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층에서 일어난 수상한 일을 조사하여 모험가 길드와 마탑에 보고할 것이냐. 아니면 그다지 큰 위험이 아니니 무시하고 원래의 목적인 21층 통로를 찾아 확인할 것이냐.
고민 끝에 파티원들이 하나둘 입을 열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고민을 끝낸 건 무시하고 21층의 통로를 찾자고 주장하는 케이든. 뒤이어 아이린과 그레이스도 입을 열어 의견을 보탠다.
“아무래도 21층의 통로를 찾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보고는 부산물만 가지고 해도 충분할 테니까요. 정보 하나 없이 이상 현상을 조사한다 해도 유효한 정보를 얻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오크 전사들이 나타났다면, 이유를 한 번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희가 탑에 오르는 이유는 단순히 빠르게 위로 올라가기 위함이 아니라 탑에 있는 미지를 밝히기 위함이니까요.”
“나도 아이린 언니의 말이 맞다고 생각해. 명백히 이상한 징조를 느꼈는데 무시한 채 등 돌리는 건 찝찝하기도 하고.”
효율을 생각하는 케이든, 사명을 생각하는 아이린, 사냥꾼으로서의 감을 이야기하는 그레이스까지. 2:1로 갈린 의견에 한세아의 입꼬리가 씰룩거리며 올라간다. 설득할 필요 없이 퀘스트를 진행하는 흐름이 되었으니까.
마음 같아서는 케이든의 편을 들어주며 한세아가 울상이 되는 꼴을 보고 싶지만 나도 퀘스트 보상이 걸린 상태니 참는다. 따라서 세 사람이 의견을 교환하는 동안 슬그머니 한세아의 방송국 게시판에 짠해좌로서 의견을 하나 남겼다.
―한세아 퀘스트 깨는 거 보면 마음이 짠해
마법사면서 마탑을 이용할 생각을 못 하는 걸 보면 슬퍼…
분명 롤랑이 탑 내부에는 베이스캠프 같은 게 있다고 했는데
20층에 머무르는 마법사를 찾을 생각도 못 하는 지능이라 더 슬퍼…
지금 당장 한세아가 읽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짠해좌의 새 글을 보고 어그로를 끌길 바라며 남기는 게시글. 뒤로 슬쩍 빠져 이야기를 나누는 일행들을 보며 게시글 작성을 완료한 뒤 이야기를 들으며 고민한 척 앞으로 나섰다.
“의견이 갈렸을 땐 파티의 리더가 통솔해야지. 어떻게 할 거야, 한나?”
“나는… 그레이스와 아이린의 의견이 맞다고 봐. 케이든 씨의 의견대로 효율이 좀 떨어질 수도 있는 행위지만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졌는데 효율을 따지느라 사실 확인을 안 하고 넘어가는 건 조금 불안하다고 생각해.”
한세아의 말에 위계질서를 철저히 지키는 케이든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곧바로 순응한다.
단서가 너무 부족할 것 같다는 케이든의 우려와 달리 숲에는 단서가 차고도 넘쳤다.
“조심성이라는 게 없는 놈들이군요.”
“이 숲에 위험한 게 없다고 믿는 것 같은데.”
20층의 숲에서 나오는 네임드 몬스터는 오크 사냥꾼이다. 그 외에 등장하는 건 우리가 지겹도록 상대한 고블린, 코볼트, 이끼늑대와 투구사슴. 그리고 그 네 종의 몬스터는 모두 오크 사냥꾼의 사냥감이다.
이 뜻은 오크 사냥꾼은 물론이요 시끄럽게 떠드는 오크 전사들의 천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물론 숲을 돌아다니는 모험가들을 만난다면 그 짧은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게 되겠지만… 그쯤 되면 오크들의 목숨이 붙어 있지를 않지.
뀌에엑-!
뀍, 뀍!
조금만 걷다 보면 그레이스가 탐색하기도 전에 숲속에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돼지 울음소리가 들린다. 소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면 투구사슴이나 이끼늑대 따위를 사냥하는 오크들이 보이고.
