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175)

희번덕거리는 한세아의 눈동자에 채팅창에 불이 났다. 그녀의 성격을 아는 기존 시청자들은 제 버릇 개 못 준다며 낄낄 웃기 시작하고, 게임 공략을 위해 뒤늦게 유입된 시청자들은 좀 더 스마트한 방법이 없냐고 채팅창에 갈고리를 던지는 모양새.

게임에 있어서는 늘 뚝심 있게 밀어붙이는 한세아는 시청자의 의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밀어붙인다.

 “함정이 있다는 건 아무튼 오크 사냥꾼이 근처에 있다는 거잖아. 그레이스 언니는 함정은 못 찾아도 오크 사냥꾼은 찾아낼 수 있을 거고.”

 “그건 그렇지…?”

 “그러니까 둘이서, 숲을 밀어버려.”

사냥꾼은 사냥감을 추적한다.

도적은 함정과 자물쇠를 해제한다.

오크 사냥꾼의 함정을 발견하지 못한 건 그레이스의 탐색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니다. 게임의 시스템 때문에 생긴 선천적인 제약이지. 내가 마력을 다뤄도 마법은 쓰지 못하는 것처럼 아주 간단하면서도 기본적인 RPG의 룰 때문에 부비트랩은 찾아내지 못하는 그레이스.

그 사실을 확인한 한세아가 거침없이 명령을 내린다.

[히어로즈 크로니클 갤러리]

―✪ 오늘자 진짜 광기

―✪ 여자가 한을 품으면

―✪ 이게 방송이지 시발 ㅋㅋ

―✪ 부러진 롱소드로 만월늑대 잡아봄

―✪ 니들이 5★을 못보는 이유.EU

한세아는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조금 과장인 것 같지만 아무튼 해외의 레딧 따위에도 그녀의 플레이가 올라오고 있었으니 전 세계 다양한 게이머의 주목을 받는 건 사실이긴 하지.

팬티 한 장 걸치고 극강의 난이도의 보스를 사냥하는 고인물의 영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게이머들에게 퍼져나가는 것과 같다.

그렇기에 한세아는, 정확히는 6★ 롤랑을 통해 누구보다 빠르게 탑의 진도를 나아가는 한세아의 영상은 은근히 많은 커뮤니티에 퍼지게 된다. 한세아가 매력적이어서, NPC가 예쁘고 잘생겨서, 11층부터 시작되는 숲이 궁금해서―

―이게 방송이지 시발 ㅋㅋ

[철퇴로 나무를 넘어트리는 롤랑.GIF]

[넘어지는 나무를 피해 도망치는 오크 사냥꾼.GIF]

[결국 잔해에 깔려 뒤진 오크 사냥꾼.JPG]

시발련아 6★을 뽑았으면 진즉 이렇게 게임을 해야지 ㅋㅋ

계집련 아니랄까봐 존나 느릿느릿하게 진도 빼더니

이제야 정신차렸네 시발 ㅋㅋ

┗이새낀 무슨깡으로 방송인한테 욕을박지?

┗VPN꺼진거 모르나본데 캡처 달달하고

 ┗실수로 로그인하는건 봤어도 실수로 VPN끄는건 첨보네

┗그, 친구는 선이라는 걸 모르나?

┗욕은 둘째치고 속은 시원하긴 하더라

그리고 6★의 위력이 궁금해서. 이게 실시간으로 중계가 되고 인터넷 게시판에서 인기글이 되네.

나는 한세아가 파티의 리더로서 내린 명령을 존중하고 최대한 따랐다. 철퇴를 붕붕 휘둘러 잔디를 깎는 잔디깎이처럼 숲의 두꺼운 나무를 좌우로 쳐내면서 길을 열어버렸거든.

나무의 허리를 박살 내고 뿌리를 뽑아버리는 괴력으로 날뛰니 두어 명 지나갈 길이 아니라 자동차도 지나갈 길이 완성되었지만 상관없다. 몬스터가 계속해서 등장하듯 박살이 난 숲도 결국 재생될 테니까.

이게 재생되지 않으면 모험가들끼리 숲 스테이지의 통로와 통로 사이를 완전히 벌목해버렸지. 나 같은 상급 모험가 수 십 명이 도끼를 들고 나무를 박살 내면 오크 사냥꾼 따위가 뭐 반항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다 밀어버려 롤랑!”

