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화 (77/175)

 “어, 아마… 식량 포대 20개쯤?”

 “좋네. 한 달은 너끈하게 보낼 수 있겠어.”

 “한 달이나?!“

무게 단위가 아니라 칸 단위인가. 한 달이라는 말에 눈이 휘둥그레지는 그녀를 대충 안심시켜 준 뒤 시장으로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한세아의 인벤토리에 식량을 가득 채우는 일은 그다지 문제 될 게 없었다. 돈 걱정을 할 이유가 없으니 품질이 보증된 상회에 가서 대량으로 구매하면 되었으니까.

물에 불려 먹을 말린 고기, 스튜를 끓일 때 필요한 밀가루, 열량을 채워 줄 말린 과일, 바짝 말린 귀리와 보리… 그 수량이 다 합쳐 20포대나 되니 우리를 상대하던 상인이 화들짝 놀랄 수밖에.

 “허어, 어찌 그리 많은 수량을 주문하나 했더니 저런 마법도 있구려?”

 “우리 파티의 마법사 실력이 꽤 뛰어나서.”

허공으로 쏙쏙 들어가는 건량의 모습에 입을 떠억 벌리는 상인. 또다시 시작된 한세아 인벤토리 칭찬하기에 시청자들도 하나 되어 채팅창을 도배하기 시작한다. 지난번에 보니까 그레이스랑 한세아 얼굴로 합성해서 유머 글이 만들어졌던데 이번에도 나오려나.

비슷한 평행 세상인 만큼 이쪽 세상에서도 과도한 일뽕 같은 게 있었는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눈을 크게 뜬 백인 여성의 사진. 경악하는 백인 여성과 스고이 재팬이라는 다섯 글자만 봐도 평행 세계를 이해하는 데에는 충분했지.

―??? : 이것이 천재 마법사 한나의 마법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는 그레이스.JPG]

[이마를 탁 두드리며 놀라는 케이든.JPG]

[허공에 물건을 집어넣는 한세아.GIF]

한나의 마법은 다르다구

얼마나 다른지 보여줄게

… 3

‥ 2

. 1

「INVENTORY O.P.E.N.」

┗ 뭔데 합성 잘함? 재능낭비 좆되네

┗ 전세계인이 부러워하고 일본과중국이 위기감을 느끼게하는 게이머

 ┗ 1위 달리는거 보면 부러워하는 거 맞고, 일본 중국 위기감 느끼는것도 맞던데

┗ 일뽕 중뽕애들 지들이 1위 못했다고 지랄하더라

  ┗ 국뽕뿌쓩빠슝병신TV 자막이 현실이 된다고?

┗ 이 정도 실력이면 부탁할 게 있는데

합성 실력이 꽤 수준급이어서 방송국 게시판 상단에 떡하니 인기 글로 올라왔었지. 다시 봐도 웃음이 터질 것 같아 황급히 게시판을 닫았다. 혼자 입꼬리를 씰룩거렸지만, 카메라도 한세아도 상인에게 관심이 쏠려서 다행히 들키지는 않았네.

식수는 마법으로 해결할 수 있고, 냄비와 그릇 따위는 이미 인벤토리 안에 있으니 건량을 가득 채우는 것으로 탐색 준비는 끝. 어디 장거리 원정을 나가는 사람도 이 정도는 안 산다며 상인이 웃는 얼굴로 주절주절 수다를 떤다.

모험가들이 건량을 사 간다 해도 한 주머니씩 사지 우리처럼 포대로 사는 사람은 없는 게 당연. 품질이 보증된 만큼 가격이 비싼 놈들을 20포대씩이나 팍팍 팔았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롤랑, 레베카는 어떤 사람이에요?”

 “…보이는 그대로지.”

 “아, 그렇게 말하지 말구. 솔직히 어떤 사람인지 궁금할 수밖에 없도록 행동하잖아?”

 “그건 그래.”

그레이스는 활과 화살을 정비하러 갔고, 아이린은 신전에 아이를 보러 갔으며 케이든은 어디론가 슥 사라진 상황. 그렇다 해서 밤을 스킵해버린 한세아가 아무것도 안 하고 방송을 종료할 순 없겠지.

그 때문인지 시청자들의 열렬한 호응과 함께 내게 질문을 던진다. 길드장, 마법사, 정보 길드 등 다양한 5★을 만나 보았지만 가장 많이 엮인 건 레베카니까 궁금할 만하지.

레베카와 나의 인연은 초보 딱지를 뗀 지 얼마 안 된 시점, 중급 모험가 시절에 시작되었다. 중급 모험가부터 시작되는 개인 의뢰 때문에 용병단에 합류하게 되고, 합류한 용병단이 하필이면 탑에 진입하려는 레베카 용병단이었고―

 “굳이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솔직한 사람이네.”

 “솔직? 음, 야성적이 아니라?”

-돌려 까는 거 봐라 교토사람도 울고가겠다잉

-합류 가능성 없으니까 바로 멕이는거임?

-야성적(교양없는짐승련)

-짐?승?암?캐?련?꼴?류?

[관리자에 의해 삭제된 채팅입니다]

-아무튼 이쁘니까 괜찮은거아닐까?

솔직한 사람이라는 내 표현에 의문을 표하는 한세아. 하지만 알고 지낸 세월 동안 레베카에게 이보다 더 어울리는 표현은 없다고 생각되는데.

레베카는 솔직하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거나, 한세아처럼 거짓말을 할 때마다 말을 더듬고 눈을 굴려서 어색함 때문에 곧바로 들킨다는 뜻이 아니다. 속마음을 그대로 털어놓고, 입 밖으로 꺼낸 말을 그대로 실천하니까 솔직하다는 거지.