물론 백날 짐승을 사냥해 봐야 일반 몬스터들은 마석만 남기고 사라질 뿐.
살집 두둑한 투구사슴을 잡고 기뻐하다가, 시체가 마석이 되어 사라지면 흥분해서 꽥꽥 소리를 지른다. 흥분이 조금 가라앉으면 다른 사냥감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하는 오크들. 영원히 돌을 굴리는 시시포스처럼 사냥을 반복하는 오크들의 종착지는 한세아의 인벤토리다.
“어째 오크 사냥꾼보다 훨씬 쉽게 사냥하는 기분이 드는데.”
“맞아. 수가 많지만, 몸을 숨길 생각 따위를 안 하니까.”
최소 셋, 최대 다섯. 무리를 지어 다니는 오크 전사들이지만 육체 능력이 어마어마한 건 아니다. 민간인보다는 강력하지만 20층을 오가는 모험가에 비하자면 평범한 수준. 그런 몬스터가 아무리 많아봤자 다섯 마리다.
모험가로서 20층에 도달한 인간이 돼지 대가리에게 전술적 움직임으로 밀리는 일은 당연히 없다. 탱커가 막아 세우고 후열이 지원사격을 하는 기초적인 움직임만으로 우세를 점할 수 있는 상황.
함정을 파고 도망만 다니는 오크 사냥꾼보다 손쉬운 사냥감인 건 당연한 이야기다. 머릿수가 많아진 대신 각 개체의 레벨은 낮아진 느낌.
“그래도 다행이네.”
“뭐가요, 언니?”
“오크들이 그 뿔늑대처럼 도시에 튀어나왔으면 사람이 엄청나게 다쳤을 거 아니야. 뿔늑대는 숨어 있다가 사람이 다가오면 기습하지만, 오크들은 무식하게 돌아다니니까.”
“그것도 그렇네요.”
벌써 몇 번이고 마주친 오크의 부산물을 주섬주섬 챙겨 든 그레이스와 한세아가 대화를 나눈다. 하긴 이 시끄럽게 난장판을 피우는 오크가 도시에 나타났다면 골치가 좀 아팠겠지.
같은 걸 반복하지 않으려는 퀘스트 디자인인지, 아니면 게이머의 편의성을 생각한 건진 몰라도 오크가 도시에 등장하지 않은 건 다행이긴 하네. 그렇게 생각하며 숲의 소음을 추격하기를 한참.
앞장서던 그레이스가 움찔거리며 일행들을 멈춰 세운다.
“…뭔가, 이상한 게 앞에 있는데.”
“이상한 거?”
“아니, 그, 엄청 시끄러워.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큰데….”
그레이스의 경고를 듣고 조금 걸어가자 시끌벅적한 소음이 귓가에 들려온다. 뀍뀍거리는 돼지 울음소리와 탕탕 나무를 두들기는 도끼의 소리. 넘어지고 끌려가는 아름드리나무가 내는 소음까지.
고블린과 코볼트의 부락이 아닌, 오크 전사들의 부락이 눈앞에 있었다.
“이게, 무슨…?”
“세상에….”
20층을 짐꾼으로서 와 본 케이든이 상식 밖의 상황에 놀라고, 예비 성녀 아이린이 여신의 눈 밖에서 모이기 시작한 몬스터들의 행보에 경악한다. 오크 수십 마리가 모여 목책을 세우고 부족을 이루기 시작하면 놀랄 수밖에 없겠지.
고블린과 코볼트가 만든 볼품 없는 움막 따위가 아니다.
오크 전사 특유의 근력으로 주변의 나무를 베어내고, 그걸 다듬어 투박하지만 높은 목책을 만든다. 정찰 겸 벌목을 하는 오크 전사들과 주변을 수색하여 사냥감을 찾는 오크 사냥꾼까지. 몬스터 무리보다는 야만인의 군대라고 해야 할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이건, 한 번 확인해 봐야겠는데.”
“뭘 확인해?”
