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화 (74/175)

[점심나가서먹은님 10,000원 기부!]

시청자 민심 나락보내지 말고 곱게 카메라 돌리자

채팅과 도네이션이 성난 파도처럼 한세아를 두들기지만, 뚝심 좋은 그녀는 이를 악물고 안테노르를 촬영하고 있었다. 조금 불쌍한 마음이 드는데 슬슬 우리 파티 리더를 구해주러 가야겠네.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가자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바라보듯 나를 쳐다보는 마법사. 걸쇠를 치우고 오두막 밖으로 나가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연구실, 어딥니까?”

 “진짜 거기에 가시려고요?”

아이 씨, 무슨 마왕성 위치 알려주는 마을 주민도 아니고.

…물론 내가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이 마법사를 대신 던져 넣고 대화의 주제를 바꿔버리면 되니까. 수정구 앞에서 대기하지 않고 책을 읽던 태도 등 은근한 나태함을 지적하면서 희생양 삼으면 되거든.

말 많은 노인네에게 있어 가장 좋은 대화 주제는 ‘요즘 젊은 것들은’, ‘나 때는 말이야’ 아니겠는가?

제게 닥쳐 올 미래도 모른 채 마법사가 내게 연구실 위치를 알려준다.

세상 모든 일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

 “흐음, 수정구를 관리할 시간에 밖에 나와서 독서를 즐기고 있었다고. 아아, 아닐세. 책망하려는 게 아니야. 다만 자네가 읽고 있던 서책에 대해 궁금한 게 조금 생겼을 뿐이지. 새로운 논문을 준비하기 위해 읽은 책인가? 아니면 머리를 식히기 위해 읽은 책인가? 혹시 좋아하는 책이라 여러 번 읽은 것이라면 소개를 좀 해줄 수 있나?”

 “그, 그것이….”

제 할 일을 끝낸 수정구 담당 마법사를 안테노르에게 던져준 뒤 우리 파티원들을 연구실에서 끄집어냈다. 말을 한다기보다는 말을 토해내는 수준으로 몰아붙이는 안테노르의 모습에 발걸음이 절로 빨라지는 우리 일행들.

솔직히 라떼는 말이야를 시전할 줄 알았는데 읽고 있던 책에 대한 심도 높은 마법사들의 토론으로 이끌어 나갈 줄은 예상 못 했지. 말하는 것만큼 듣는 것도 좋아하는 괴인답네.

원망스러운 눈으로 나를 째려보는 한세아. 카메라 드론과 한세아의 곱상한 얼굴이 한 쌍의 눈동자처럼 나를 노려보고 있기에 어깨를 으쓱인 뒤 연구실로부터 등을 돌렸다. 파티원들을 꺼내오는 대가로 마법사 하나를 희생… 남는 장사로군.

 “어휴, 진짜. 6★만 아니었으면 한 대 때려줬을 텐데.”

[마탑연구실마석조각도둑한세아님 10,000원 기부!]

달려가서 롤랑 뒤통수 후려치면 십만원

 “하지만 소중한 파티의 일원이고 언제나 든든하게 전열을 담당해 주었죠. 숙박비부터 길드 인맥까지 받은 게 많으니 롤랑 센세에게 배은망덕함을 표출해야 하는 그런 미션은 거절하겠습니다. 만 원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마석도둑님.”

-이게 ‘프로’ 방송인이지 아가리가 그냥

-또또 금수같은 수금천재 튀어나오지

-아침이었으면 뒷통수치고 바로 리셋눌렀음 내가봄

-ㄹㅇ 늦은 밤에 미션 거니까 그렇지

-혓바닥 길쭉한건 마법사 특징인가

외면하고 있는 뒤쪽에서 흉흉한 대화가 들려온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이는 오두막 사이를 걸으며 시청자와 대화를 나누는 한세아. 그레이스와 아이린은 이미 오늘 할 말을 전부 연구실 안에서 쏟아냈는지 피곤한 얼굴로 타박타박 따라 걸어올 뿐이다.

그렇게 오두막 사이를 걸으며 손님용 오두막을 찾거나, 길 안내가 가능한 경비병을 찾으려고 걷고 있으니 다가오는 익숙한 얼굴.

 “어머, 한나 양과 롤랑 님이 왜 여기에?”

 “샤를롯 양? 마탑이 아니라 20층에 계셨군요.”

 “네. 이번 만월 늑대 사건 덕분에 탑의 새로운 면모를 찾아내고 싶어졌거든요.”

