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지직―
귓가에 울리는 불길한 소리와 함께 목책을 이루던 나무 기둥이 볼링핀처럼 맥없이 뒤로 자빠진다. 쿠웅- 하고 피어오르는 흙먼지 너머로 들리는 오크들의 시끄러운 울부짖음.
-저게시발사람이야불도저야
-팔라딘 말고 다른 칭호 줘야하는거 아니냐
-팔라딘(물리특화)
-신성력 대신 근력을 쓰는 팔라딘...
-게임사가 캐릭터 시트를 잘못 쓴 거 가타요
높게 세워진 목책이 뒤로 자빠진다. 깔린 놈, 나뒹구는 놈, 도망치는 놈, 반대로 달려드는 놈.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이는 오크에게 내가 선사해 줄 건 딱 하나뿐이었다.
방패를 앞세운 돌진.
전신을 쇳덩어리로 가득 채운 강철의 기사가 군마보다 빠르게 앞으로 돌격하기 시작한다. 목책이 무너지며 피어오른 흙먼지 위로 새롭게 추가되는 흙먼지. 아비규환 속에서 방패에 치인 오크가 하늘로 날아오른다. 차마 드론에 담을 수 없는 끔찍한 모양새가 되어서.
탑 밖에서도 자주 써먹는 방법이기는 하다. 주로 레베카랑 같이 의뢰를 뛸 때 이 짓을 많이 했었는데. 내가 건물을 박살 내며 전진해버리면 뒤따르는 레베카가 난전 속에서 강한 놈 모가지를 썰고, 나머지는 뒤따라 온 용병단 애들이 정리하는 방식.
“흐―아아아아아악――!”
폐부 가득히 들이마신 숨에 마력을 담아 쩌렁쩌렁 내지른다. 뀍뀍 거리던 오크들이 무기도 내팽개치고 귀를 틀어막은 채 바닥에 납작 엎드릴 정도로. 목책이 무너지고 전사들이 공포에 질렸으면 뭐라도 나오겠지.
바깥의 오크들과 마찬가지라면, 저 중앙의 오두막에 있는 건―
-오크빤쓰덜렁이는거 모자이크안댐?
-19세라고 오크거시기 보고싶진않은데
-하시발20층가기 급격히 싫어지네
-주술사답긴한데 문명마려워진다
-저거 확인하려고 롤랑센세 혼자 달린거?
가죽 팬티 아래로 덜렁이는 흉물이 인상적인 오크 주술사.
이끼늑대 가죽으로 로브를 만들고, 투구사슴 뿔과 가죽으로 후드를 만들어 쓴 인상적인 차림새. 20층의 이끼늑대와 투구사슴은 죽어도 부산물을 드랍하지 않으니 주술사가 생성될 때부터 저런 차림새였겠지.
문제가 있다면 이끼늑대와 투구사슴을 얼기설기 이어붙여 만든 로브 아래에는 입은 게 없다는 점. 허름한 가죽 팬티 위에 로브만 걸쳐 입은 모양새. 피부 위에 염료를 발라놨지만 흉하게 덜렁거리는 건 가려지지 않는다.
물론, 오크의 거시기가 덜렁댄다 해도 마력이 듬뿍 담긴 6★ 팔라딘의 돌진은 막을 수 없지.
상황 파악을 하기 위해 오두막 밖으로 나온 주술사의 앞에 있는 건, 돌로 만든 성벽도 박살 낼 수 있는 강철 방패. 눈동자를 굴리고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퍼억- 하는 묵직한 손맛과 함께 오크 주술사가 녹색 피떡이 되어 몇 바퀴나 흙바닥을 구른다.
[롤랑의묵직한철방패님 5,000원 기부!]
오크 주술사 살아있으면 천만원
“저게 살아 있겠냐고!”
목책을 세운 오크 부락을 직선으로 관통해 달린다. 목책도 오두막도 자질구레한 잡동사니와 오크 전사와 오크 주술사까지 직선상에 있는 모든 것을 방패로 밀어버리면서. 흙먼지가 시야를 가리고 넘어진 나무가 사방으로 굴러가며 치인 오크는 녹색 피떡, 아니면 고기 반죽 같은 꼴이 되어 허공을 날아다니다 마석으로 변한다.
물론, 돌진은 한 번이 아니다.
마을을 뚫고 나와 숲속으로 들어간 뒤, 다리에 힘을 줘 흙바닥을 박살 내며 옆으로 조금씩 방향을 전환한다. 그렇게 속도를 줄여 노리는 곳은 내가 뚫고 나온 목책의 잔해보다 조금 더 옆. 서글프게 울려 퍼지는 오크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다시 한번 목책을 뚫고 들어간다.
