋㅋ

너무 가까워지면 자포자기한 채 덤벼들까 봐 거리를 유지한 상황. 그렇게 오크 사냥꾼을 쫓다 보니 숲속에서 무언가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뛰어나왔다.

 “요 씨발 돼지 대가리 새끼!”

 “레베카? 멈춰!”

내가 따라가고 있던 오크 사냥꾼을 마석으로 바꿔버리며.

이 씨발, 숲을 가로질러서 여기까지 뛰어온 거야?

오크 사냥꾼이 반응하기도 전에 숲에서 짐승처럼 뛰쳐나온 레베카가 오크의 모가지를 썰어버린다. 널찍한 마체테의 날이 사냥꾼의 목을 치는 것과 동시에 근처의 나무들도 석둑석둑. 그 장면이 나를 따라오던 카메라에 고스란히 잡힌다.

그토록 날뛰었음에도 성에 차질 않은 걸까. 거친 숨을 쉭쉭 내뱉는 레베카의 몰골은 눈 뜨고 못 봐줄 수준이었다. 생각해보니 아름다워지기 이전, 피와 먼지를 뒤집어쓰고 다닐 때도 저랬던 것 같은데.

-이게 19금 방송이지 쉬바

-레베카눈나한테쳐맞으면서욕설듣고싶다퍄퍄퍄퍄

-클립따느라 채팅 느려진거 존나티나네 공유좀 제발요

-어디서 시청자 늘어나는 소리 안들림?

-매일이오늘같았으면좋겠습니다 진짜루다가

퀘스트 진행이 방해받았음에도 불만 하나 없는 채팅창의 분위기. 지난번에도 봤던 하트와 불꽃 이모티콘이 도배되기 시작한 채팅창은 레베카의 꼬락서니 때문이겠지.

 ‘외모 버프에는 청결 버프도 있나?’

레베카의 옷차림은… 한세아의 방송이 19금이라 다행이다 싶은 몰골이었다. 핫팬츠인지 핫팬티인지 모를 정도로 짧은 가죽 반바지 아래로 드러난 뽀얀 허벅지. 배꼽이 그대로 드러난 셔츠는 제대로 잠그지도 않아 가슴골이 고스란히 드러난 모양새.

거기에 나무들을 몸으로 들이박으며 달렸는지 너덜너덜하게 찢긴 소맷자락과 옷깃. 5★답게 생채기 하나 없지만, 덕분에 뽀얀 피부가 고스란히 노출되어 걸어 다니는 음란외설물 같은 꼬락서니다.

저 짧은 옷차림, 레베카가 편하다고 야영지에서 잠옷으로 입던 차림새인데.

 “뭘 멈춰, 이 새끼야!”

 “아니 씹! 내가 괜히 저거 따라가고 있겠어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대체 무슨 상황인지는 몰라도 잠옷 위에 다용도 벨트 하나 걸치고 숲에서 날뛰고 있는 레베카였다. 뒤늦게 따라온 일행들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를 못 하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본다.

숲에서 수상쩍은 움직임을 보이는 몬스터를 추격했더니, 헐벗은 미녀가 뛰어나와 모가지를 썰어 버린 상황이다. 이게 이해가 되려면 한세아처럼 카메라를 통해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있어야 가능하지 않을까.

안 그래도 짧고 얇은 옷이 너덜너덜해진 채 속살을 드러내고, 대비되는 뽀얀 피부는 과거의 짐승 같던 몰골을 떠올리기 힘들게 만든다. 그런데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마체테를 벨트에 거는 그녀.

 “야, 케이든. 그리고 그 뭐냐, 한나? 너희 탱커 좀 빌린다. 케이든 수준이면 오크한테 당할 일은 없겠지.”

 “뭘 빌려요?”

 “자지 좀 빌린다고.”

 “……?”

노골적이다 못해 적나라한 말에 일행들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특히 순진한 아이린은 너무 충격을 받았는지 입을 벙긋벙긋 움직이는 게 귀엽네.

그와 동시에 내 허리춤을 휘감고 공주를 납치해가는 마왕처럼 어디론가 풀쩍 뛰어가는 그녀. 강제로 끌고 가려는 레베카에게 반사적으로 주먹을 날릴 뻔했지만 초인적인 반사신경으로 주먹을 억누를 수 있었다.

레베카의 성격이라면 한 번 봐주고 넘어가기는커녕 니가 먼저 때린 거라며 주먹을 날려올 테니까. 과거의 지저분한 모습이었다면 참지 않고 패줬을 텐데.

 ‘얼굴은 쓸데없이 이뻐져서는….’

갑옷 때문에 느낄 수 없는 말캉하면서도 탄탄할 것 같은 가슴의 감촉에 아쉬워하며 레베카에게 몸을 맡긴 채 방송 화면을 보았다. 아무래도 레베카가 갑작스럽게 뛰쳐나갔기 때문에 카메라가 우리를 놓친 모양.

…수만 명의 시청자 앞에서 자지 자랑을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그, 이게 무슨 상황이야 대체…? 지금 저 레베카라는 용병 NPC한테 롤랑이 보쌈당해서 따먹힌다고?”

[반응속도개같이느린한세아련님 50,000원 기부!]

뭐해시발아이걸안쫒아가면롤랑센세가뭘당하는지알수가없으면내가이방송을웨봐야해

 “그럴 거면 야동을 보러 가, 이 새끼들아! 안 그래도 퀘스트 조져서 싱숭생숭한데 발정 나서 껄떡댈래? …아무튼, 5만 원 감사합니다.”