분홍 머리 귀족 아가씨인 2★ ‘야심가’ 샤를롯 캐번디시와 그녀의 충실한 하녀이자 도적 기술을 익힌 파란 머리 1★ ‘메이드’ 마리.

분홍 머리에 걸맞게 흉부 장갑이 두둑한 귀족 아가씨와, 무뚝뚝한 표정의 슬렌더 미녀 메이드의 조합에 시청자들의 여론이 휙휙 뒤집힌다. 불과 몇 분 전까지 욕설을 도배하다 정지를 당하던 사람들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반응.

그 큼직한 모성의 상징에 걸맞게 신전에서 아이를 돌보던 여성스럽고 부드러운 모습 때문이겠지. 귀족 아가씨와 메이드라는 조합이 가져다주는 판타지도 있을 테고. 그렇게 또다시 천하제일 이상 성욕대회가 개최되어버리는 채팅창.

 “그나저나 아무리 상급 모험가라 해도 이곳을 여관처럼 사용할 수 없으실 텐데….”

 “길드에 급히 보고할 게 생겼거든. 마탑에도 알려야 할 사안이고.”

 “만월 늑대에 이어 또 무언가를 발견하셨나요?”

신기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샤를롯. 하긴 만월 늑대 사건 이후 시간이 얼마나 흘렀다고 또 이상 현상이 벌어진 상황. 다른 NPC들이 보기엔 소년 탐정 옆에서 죽은 사람 숫자를 세는 기분이겠지.

NPC들의 평가를 종합하면 사건과 사고를 몰고 다니는 유능하고 장래 유망한 천재 마녀 한세아인가. 이렇게 늘어놓으니까 좀 웃기긴 하네.

 “방문객용 숙소가 있다면 짐을 풀고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아, 그렇네요. 탑 안에만 있으면 시간에 너무 둔감해져서 실례를.”

나무를 밀어버린지라 햇볕을 내리쬐어 주는 태양이 머리 위에 찬란하게 떠 있지만, 바깥의 시간을 생각해보면 지금은 달이 머리 위에 떠 있어야 할 새벽 3~4시 정도. 게임을 일시 정지하고 하루 쉬고 온 한세아와 달리 우리 일행들은 휴식이 필요하다.

우리가 숲을 한참 탐색하다 이곳을 방문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우아하게 손으로 입을 가리는 샤를롯. 그 부드러운 손짓에 눈치 빠른 메이드가 가장 먼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그러면 숙소로 쓰이는 오두막을 알려드리죠. 마법사들이 사용하지 않아 깨끗할 거예요.”

 “사용하지 않는다니?”

 “안테노르 님 때…, 덕분에 다들 연구실에 있거든요.”

분명히, 방금 안테노르 때문이라고 말하려 했어.

걸을 때마다 부드럽게 찰랑거리는 분홍색 머리카락과 위아래로 움직이는 살덩어리에 집중하고 있던 시청자들이 그 말실수를 놓칠 리 있나. 자신의 부끄러운 성욕을 공개하는 채팅이 절반, 말 많은 마법사들을 성토하는 채팅이 나머지 절반. 참으로 혼란스러운 채팅창이었다.

지저분해진 채팅창이 그러거나 말거나 조용히 샤를롯의 뒤를 따르는 한세아. 분명 게임 밖에서 하루 쉬고 왔음에도 피곤해 보이는 건 기분 탓이 아니겠지. 혼자 몰래 탈출한 케이든이 되려 하루 쉬고 온 한세아보다 쌩쌩해 보인다.

그렇게 안내받은 오두막은 겉보기에는 역시나 똑같지만, 내부에는 양탄자와 침대, 의자 따위가 갖춰져 있었다. 오두막 문을 열고 보여주듯 우리를 뒤돌아본 뒤 안으로 쏙 들어가 자연스럽게 테이블에 앉는 샤를롯.

 “이 주변에 있는 오두막은 다 침대가 있을 거예요. 딱히 정해 놓고 쓰는 건 아니니까 원하는 오두막에 들어간 뒤 문에 걸린 팻말만 뒤집어 두세요. 그게 오두막을 누군가 사용하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아, 네. 감사해요 샤를롯 양.”

 “그러면 이야기를 좀 들려주시겠어요? 탑 밖으로 나가지 않고 마탑의 안전지대에 굳이 찾아온 이유가 궁금하네요.”

슬슬 잠자리에 들었어야 할 시간이니 피곤해 보이는 그레이스와 아이린, 케이든이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고 오두막 밖으로 빠져나간다. 고위 마법사인 안테노르에게 이야기를 전해주었고, 길드에도 보고를 올렸으니 우리가 할 일은 끝.

