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 (72/175)

 “네. 사안이 사안이니까요.”

 “예, 알겠습니다.”

10층에서 20층까지 돌파하고, 오크를 사냥하며 주변을 탐색했다. 탑 바깥은 해가 졌을 테고 한세아도 방송 종료 시각이 가까워지는 상황. 하지만 느긋하게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할 상황은 아닌 것 같다.

탑에 있어선 안 될 몬스터가 두 종류나 나와서, 떠돌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목책을 세우고 영역을 넓히는 데 모험가라면 보고부터 해야지. 다부지게 고개를 끄덕거리는 아이린을 보고 한세아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 오늘 방송은 여기까지 하고 내일 바로 이어서 할게요. 밤샘 게임으로 컨디션 망치면서까지 숲을 달리고 싶지는 않으니까. 솔직히 탑 내려가는 동안 뭐 재밌는 일이 벌어질 것 같지도 않고.”

-동료 버려? 니 팀 버려?

-혼자 편하게 다니려고 귀신같이 끊어먹네

-눈나랑마망은 고생하는데 지 혼자 에휴

-방송인/한세아/논란

-내일꼭켜라 내려가는길에 머 있을거가틈

눈동자를 데굴 굴리기도 전에 세상이 다시 한번 잿빛으로 변한다. 물론 그 짧디짧은 잿빛 시간은 1초도 지나지 않아 풀리지만 한세아는 바깥에서 하루를 보내고 온 상황. 바깥에선 하루가 지났다는 걸 증명하듯이 한세아가 갑자기 내게 말을 건다.

 “롤랑, 차라리 20층에 있을 원정대의 베이스캠프를 찾아가는 건 어때? 최전선으로 보급 마차를 보내기 위한 안전지대가 있다면서.”

아무래도 쉬는 도중 짠해좌의 글을 읽고 온 모양이다.

내게는 1초도 되지 않는, 일행들은 느끼지도 못하는 그 찰나의 시간. 한세아는 가상 현실 게임기 바깥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시 방송을 켰다. 내가 VPN 시스템까지 사용해 작성한 짠해좌의 글을 읽고.

-짠해좌를 인정해버린…

-하루 쉬는동안 게시판 알차게 읽었고

-짠해좌정도면월클이지 양놈들도 퍼갔든데

-다른 훈수충과는 다르다고

-어차피 연락할거면 마법으로 하는 게 맞지

야간에 강행군으로 10층을 내려간 뒤 게이트 너머로 나가 길드와 마탑에 보고를 할 것이냐, 그냥 20층 내부에 있는 안전지대로 가서 마법으로 연락을 할 것이냐. 아무리 생각해도 후자가 더 합리적일 수밖에 없다.

 “확실히, 그편이 더 빠를지도. 대신 연락을 하고 조사를 의뢰받게 되면 탑 내부에서 생각보다 오래 머물러야 할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

 “난 괜찮아.”

 “그게 여신님의 뜻이라면.”

내 질문에 케이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그레이스와 아이린은 나와 한세아를 바라보며 긍정의 뜻을 표한다. 하기야 야간 강행군보다는 1박 2일의 일정을 2박 3일로 늘리는 게 더 나을지도.

한세아의 의견에 모두가 수긍하는 걸 보고 허리춤에 걸려 있던 또 다른 랜턴을 꺼내 들었다. 안전지대 랜턴, 통로용 랜턴, 모험가의 패, 건량 주머니까지. 이러니까 그레이스도 인벤토리를 보고 눈을 빛내지.

 “그러면 20층 안전지대로 이동하자.”

 “그 랜턴은 안전지대로 안내해 주는 마도구야?”

 “맞아. 이것도 마탑에서 만든 건데, 길잡이의 랜턴이 통로를 찾는 것처럼 안전지대 내부의 수호석과 연동되어 있어. 사안이 사안이니 그대로 직진하자. 오크가 나타나면 내가 최대한 빠르게 처리할 테니까.”