 “이, 이래도 괜찮을까요? 다른 모험가 분들께 방해가 되는 건….”

한세아의 판단은 전략적으로 나쁘지 않았다. 애초에 오크 사냥꾼의 함정을 대처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탱커가 갑옷과 방패로 밀어버리는 것이었으니까. 탑 내부라는 열악한 환경에서 조잡한 재료로 만들어진 부비트랩은 강철 갑옷을 뚫을 수 없다.

그렇다고 얌전히 몸으로 밀어버리기만 하면 보는 맛이 없지.

사람은 무언가 쾅쾅 터지는 마이클식 블록버스터를 좋아하는 법이다. 그게 주인공만 아니면 속 시원하게 펑 터져버리고 적이 혼비백산해서 달아나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굴러가는 바위를 피하고 무너지는 나무에 휘말린 오크 사냥꾼이 분투 끝에 내가 철퇴로 날려 보낸 자갈에 피격당해 바닥을 구른다. 십 수 그루의 나무가 벌목된 것처럼 쿵쿵 넘어지는 와중 바닥을 구르게 되면 그 결말은 한 가지뿐.

 “이러면 부산물이 나무 밑에 있나?”

 “…압사당한 오크 사냥꾼은 본 적이 없어 모르겠군요.”

하반신이 흙더미에 묻힌 채 머리 위로 떨어지는 대들보보다 두꺼운 나무에 깔려 뀌엑- 하는 처참한 소리와 함께 사라진다. 여기가 탑 내부가 아니었다면 영 좋지 못한 꼴이 되었겠지.

만월 늑대도 이렇게 흙더미에 묻혀버렸는데 얘는 나무 밑에 깔렸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사람보다 두꺼운 통나무를 들어 올렸다.

생명력이 질긴 오크라 해도 아름드리나무의 충격을 버틸 순 없었는지 흙더미에 파묻혀 있는 오크 사냥꾼의 부산물이 보인다. 오크의 누런 송곳니와 사냥꾼의 증표인 뼈 목걸이와 짐승 이빨 팔찌.

 “이게 오크 사냥꾼의 부산물인가? 좀, 지저분하네.”

 “뿔늑대와 비교하자면 그렇지.”

최고급 모피처럼 보이던 뿔늑대의 가죽, 보석처럼 보이던 뿔늑대의 눈알 따위와는 다른 오크 사냥꾼의 부산물. 짐승형 몬스터와 인간형 몬스터의 차이인지, 아니면 육체 일부인가 아닌가의 차이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런 걸 밝혀내려고 마법사들이 오늘도 야근하며 실험과 논문 속에 파묻혀 있는 것 아니겠는가.

실제로 마탑의 마법사들이 마석이 아닌 이런 부산물까지 통째로 사들이는 이유가 실험 때문이다. 왜 시체와 활과 잡다한 도구는 마석이 되어 사라지는데 팔찌와 목걸이는 남아있는가? 따위를 실험하고 논문으로 작성하기 위해서.

 “속이 시원하긴 한데, 오크 사냥꾼을 마주할 때마다 이렇게 숲을 박살 내면서 잡긴 좀 그런가?”

 “조금, 과도한 것 같긴 합니다.”

-이제야 머리를 굴리기 시작하네

-선빵 맞았으니 잡아 죽이고 생각은 나중에

-시체를봐야성이풀리는무친련

-오크 한 마리에 축구장 하나는 나오겠다잉

-언제부터 벌목방송으로 장르가바낌

부산물을 인벤토리에 챙겨 넣은 한세아의 말에 케이든과 시청자들이 동시에 반응한다. 도망치는 오크 사냥꾼 한 마리 잡겠다고 뿌리째 뽑아버리고 허리를 꺾어버린 나무가 거의 수십 그루.

단순 무식해서 볼 맛은 나지만 오크 사냥꾼이 등장할 때마다 이런 짓을 할 순 없지.

거기에 20층으로 내려온 마법사들도 있으니, 잘못하면 다른 모험가들이 내 난동에 휘말릴 수 있다. 이대로 가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사건이 되어버린다고. 다른 모험가도 아니고 실험 중인 마법사와 척을 지고 싶은 마음은 절대로 없다.

 “일단 그레이스와 롤랑이 앞장서서 탐색은 계속하자. 가만히 고민해봐야 답이 나오진 않을 것 같아.”