느긋하게 테이블에 앉으니 한세아 또한 테이블에 슬쩍 자리를 잡는다. 아무래도 방금 접속했는데 바로 자러 가기는 그런 모양. 게임 플레이는 뒷전이고 게이머 겸 방송인의 비애라고 봐야 할까.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 함께 설명하려는 모양새에 동그란 눈동자에 호기심을 가득하게 바라보는 샤를롯이었지만 군말 없이 메이드 마리가 내온 따스한 홍차를 홀짝이며 경청할 준비를 한다.

 “20층에 새로운 몬스터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어요, 샤를롯 양. 일단 확인된 것은 수가 많은 오크 전사들과 그놈들을 지휘하는 오크 주술사죠.”

 “어머? 확인된 것이라는 건….”

 “아마 주술사보다 상위 개체가 존재할 것 같군요.”

내 말에 눈을 반짝이는 건 샤를롯 만이 아니었다. 이미 퀘스트를 통해 ‘오크 왕국’의 존재를 알게 된 한세아도 신기하다는 듯 자세를 바로잡고 나를 바라본다. 샤를롯 뒤에 선 마리, 샤를롯과 한세아, 그리고 카메라 너머의 수만 명의 시청자들.

무슨 인터뷰나 취조 상태가 되어버린 게 어처구니없어 내 앞에 놓인 따스한 홍차로 입술을 축인다. 쌉쓰름하면서도 따스하고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단맛.

메이드로서 별이 붙은 만큼 차 우리는 솜씨도 완벽에 가까운 걸까. 어쩌면 메이드 마리의 스킬은 자물쇠 따기나 함정 해제 따위가 아니라 청소와 차 우리기 따위일지도. 본의 아니게 애를 태우게 되었지만, 홍차를 몇 모금 더 마시고 나서야 설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일단, 고작해야 주술사 따위가 수십 마리의 오크 전사를 지휘하는 건 명백히 이상합니다. 오크 주술사는 특유의 똑똑함으로 존중을 받을 뿐이지 놈들을 통솔하고 다스릴 수 있는 존재는 아니거든요.”

 “아아, 확실히 수십 마리의 오크 전사라는 건 이상하네요.”

오크의 무식함을 떠올리면 적당한 설명이 떠오른다. 물론 나는 한세아가 시청자들에게 방송에서 설명한 ‘오크 왕국’이라는 퀘스트 이름 때문에 끼워 맞추는 중이지만.

오크 전사에게 있어 오크 주술사는 옆집 사는 서울대 엄친아 비슷한 존재다. 똑똑하고 능력이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딱히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지휘권은 없다는 뜻이지. 옆집 사는 서울대생이 우리 집 문 두드리면서, 너는 지잡대 다니니 내 명령에 따르라며 공사판 노가다를 뛰고 돈을 바치라고 명령한다면 누가 복종할까?

옆집 이웃이, 윗집이나 아랫집 아저씨가 나보다 학력이 좋고 IQ가 높다는 이유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건 아니지. 오크 같은 야만 몬스터에게 있어서 지혜보다 중요한 건 근력과 악력. 주술사가 수십 마리의 오크 전사를 힘으로 이길 리 없다.

 “그러니까, 전사를 통솔하는 주술사보다 더 높은 계급의 몬스터가 있을 겁니다. 주술사에게 권위를 부여한 놈이. 물론 이게 헛된 걱정이고 주술사를 중심으로 한 오크 부락만 계속해서 등장할 수도 있지만요.”

 “하지만 모험가는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는 사람들이죠. 상위 개체의 출현, 납득이 가는 가설이네요.”

끼워 맞춘 내 설명이 그럴싸했는지 샤를롯도 한세아도 고개를 끄덕거린다. 탑 내부에서 벌어진 일이니 바깥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흘러갈 수 있지만, 그래도 다른 몬스터들은 바깥과 거의 비슷한 습성을 지녔으니까.

하다못해 화전민 마을 출신 그레이스도 바깥의 뿔토끼, 뿔여우의 습성이 탑 내부에서도 그대로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마법사인 샤를롯이 모르겠는가.

-오크 왕국과 잡혀간 여모험가…오늘은이거다

-하여튼 아무것도아닌오크들이 난리죠? 겉바속촉대족장 수준 나오죠?

-선생님들의이상성욕에는 제가관심이많습니다

-다들 미쳐가지고 아슬아슬하게 작두타는거 봐라

-방송 끝나고 봐야 할 게 생겼네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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