-그냥롤랑한테업혀서 40층까지달리는거어떰?
-한세아혼신의 딜링 <<< 롤랑의 아침구보
-뭐 있어보이던 주술사(였던) 마석
-그와중에 알뜰하게 템 챙기는거보소
-왜 또 들어가나 했더니 전리품 ㅋㅋㅋㅋ
목표는 마을 중앙에 있었던 오두막… 옆에서 부산물이 되어 사라진 오크 주술사.
처음의 돌진보다는 조금 속도를 줄인 채 마을로 뛰어 들어가 흙먼지 사이로 바닥을 살핀다. 꽤 커다란 마석 하나와 깃털 따위로 장식된 목걸이. 오크 사냥꾼의 부산물은 짐승 송곳니, 오크 전사의 부산물은 작은 짐승의 뼈, 오크 주술사의 부산물은 깃털인가.
딱 봐도 주술적인 의미가 철철 넘쳐 흐르는 부산물을 챙겨 들고 다시 한번 목책을 부수고 달려나간다. 등 뒤에서 집 잃은 돼지들의 서글픈 울음소리가 들려오지만 따라오는 놈은 없었다.
소리를 지르며 달리는 미친놈 하나 때문에 목책이 부서지고 집이 무너지고 이끌어야 할 마을의 우두머리도 뺑소니를 당했으니 정신이 없겠지. 숲까지 전부 부숴버릴 생각은 없으니 속도를 천천히 늦춘 뒤 품 안에서 랜턴을 꺼내 들었다.
“일단 오크 주술사의 지휘 아래 오크 전사들이 돌아다니는 것 같네. 치이면 죽는 걸 보면 체력은 전사나 사냥꾼이랑 비슷… 한가? 저 돌진에 치이면 30층 보스도 뒤지는 거 아니야? 너무 강하니까 되려 감이 안 잡히네.”
흙먼지가 사라져 맑아진 시야에는 숲길을 걷는 일행들의 모습이 보인다. 오크 주술사의 부산물을 챙긴 뒤 카메라를 회수한 모양. 한세아가 작게 중얼거리자 시청자들도 그 말이 맞다며 오래간만에 한세아의 편을 들어준다.
방패에 치여 오크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광경은 어디 가서 보기 힘들긴 하지. 마치 초원에서 내가 고블린을 투포환처럼 던졌던 것처럼.
한세아의 카메라에 비치는 일행들의 안색은 나쁘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오크 마을을 박살 내는 소리를 전부 들은 모양. 그 롤랑이 고작 오크 따위에게 당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그녀들의 마음 한구석에 굳건히 자리 잡고 있나 보다.
“롤랑, 뭐 하고 온 거야? 숲이 엄청 소란스럽던데.”
“마을 중앙에 있는 오두막을 보고 왔지.”
구보를 하듯 천천히 달려 통로 근처의 일행에게 합류하자 가장 먼저 내 인기척을 알아차린 그레이스가 질문을 던진다. 그녀의 호기심을 풀어주기 위해 손에 쥐고 있던 오크 주술사의 부산물을 보여주었다.
색색의 깃털로 장식된 화려한 목걸이를 내밀자 자연스럽게 받아드는 한세아. 인벤토리에 집어넣기 전 파티원들이 호기심에 가득 차 목걸이를 뒤적거린다.
“처음 보는 부산물이네. 오두막에 뭐가 있었어?”
“오크 주술사. 아무래도 주술사 놈이 전사들을 지휘하는 모양이야.”
카메라로 전부 봤으면서 시치미를 뚝 떼고 내게 질문하는 한세아. 어차피 일행들에게 들려줘야 할 이야기니 주술사에 관해 설명해주었다. 내가 박살 내기 전 보았던 오두막 내부의 풍경 같은 것들.
오크 주술사를 방패로 밀어버리고 오두막 입구를 부쉈을 때 커다란 냄비나 동물의 뼈 같은 게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지금은 흙먼지 속에 가루가 되어 가라앉았겠지만.
“오크 주술사라니… 보기 드문 녀석이 등장했군요. 이곳에만 있을까요?”
“어쩌면 20층 곳곳에 생겨났을지도 모르지.”
“롤랑, 오크 주술사는 어떤 녀석들이야?”
용병으로 떠돌아다닌 경험이 꽤 되는지 주술사에 대해 알고 있는 듯한 케이든의 말과 반대로 전혀 모르는 듯한 그레이스의 질문. 그레이스도 아이린도, 그리고 한세아도 오크 주술사에 대해 모르는 것 같아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오크 주술사는 케이든의 말대로 매우 희귀하다.”