나와 그레이스가 앞, 아이린과 한세아와 케이든이 뒤. 그레이스는 내가 방패와 갑옷으로 보호하고 후열은 순발력 좋은 케이든이 보호하는 방식. 결국, 찾아내지 못할 함정은 몸으로 뚫어버리겠다는 전략이다.

찾기 어려운 함정, 그것도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함정 때문에 이동 속도가 느려지느니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고 몸으로 때우겠다는 의지. 시청자들은 또 무식한 방법을 쓴다고 깔깔 웃어대지만 나는 아주 만족스럽다.

몸이 나쁘면 머리가 고생한다고, 그냥 무시하고 뚫어버릴 수 있는데 또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내겠다고 끙끙 앓을 필요는 없잖아.

 “21층의 통로를 곧바로 찾을 순 없을 테니까, 저녁 즈음이 되면 야영을 할 터부터 찾는 것도 좋을 것 같아.”

 “그래. 탐색하면서 주변에 공터가 있는지도 확인해 볼게.”

흥분을 가라앉혔는지 다시 탐색을 시작하는 한세아. 그녀의 말에 따라 그레이스와 내가 박살이 나서 강제로 공터가 되어버린 숲길을 뒤로한 채 발걸음을 옮긴다. 내 옆에 착 달라붙어서 소곤소곤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그레이스.

 “…함정을 발견하지 못 할 줄 몰랐어. 인기척이라 해야 하나, 몬스터의 기척은 이렇게 섬세하게 느껴지는 데 왜 저런 조잡한 나뭇가지는 못 발견하는 걸까?”

 “아무래도 사냥꾼으로 활동하면서 사냥감을 추적하는 일에 익숙해져서 그렇겠지. 반대로 자물쇠 따기와 함정 해체에 능숙한 도적들은 뿔늑대나 이끼늑대를 찾아내지 못하는 것처럼.”

한세아는 휘둘러진 나뭇가지에 쫄아서 반응을 못 해 게이머의 자존심이 상한 상태. 그레이스도 비슷한 느낌으로 탐색꾼인 자신이 조잡한 부비트랩을 발견하지 못한 것에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다.

그녀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오크 사냥꾼의 부비트랩이 굉장히 조잡하기 때문. 탄력 좋은 나뭇가지를 뒤로 당겨서 얇은 덩굴 밧줄로 묶어둔 게 전부였으니까.

정작 이끼늑대의 가죽을 뒤집어쓴 채 구덩이를 파고 낙엽을 덮은 채 은신한 오크 사냥꾼은 곧바로 찾아낸 것이 그레이스의 탐색 실력이다. 발로 밟는 게 아니라면 눈으로는 찾기도 힘든 은신처는 눈 감고도 찾아내는데 휘어진 나뭇가지는 못 찾는 게 좀 웃기긴 해.

하지만 마력으로 강화한 주먹으로 바위도 부수지만, 그 강인한 마력으로 매직 미사일을 만들지도 못해 계란도 못 부수는 나를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궁수가 도적 스킬까지 해 먹으면 직업을 왜 나눠 놓겠어.

 “그래서 20층에서 활동하는 모험가들은 궁수보다 도적을 선호해. 위로 올라가면 함정을 설치하는 놈이 없어서 곧바로 궁수들이 더 우세를 점하긴 하지만.”

 “위층은 어떤데?”

 “숲 다음은 동굴이거든. 거기는 누군가가 설치한 함정이 있는 게 아니라 지형지물 자체가 복잡하고 어지러워. 거기서부터는 도적이나 궁수인 게 중요하지 않고 길을 잘 기억하는 사람이 중요해지지.”

10층 뿔늑대 탐색에는 궁수가 유리하고, 20층 오크 사냥꾼 추격에는 도적이 유리하다. 30층부터는 직업이 아니라 스킬 레벨이 중요해지는 시점인 셈. 그레이스를 달랠 겸 시청자들에게 슬쩍 정보를 흘리기 위해 21층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초원 다음에는 숲.

숲 다음에는 동굴.

우리가 곧 가게 될 21층의 정보에 호기심을 느끼는지 뒤쪽에서 도란도란 진행되던 대화가 자연스럽게 끊긴 것이 느껴진다.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는 것보단 동굴에 대한 이야기가 듣고 싶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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