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67/175)

그레이스야 캐릭터 퀘스트에서 알 수 있듯 나를 사랑하는 게 뻔하다. 술 먹고 달라붙는 것 하며 한세아가 대놓고 우리 둘이 붙어 있도록 밀어준 적도 있지. 거기에 드러난 부분은 얼굴밖에 없지만, 그 외모가 심상치 않은 아이린이 찰싹 달라붙은 모양새.

양손의 꽃이라는 말이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지.

대놓고 사랑을 표현하는 그레이스와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는 아이린. 게임 방송인 만큼 남자 시청자가 많아서 그런지 마법사 한나의 모험담보단 롤랑의 연애사에 관심이 더 많아 보이는 시청자가 늘어나고 있다.

전생에도 우결충이니 과몰입이니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여기라고 없겠는가. 능력 좋고 잘생긴 판타지 속 기사님과 어여쁜 궁수, 사제. 엉뚱한 방향으로 몰입을 한 시청자들의 채팅이 어지럽게 올라온다.

 “어허, 롤랑 하렘단이라뇨. 아직 아이린 언니는 데이트도 하지 못했습니다. 은근히 보는 재미가 있는데 나중에 함 밀어볼까. 근데 캐릭터 퀘스트 등장하기 전에 밀어주는 건 좀 쫄리는데.”

[마망은마망이라마망님 5,000원 기부]

아이린마망 사복차림으로 롤랑이랑 데이트하면 십마넌

 “아, 미션 감사합니다. 닉네임이 좀 역하긴 한데 미션 내용은 좀 흥미롭네요. 어제 보니까 눈나는눈나라눈나? 뭐 그런 사람도 있던데 부캐 돌리는 거 아니죠?”

당장 한세아만 하더라도 흥미를 느끼고 그쪽으로 시청자를 유도하고 있으니 말 다 했지. 인터넷의 온갖 매콤한 익명의 글 속에서 한세아더러 수금귀신 금수귀신이라 부르는 이유가 있긴 하네.

남의 연애사로 미션금을 빨아먹고 있어.

숲길을 걸으며 그레이스와 아이린의 곁에서 북부에서의 일을 이야기한다. 떠들 내용이라곤 상급 모험가로서 소재를 후딱 구해 온 일과 시원한 얼음 맥주를 들이마신 내용밖에 없으니 살을 덧붙여야 했지만.

금화를 쥐여줬더니 북쪽의 접수원이 헤벌쭉해져선 하룻밤을 즐길 수 있을 분위기였다~ 라든가, 인터넷으로 오래간만에 웹서핑하며 처음 보는 웹툰을 실컷 봤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으니까.

 “북쪽의 모험가들은 대부분 실력 좋은 사냥꾼들이야. 날이 서늘하고 산맥이 험난한지라 동쪽과 남쪽처럼 대규모 곡창지대가 없거든. 질 좋은 모피를 팔아서 생활하는 사람들이다 보니 모험가들도 대부분 사냥꾼 출신이지.”

 “그런 차이가 있구나….”

 “그 때문에 초급과 중급 모험가의 질을 따지자면 북쪽의 모험가가 제일 뛰어나다고 볼 수 있지. 여기처럼 어중이떠중이들이 다 모험가가 되겠다고 달려드는 게 아니니까. 반대로 상급 모험가는 여기가 제일 유명하고.”

 “탑 때문인가요?”

 “맞아. 탑의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는 건 하루하루가 투쟁의 연속이라는 이야기니까. 나처럼 쉬엄쉬엄 의뢰하는 것도 아니고 미지의 공간에서 년 단위로 머무르는데 실력이 늘어날 수밖에 없지.”

그렇기에 이야기할 수 있는 건 북부와 이곳의 차이점 중 모험가와 관련된 이야기. 북쪽의 사냥꾼이 유명하다는 이야기에 그레이스가 눈을 빛내고 탑 이야기에 아이린이 질문을 던져온다.

두 사람 다 관심사가 아주 명확하니 이야기를 하기도 편하네.

레인저의 기술을 배웠지만, 정식 레인저는 아닌 그레이스는 북쪽의 동업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성직자인 아이린은 결국 모험가들이 모이게 되는 탑에 관심을 가진다. 한세아도 그렇고 우리 일행들은 속마음이 훤히 보이는 편.

지금까지의 인간관계에서 속마음이 훤히 보이는 건 본능에 따라 짐승처럼 구는 레베카가 전부였기에 신선하기까지 하다. 나머지는 길드장이나 마탑의 할배, 정보 길드의 높으신 분 같이 속이 음흉한 사람이 대부분이었으니까.