-뒤늦게 금액보고 화가 가라앉은거 티 확나고

-의문의 산악행군 이후 의문의 NTR이냐

-롤랑이 좆으로 5★ 데려오면 레게노

[관리자에 의해 삭제된 채팅입니다]

-시발 물뜨러 다녀왔더니 이게 무슨 상황인데 대체

그러게, 나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수상한 점을 발견한 샤를롯 덕분에 퀘스트가 갱신되었고, 퀘스트 진행을 위해 오크 사냥꾼을 쫓던 와중 레베카에게 막타를 빼앗겼으며 그녀에게 자지 좀 빌려달라는 소리를 듣고 납치당했어.

누군가에게 말하면 술 좀 끊으라고 진지하게 조언을 해 줄 것 같은 이야기. 레베카를 꽤 오래 알고 지낸 나조차도 당황스러운데 한세아와 시청자들은 얼마나 당황스럽겠는가.

 “…어디 가는 건데요?”

 “눕기 좋은 곳.”

 “아니, 자지 빌려 달라는 게 진짜였다고?”

 “내가 너한테 빈말 한 적 있냐?”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을 하자 능청스럽게 대답하는 그녀. 갑옷에 피부가 닿을 땐 몰랐는데 피부와 피부가 마주 닿으니 몸이 엄청 뜨겁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은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정말로 몸이 달아오른 상태라니.

그 따끈말랑한 피부에 잠시 말이 멈추자 송곳니가 드러나도록 씨익 웃어 보이는 레베카. 내 침묵을 일종의 수락으로 알아들은 걸까. 하긴 하는 짓을 보면 수락이 아니어도 멋대로 하겠네.

그렇게 겅중겅중 뛰어 숲을 달려가던 그녀가 적당한 장소에서 멈추어 선다. 시끄럽게 구는 오크 전사도 없고 나무 사이로 햇볕이 아름답게 내리쬐는 넓고 평평한 바위가 있는 공터.

 “이쯤이면 되겠네.”

 “거, 왜 이러는지 이유는 좀 압시다.”

 “남자랑 여자랑 눈 맞는 데 이유가 필요하냐? 술도 담배도 날아가서 열 받는데 오크 놈들도 다 도망을 다니잖아. 짜증 나고 달아오르니까 스트레스 좀 풀려는 거지.”

내 말에 다시 한번 씨익 웃어 보인 레베카가 그대로 내 멱살을 잡고 입술을 들이민다. 먹이를 노리는 육식동물처럼 맹렬하게 달려들어 입술을 꾸욱 꾹 눌러대는 그녀. 노련하지는 않지만 맹렬하게 달려드는 게 정말 발정기의 짐승 같은 모습이다.

키스는 서툰 주제에 갑옷 벗기기에는 능숙한지 갑옷의 경첩을 척척 분리해 손쉽게 벗겨내는 손길. 강철 갑옷이 무슨 셔츠라도 된다는 듯 너무나도 쉽게 벗겨내서 옆으로 던져버린다.

그렇게 쉽사리 무장해제가 되며 느낀 것은, 레베카의 몸이 엄청나게 뜨겁다는 것. 피부와 피부가 마주 닿지 않아도 느껴질 정도로 달아오른 그녀의 몸. 심지어 서툰 키스 끝에 길게 내쉬는 숨결조차 마치 아룡종이 내뱉는 불꽃처럼 느껴질 지경.

 ‘……스킬의 부작용 같은 건가?’

아무리 레베카가 막 나가는 성격이 있다 해도 이건 명백히 이상하다. 여기가 19금 딱지가 붙은 가상 현실 속 게임이라 해도 전투의 잔인함과 술, 담배 따위 때문에 19금이 붙은 거잖아. 마력을 사용하면 성적으로 흥분하는 세상 같은 게 아니라고.

그러니 누구나 노력하면 쓸 수 있는 마력이 아니라, 가챠 시스템에 의해 생긴 스킬 때문이라고 의심할 수밖에. 히어로즈 크로니클보다는 히로인즈 크로니클이 수상한 건 어쩔 수 없다.

 “흐으- 좋네, 이거. 애새끼들이 왜 섹스섹스 거리는지 알 것 같아.”

 “뭐 하지도 않고 벌써 좋대?”

물론 미녀에게 열렬하게 구애된다 해서 기분이 나쁜 건 아니다. 예전의 레베카, 피부에 떼와 먼지가 가득하고 머리에는 피가 엉겨 붙어서 관리가 안 된 야생동물 같은 모양새였다면 정말 끔찍했겠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조금 다르지.

바위 위에 나를 앉혀두고선 내 위에 올라타서 내려다보는 새빨간 눈동자의 미녀. 적발 적안이 이토록 어울리는 사람이었나 새삼 놀라게 만드는 탄탄한 미모의 헬스녀가 잡아먹을 듯 덮쳐오는 데 싫어하는 사람은 동성애자 정도가 아닐까.

 “맛만 봐도 알지, 임마.”

타액으로 촉촉해진 새빨간 입술을 낼름 핥고 들어가는 분홍색 살덩이. 그 뇌쇄적인 움직임에 잠시 시선이 팔리자 기세등등하게 웃는 레베카. 이쯤 되면 남자로서 자존심이 가슴 속에서 꿈틀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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