“저 오크들을 전부 상대하긴 귀찮을 테니까 조금 뒤로 빠져서 은신해 있어.”
“…롤랑?”
자연스럽게 주춤거리며 뒤로 빠질 준비를 하는 파티원들. 오크 사냥꾼을 추적하고 오크 전사 무리를 상대했다 해도 상대는 커다란 부족이었다. 오크 5마리를 상대하는 것과 오크 50마리를 상대하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
한마음 한뜻이 되어 조용히 빠져나가려는 일행들과 정 반대 방향으로 내가 발걸음을 옮겼다.
오크 전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오크 부락이 등장한 것까지 확인했지만, 아직 궁금한 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목책을 세우기 시작하는, 반쯤 완성된 오크 부족한 가운데에 있는 커다랗고 화려한 집. 거기에 있는 게 누구인지 확인은 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19층으로 내려가는 통로에 미리 가 있어. 전투는 최대한 회피하고.”
-빨리롤랑한테카메라안붙이면바지에똥을싸겠다
-카메라 분할 안배웠으면 억울해서 동서남북으로 울부짖을뻔
-분할할필요 없이 롤랑만 찍어도 될덧
-ㅈㄹㄴ 우리눈나는카메라에담아죠
-또또 이상성욕대회 열리죠 시발럼들
내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시청자들. 방송 욕심이 있는 한세아가 시청자들의 기묘한 협박에 고개를 작게 끄덕이더니 내게 카메라를 한 대 붙인다. 그렇게 수풀 너머로 조용히 사라지는 일행들을 확인한 뒤 천천히 몸을 풀었다.
딱히 몸을 풀어야 할 상대는 아니지만 운동선수의 루틴과도 같은 행위. 널널하게 쉬고 있던 근육에 바짝 긴장을 주고, 그 위에 마력을 한층 더 덧씌운다.
심장이 펌프질하며 효율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 마력이 전신을 향해 퍼져나간다. 이 순간부터 여기에 서 있는 건 인간이라기보다는 두 발로 걷는 전차에 가까운 괴물. 자세를 낮추고 다리에 체중을 싣는 순간 숲의 흙바닥에 푹 패이며 가뭄이 난 것처럼 이리저리 금이 간다.
쿵, 쿵- 걸을 때마다 피어오르는 흙먼지에 시야 한구석에 띄워둔 한세아의 방송에 난리가 난다.
[오크의엉덩이를후벼판한세아님 10,000원 기부!]
롤랑이 머하려는건지 예측가능?
“만 원 기부 감사하긴 한데, 너 시발 닉네임 안 바꾸면 바로 유료 밴 일주일이야. 확인할 게 있다면서 밀고 들어가는 거 보면 오크 전사 말고 다른 몬스터가 있는지 확인하는 게 아닐까?”
-(매직미사일로)후벼파긴 했지
-표현을 시발럼들아 ㅋㅋㅋㅋ
-그렇게치면 그레이스눈나도 뿔늑대를 후벼팠는데
-만원내고 포상받은다음 채금 달달하구요
-평범한닉네임쓰면 뒤지는병에걸렸어오
그레이스의 탐색 능력과 시끄럽기 그지없는 오크 전사들의 소음이 맞물리자 방송 속 일행들은 무사히 통로로 향할 것 같았다. 오크들의 뀍뀍대는 소리가 워낙 시끄러워서 투구사슴도 이끼늑대도 거기에 어그로가 끌리거든.
그렇게 방송을 보며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섰다.
카메라 드론이 목책 위로 날아올라 나를 정면에서 촬영한다. 그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도록 노력하며 방패를 세우고 앞으로 나아간다. 성큼성큼 걸어 목책이 코앞에 다가올 때까지. 아름드리나무를 쓰러트려 잔가지를 베어낸 뒤 그대로 세워버린 두꺼운 목책.
하지만 뿌리가 든든한 나무도 나를 막지 못하는데 이미 뿌리가 뽑혀버린 나무가 무얼 어쩌겠는가? 그대로 방문을 열 듯 방패로 목책을 밀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