 ‘이 맛에 뉴비를 키우는구나.’

속마음이 훤히 보인다.

하는 짓이 귀엽다.

시키면 열심히 한다.

어째서 RPG의 고인물들에게 뉴비가 천금보다 귀한 존재인지 알 것 같은 상황. 뉴들박이니 소매 넣기니 하는 요상한 행위가 왜 유행이 되었는지 몸소 느끼게 된다. 일행들을 위해서라면 주머니에서 금화가 줄줄 새어나가도 아깝지 않을 수준.

 “북부에 사냥꾼이 많다면 전위가 부족하려나?”

 “아니. 부족한 건 오히려 마법사들이야. 척박한 환경 때문에 남자 대부분은 싸우는 방법을 배우거든. 하지만 연구 거리가 부족해서 북부에 자리 잡은 마법사가 거의 없지. 정확하게 말하자면 모험을 하는 마법사가 없어.”

 “북부에도 여신님의 뜻을 전하는 형제, 자매님들은 계신다고 들었는데….”

 “맞아. 그래도 환경 자체가 열악해서 모험을 나서는 사제가 많은 건 아니야. 신전이 다친 모험가들을 보살펴주긴 하지만 절대적인 수는 부족하거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숲을 헤쳐나간다. 별이 하나 늘어나며 스킬까지 얻은 그레이스의 탐색 능력은 이끼늑대의 기습도 투구사슴의 돌진도 멀찍이서 알아차리는 수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형이 세 명과 두 명으로 갈렸다.

내 옆에서 랜턴을 들고 대화를 나누는 그레이스와 한 걸음 뒤에서 북부 이야기를 듣는 아이린. 그리고 조금 떨어진 뒤쪽에서 우리 세 명을 보며 시청자들과 수다를 떠는 한세아와 그녀를 호위하듯 후열에 선 케이든으로.

그레이스의 탐색 능력이라면 후열이 기습당할 상황은 어지간해서 존재하지 않지만, 케이든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위험합니다!”

 “한 번 시청자 토토 걸어볼, 꺄악!”

수다를 떨던 한세아와 다르게 말이야.

파앙-하고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마치 몽둥이처럼 휘둘러지는 나뭇가지. 그 끝에는 뾰족하게 다듬어진 돌멩이가 마치 칼날처럼 박혀 있었다. 중급 모험가라면 죽지는 않아도 거동이 불편할 정도의 큰 상처를 입힐 수 있는 트랩.

탑의 20층에서 이런 짓거리를 하는 건, 당연하게도 오크 사냥꾼뿐이다.

원래대로라면 약탈하든 사냥을 하든 짐승의 송곳니나 녹슨 칼날 따위로 함정을 만들겠지만, 탑 안에서 부산물을 떨어트리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오크 사냥꾼뿐. 그러니 숲에 널려 있는 나뭇가지와 돌멩이 따위로 부비트랩을 만든 것이리라.

 “이, 이건?”

 “오크 사냥꾼의 함정 같습니다.”

 “맞아. 반응 속도가 좋네 케이든. 그리고 한나와 그레이스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뭘 잘못했는지 알지?”

19층에서의 반복된 야영 때문일까, 아니면 6★이 전위에 서 있다는 자만심 때문일까. 케이든이 없었더라면 저 뾰족한 돌멩이는 한세아의 얼굴을 후려쳤을 것이다. 갑옷을 입은 건장한 남성의 목을 노린 높이니까.

아무리 오크 사냥꾼이 오크라지만 뾰족한 돌멩이로 강철 갑옷을 두들겨 부술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놈의 함정은 발목이나 관절, 목덜미와 눈을 노리는 게 대부분.

 “미안해, 한나. 내가, 내가 발견해야 했는데.”

 “아니에요 언니. 휘어둔 나뭇가지 정도는 내가 쉴드로 막을 수 있는데… 너무 방심했나 봐.”

-아니쉬발방송보다 얼굴에 폰떨궜네

-하다하다 점프스퀘어까지등장함?

-한세아 비명소리에 더 놀랐네슈발

-오크따라지가 부비트랩도 깔아?

-비명지르는 움짤 수출각이구요

케이든의 검에 베인 채 바닥을 나뒹구는 얇고 탄력 넘치는 나뭇가지. 6★으로 시작해 5★ 하나, 4★ 두 명이 포함된 총합 19★파티가 처음으로 겪은 위기치고는 너무나도 초라한 물건이었다.