 “레베카는 일단 생각난 게 있으면 숨기지 않고 말해. 그리고 말 한 내용 대부분을 실천으로 옮겨.”

 “어… 되게 좋은 거 아니야?”

 “개씨발새끼들 죽여버리겠다고 중얼거리면 가서 진짜 죽여버리거든.”

 “……아.”

과거, 레베카가 별을 받기도 전 후줄근하게 돌아다니던 때. 몸매는 좋은 지저분한 계집애가 용병단주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녀는 다양한 모욕을 들었다. 모험가보다 개판으로 살아가는 게 용병이고, 용병들은 타인을 모욕하는 걸 제 강함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니까.

그중에서는 선을 넘는 놈들이 나오기 마련이고, 선을 넘은 놈들을 보고 레베카는 이를 갈며 어떻게 죽여버리겠다고 욕설을 박아버렸다. 팔뚝을 뽑아서 뒷구녕에… 라던가, 그 쓸모없는 눈알을… 뭐 그런 구체적인 욕설.

 “그리고 의뢰를 하다 충돌이 일어나면 입 밖으로 꺼낸 말을 그대로 실행에 옮겼거든. 그 이후로는 시비를 거는 놈들이 싹 사라졌지.”

시체로 오브제를 만드는 미친년을 상대로 기 싸움을 하고 싶은 놈은 용병이 아니라 자살 희망자니까. 내 설명을 들은 한세아의 안색이 어둡게 변한다. 레베카는 자기 식량 마차를 털어먹은 오크를 죽여버리겠다고 이를 갈았거든.

 “그러니까 레베카는 진심으로 오크 우두머리를 찾아 20층을 뒤집어 놓을 거야. 말한 대로, 죽여버리기 위해서.”

 “내일부터 탐색, 서둘러야겠네.”

 “그래. 아무리 상대가 상급 모험가라지만 눈 뜨고 일확천금의 기회를 포기할 순 없잖아?”

내 이야기에 퀘스트 진행에 대한 의욕이 솟아났는지 의욕을 불태우는 그녀. 각자의 숙소로 헤어졌지만 나는 방송으로 한세아가 놀림을 받으면서도 이를 악물고 퀘스트 막타를 빼앗기지 않겠노라 선언하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탑의 끝까지 갈 것 같은, 아주 좋은 자세야.

 “어서 와, 롤랑. 또 한 건 했다며?”

 “수정구로 연락한 대로지, 뭐. 길드 차원에서 나온 의뢰 있어?”

다음날, 의뢰를 받기 위해 길드로 향하자 우리의 전용석처럼 된 구석의 테이블에서 엘리스가 우리 파티를 기다리고 있었다. 케이든, 아이린, 그레이스에 한세아… 하나둘 합류하는 일행들에게 종이 한 장을 내미는 그녀.

가장 먼저 들어오는 건 길드의 문양이 새겨진 새빨간 밀랍 인장. 이게 뭔가 싶어 들여다보려 하니 종이를 휙 들어 올린 엘리스가 설명을 시작한다.

 “말한 대로, 길드 차원에서 의뢰를 내걸 생각이야. 오크 부락이 무작위로 생겨나서 위쪽으로 가는 보급 마차에 지장이 좀 생겼거든.”

 “곧바로 길드가 움직일 정도로 문제가 있나?”

 “관찰 결과, 가장 처음에 등장하는 건 오크 주술사와 오크 전사들이야. 고블린들이 무리로 등장해 움막을 짓는 것처럼 오크들도 무리 지어 등장한 뒤 목책을 세우는 거지. 문제는 목책을 세우기 전에 모험가나 마차 따위를 발견하면 그대로 약탈자가 되어 전부 달려들어.”

 “보급 마차의 경로에서 등장하면 귀찮겠는데.”

 “재수 없으면 후열이나 옆구리를 덮치는 수십 마리의 오크 강도단과 마주하게 된 셈이지. 그래서 길드랑 마탑이 의뢰를 걸었어.”

마법사가 고용한 모험가라도 있었는지 오크 무리의 생성부터 행동 양식까지 벌써 밝혀지다니 참 놀라울 따름이다. 하기야 연구 거리에 미쳐있는 마법사들이라면 20층의 숲속에 CCTV 비슷한 마법을 걸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 왜, 야생동물 많이 지나다니는 길목에 무인 카메라 설치하듯 마법사들도 오크가 나올법한 널찍한 곳에 뭐라도 설치했겠지.

 “길드의 의뢰는 오크 주술사의 처치와 놈들이 등장하는 이유의 추적. 마탑의 의뢰는 오크 전사와 주술사의 부산물을 최대한 많이 모아올 것.”

 “길드답고, 마탑답네.”

 “늘 그렇지 뭐.”

돈을 아끼기 위해 오크 전사가 아닌 오크 주술사의 처치를 요구하며 마석 매입만을 선언한 길드. 반대로 돈을 길바닥에 뿌려서라도 더 많은 연구 재료를 확보하려는 마탑의 의뢰. 두 집단이 참 손발이 잘 맞는다고 해야 할까.

결국, 모험가들은 돈은 마탑에서 벌고 경력은 길드가 인정해주니 손해 볼 건 없다. 그렇게 우리에게 설명을 끝낸 엘리스가 테이블을 떠나 터벅터벅 게시판으로 향한다.

 “새 의뢰인가?”

 “뭐, 20층의 오크 이야기겠지.”

 “오크 사냥꾼 말이야?”

 “얜 뭘 하다 왔는데 사냥꾼 타령이야?”

 “파티끼리 연합해서 공략해도 나쁘진 않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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