설명을 끝마치고 랜턴을 파티의 탐색꾼인 그레이스의 손에 쥐여 주었다. 겉 생김새만 조금 다를 뿐 내부의 마석 조각이 나침반처럼 움직이는 모양새는 통로용 랜턴과 똑같으니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랜턴을 받아들고 요리조리 둘러보던 그레이스가 통로용 랜턴을 허리춤에 건 뒤 그대로 앞장서기 시작한다. 그 뒤로는 우리를 막아 세울 게 없었다. K-시청자는 물론이고 글로벌 유입 종자들도 만족할 수 있을 퀘스트 진행 속도.

그레이스의 옆에서 함정을 몸으로 분쇄하며 직진하였으며, 오크 전사가 경로상에 있으면 내가 뛰쳐나가 머리를 쥐어박았다. 바위도 부수는 주먹이 고작해야 오크 두개골을 부수지 못할까. 사냥꾼은 도망치고 전사는 마석이 되니 우리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랜턴의 인도를 따라 한참을 걸어 도착한 안전지대.

 “와, 탑 안에 이런 게….”

 “마탑의 이름으로 진행된 사업이니까 생각보다 제대로 된 놈이 나왔지.”

오크 부락은 애들 소꿉장난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빈틈 하나 없이 촘촘하게 세워진 목책. 그 위에는 갑옷을 입은 경비병들이 사방을 주시하고 있는 데다 망루와 감시용 마도구도 빈틈없이 설치되어 있다.

평범한 모험가를 위해 공개되지 않는 마탑의 주요 거점. 몬스터가 등장하지 않는 장소를 마력으로 탐색한 뒤 일꾼들을 엄중히 호위해서 데려와 마법과 돈을 때려 박아 만든 작은 요새다.

 “정지! 이곳은 마탑의 거점으로 모험가에게 허락되지 않는 장소다. 울타리 밖에서 머무르는―”

 “상급 모험가 롤랑이다. 탑에서 벌어진 이상 현상을 보고하기 위해 방문했다. 안테노르 경에게 연락을 해 줬으면 하는데.”

시야의 확보를 하기 위해 벌목을 해 둔 장소로 나아가자 곧바로 반응하는 경비병. 교육이 꽤 잘 되었는지 빠릿빠릿한 반응에 알고 지내는 영감님 이름을 언급했다. 만월 늑대 게이트 때문에 1층까지 내려온, 43층에 자리를 잡은 5★ 마법사의 이름을.

상급 모험가 롤랑과 고위 마법사 안테노르. 경비병으로서 쉽게 넘길 수 있는 이름이 아니지.

아래로 내려가는 화살촉과 조금 공손해진 목소리. 쉴 곳을 찾아 기생하려는 중급 모험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자 조심스러운 어투로 경비병이 내게 묻는다. 증거도 없이 중요 거점 안으로 외부인을 들일 수 없다는 투철한 직업 정신.

동료를 불러 엄호를 부탁한 경비병이 날렵한 몸놀림으로 목책에서 후다닥 내려와 내게 다가온다.

 “모험가 패와 증거가 될 물품을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 패와 새로운 몬스터의 부산물이다.”

 “아… 잠시만 기다려주십쇼.”

그렇게 다가온 경비병의 시선이 못 박히는 곳은 모험가의 패가 아니라 한세아가 인벤토리에서 꺼내 준 전사와 주술사의 목걸이. 작은 짐승 뼈와 깃털 따위로 만들어진 두 개의 목걸이에는 선명하게 마력이 깃들어 있었다.

마력을 다룰 줄 아는 실력이라면 평범한 장신구가 아니라 마석과 같은 종류의 몬스터 부산물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밖에 없는 증거. 20층의 중요 거점을 지키는 마탑의 경비병답게 곧바로 알아차린 듯하다.

 “패와 부산물을 들고 가서 보고해도 되겠습니까? 안테노르 님은 지금 연구실에 들어가 계신지라….”

 “그 영감님 한 번 들어가면 불이 나도 안 튀어나오는 거 알아. 밖에서 노크하지 말고 그냥 문 열고 부산물을 안에 던지는 게 효과적일걸.”