투박하지만 뾰족하게 다듬은 돌멩이, 숲의 덩굴을 가늘게 꼬아 만든 밧줄, 투석기처럼 팽팽하게 잡아당겨 장전된 나뭇가지.

고작해야 이따위 부비트랩에 당할 뻔했다는 사실 때문인지 한세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쪽팔린 장면의 클립을 따였다는 사실도, 짓궂게 놀려대는 시청자 때문도 아니다. 가끔 보이는 자질 있고 향상심 넘치는 인재들에게서 볼 수 있는 표정.

―스스로 느끼는 부끄러움.

 “하, 이거, 진짜…. 그레이스 언니. 화내려는 건 아니고 파티장으로서 물어보는 거예요. 이거, 솔직히 말해서 이끼늑대보다 찾기 쉬운 것 같은데 이야기하다가 놓친 건가요? 아니면 살아 있는 게 아니라서 못 찾고 넘긴 건가요?”

 “후자가 맞아. 숲속에 있는 나뭇가지니까 특별한 기척 같은 게 없어서 눈치를 채지 못했어. 이끼늑대 같은 경우는 기척을 느낄 수 있는데 이건 그냥, 그냥 묶어 놓은 나뭇가지니까 눈으로 직접 살펴봐야 해.”

 “그럼 케이든 씨는 제가 함정을 밟은 걸 본 건가요, 아니면 발동된 함정의 기척을 느꼈나요?”

 “실 끊어지는 소리가 들려 반응한 겁니다. 나뭇가지 밟는 소리도 아니고 툭, 하고 뭐 끊어지는 소리가 숲에서 날 리 없으니까요.”

손바닥으로 얼굴을 벅벅 문질러 마른세수를 한 한세아가 그레이스와 케이든에게 묻는다. 아무래도 게이머로서 자존심에 파삭- 금이 간 모양. 나는 북부에서 인터넷으로 한세아가 어떤 사람인지 실컷 구경해 와서 안다.

히어로즈 크로니클이라는 최초의 가상 현실 게임을 플레이하기 전, 한세아는 인터넷 방송인 중에서도 꽤 잘 나가는 여자였다.

생방송을 구독한 팔로워가 30만 명에 이르고, 동영상을 올리는 사이트의 구독자는 50만 명을 넘었었다. 올려둔 게임 동영상 중 인기 동영상은 수백만 뷰를 기록하며 운동이나 치팅데이 먹방 등 잡다한 동영상도 기본 10만 뷰는 훌쩍 넘는 인기 방송인.

 “근처에 오크 사냥꾼이 있는 것 같아. 함정을 찾으려면 찾을 수 있지만, 평소보다 이동속도가 확연히 느려질 거야. 기척을 감지하며 가는 게 아니라 육안으로 길을 샅샅이 살펴보며 걸어야 하니까.”

 “알겠어요 언니. 전략을 조금 바꿔야겠네.”

그런 한세아의 과거 게임 동영상들을 보면 장르를 불문하고 두 가지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하나는 게이머 겸 운동을 하는 사람 특유의 승부욕 때문인지 절대 지고는 못 산다는 승부사의 기질.

라인에서 스킬에 맞으면 반드시 꼬라박아야 하고, 길 가다 총성이 들렸으면 싸움에 끼어들어야 속이 풀리는 투견과도 같은 성질머리. 그게 시청자들에게 어여쁘고 곱상한 외모와 정반대의 매력을 느끼게 만든다.

 “롤랑. 부탁할 게 있는, 아니… 리더로서 명령할 게 있는데.”

 “음?”

 “그레이스 언니 앞에 서서, 거치적거리는 거 다 박살 내고 길 좀 뚫어봐. 잔가지만 정리하는 수준이 아니라 한 두어 명 걸어가도 될 정도로 이상한 거 있으면 그냥 부숴버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머리를 쓰지 않고 무력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는 모습이었다.

-한태식이!돌아왔구나!한태식이!돌아왔구나!한태식이!

-무친련 눈알 돌아갔쥬? 계집애처럼 소리질러서 쪽팔리쥬?

-파티에 6★이 있으면 써먹어야지 ㅋㅋ

-이샛기는 머리쓰라하면 박치기하던련인데 성질머리 어디 안갔네

-걍 노빠꾸로정면돌파임? 오크 사냥꾼 추적하는게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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