“왜?”
“똑똑해야 하니까.”
사냥꾼은 전문적인 기술이 있어야 하고, 주술사는 기술에 더해 높은 지능과 마력을 다루는 실력까지 있어야 한다. 근력을 얻은 대신 지능을 포기한 돼지 대가리 중 똑똑한 상위 0.1%만이 가능한 직업.
이 때문에 인간 중에서 마법사가 희귀하듯 오크 중에서 주술사는 더욱더 희귀한 편이다. 물론 탑 내부에서 등장하는 놈에, 퀘스트가 얽혀 있으니 1부락 1주술사 할당제가 이루어질 것 같기도 하고.
“아….”
“확실히, 그 오크들에게 똑똑함을 요구하긴 힘들지.”
오크 전사들이 순찰하며 얼마나 무식하고 시끄럽게 굴었는지 몸소 겪은 일행들이 작은 감탄성을 내뱉는다. 다섯 마리가 내게 줄지어 달려들어 나란히 바닥에 눕는 꼴이 얼마나 우스웠는가.
만나는 놈들마다 가장 앞에 있는 내게 달려드는 걸 반복하기만 하니 후열에 있던 케이든이 무기를 내리고 구경을 해도 안전할 수준의 지능.
한세아처럼 가챠로 사기를 친 사람이 아니라 평균적인 유저들에게 맞춰 준 듯한 레벨 디자인이었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우리 일행에게는 20층의 퀘스트 몬스터도 너무 연약하게 느껴진다는 뜻이다.
“그리고 주술사인 만큼 당연히 다양한 주술을 사용해. 염료와 약물을 사용해 오크 전사들을 광폭화 시키던가, 오염된 토템으로 저주를 날리거나 하는 식이지. 이건 성법의 보호막으로 막아낼 수 있고.”
“여신님의 은혜는 몬스터의 더러운 수작질 따위에 꺾이지 않으니까요.”
“그 외에는 뭐, 의외로 몸이 튼튼하다는 점이 있지. 오크 전사보다 연약한 놈이 주술사가 된 게 아니라 전사 중 똑똑한 놈이 주술사가 된 거니까.”
주술사와 마법사 하면 골방에 틀어박힌 비실비실한 공붓벌레를 떠올리는 건 현대도 판타지 세상도 별반 다를 게 없다. 실제로 초보 모험가가 고블린에게 자주 당한다면, 경험이 부족한 중급 모험가는 오크 주술사의 지팡이에 대가리가 깨지는 일이 자주 있지.
전사들을 뚫고 주술사에게 접근해서, 승리를 예감하고 자만하다가 묵직한 지팡이에 얻어터지는 것이다.
야구 방망이도 사람을 죽일 수 있듯 근육질의 거한이 1m짜리 나무 몽둥이를 휘두른다면 그것은 충분한 흉기가 된다. 일격에 대가리가 오목해지진 않겠지만 뇌진탕은 충분히 일어나는 수준. 오크 부락 한가운데에서 뇌진탕에 걸리면 뭐… 그 결말은 정해져 있는 거고.
“정리하자면, 주변의 오크 전사들이 갑자기 강해질 수 있다. 저주가 날아오지만, 아이린 언니가 보호막으로 막아줄 수 있다. 근접전이 벌어질 때 오크 전사 수준의 근력이 있으니 주술사라고 방심하지 말 것. 이 정도인가?”
“그렇지.”
내 이야기를 들은 한세아가 일행들과 시청자 모두 들으라는 듯 하나씩 정리한다. 주술이 까다롭다 해도 결국 상대는 오크. 파티에 사제 하나 있으면 카운터 처맞고 힘도 못 쓰는 돼지일 뿐이다.
조금 걱정이 되는 건 무식하리만치 많은 숫자. 주술사 한 마리가 이끄는 마을에 오크가 수십 마리 있었는데 정작 주술사가 보스 몬스터가 아니다.
퀘스트 이름이 오크 왕국이라고 한세아가 말했는데, 오크 왕이던 오크 로드던 보스 몬스터가 오크를 우르르 몰고 나오면? 이번에도 만월 늑대 때려잡듯 달려들어서 박살을 내야 하나? 그러면 보는 재미가 있으려나 모르겠네.
“일단 보고를 위한 증거품은 다 챙겼으니 밖으로 나가자. 탑에 이변이 일어났으니 야영은 하지 않고 강행군을 할 생각이야. 조금 힘들겠지만 참아줬으면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