 “아하하, 추, 충고 감사합니다.”

차마 고용된 곳의 높으신 분께 물건을 던져서 불러내라는 말을 따를 순 없는지 어색하게 웃는 경비병. 다시 겅중겅중 뛰어 목책 위로 올라가더니, 동료들과 몇 마디 짧은 대화를 나누고 목책 안쪽으로 슥 사라진다.

그러자 목책 위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무언가 마도구를 다룬다. 그그극- 하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좌우로 움직이는 커다란 통나무.

 “어, 저게 문이었어?!”

 “마법사들이 만든 거니까.”

아니, 통나무처럼 보이도록 마법이 덧씌워진 커다란 석문.

어지간한 공격으로는 흠집도 못 낼 커다란 돌문이 자동문 열리듯 좌우로 천천히 열린다. 고작해야 오크 사냥꾼이나 투구사슴의 돌진을 막아내기에는 차고도 넘치는 수준. 그 웅장한 자태에 그레이스가 입을 헤- 벌리며 화들짝 놀란다.

한세아 옆에 달라붙어서 인벤토리를 구경하는 것도 그렇고, 그레이스가 은근히 마법에 관심이 많네.

 “케이든 씨는 여기를 방문해 본 적이 있나요?”

 “예. 지난번 용병단의 짐꾼으로 동행했을 때 마지막 목적지가 이곳이었습니다.”

눈만 둥그렇게 뜬 아이린과 입까지 떡 벌린 그레이스와 달리 자연스럽게 내 뒤를 따라 문 안으로 진입하는 케이든. 그 모습을 보고 한세아가 무슨 인터뷰 하는 기자처럼 그녀의 곁에 달라붙는다.

물론 태연한 건 나와 케이든뿐. 한세아도 시청자도 마법사들의 기행에 놀람을 감추지 못한다.

-돌벽에 왜 통나무 스킨을 씌워둠?

-비밀기지 미쳤고ㅋㅋㅋㅋㅋ

-이것이 마법사들의 로망?

-비효율적인게 더 꼴리거든요

-돌덩어리로 만들어진 자동문 시발 ㅋㅋㅋㅋㅋ

탑의 20층 숲속까지 석재를 운반해 산성을 지은 것도 어처구니가 없는데, 그 돌벽 위에 마법을 덧씌워 울타리로 위장을 했다. 산성의 입구는 벽이 좌우로 움직이며 열리는 자동문 방식인 것도 어이가 없지.

하지만 어쩌겠는가? 저 모든 게 마법사들의 실험 결과인데.

운송 능력을 테스트한답시고 석재를 옮겨왔고, 영구적인 마법진을 설치하자며 환영 마법을 걸었다. 마법진을 확인했으니 마도구도 확인해야 한다며 자동문을 만들다 보니 거점이 저 꼴이 된 거지. 한 명의 마법사가 아니라 온갖 마법사가 하고 싶은 걸 실험하다 만들어진 기묘한 요새.

다행인 건 내부는 멀쩡하다는 점이려나.

시야 확보를 위해 주변을 주기적으로 벌목하다 보니 목재는 넘쳐나는 상황. 그 덕에 돌로 만든 성벽 내부는 오두막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오크 사냥꾼이 불화살을 쏘는 게 아니니 전부 목조 건물이라 해서 위험한 것도 없고.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안테노르 님의 간이 실험실로 안내할까요?”

 “그 양반 나오려면 한참 걸릴 테니, 모험가 길드와의 연결창구로 안내해줬으면 하는데.”

 “예, 알겠습니다.”

열린 성문 안으로 들어가자 곧바로 따라붙는 또 다른 경비병. 안테노르 영감에게 안내한다는 말에 고개를 저었다. 조금 전 내 모험가 패와 오크 부산물을 들고 갔으니 그걸 만지작거리는 데 1시간은 족히 사용할 양반이니까.

그리하여 안내를 받아 이동한 곳은 마법사가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오두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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