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5/175)

-동서양 대통합의 현장

-왜 가만히 있는데 때리냐고

-나도몸좋은금발근육질형아랑모험하고싶다

-롤랑이랑같은텐트ㅗㅜㅑ

-게이게이존나많네시발

마차는 말없이 북부를 떠나 대로에 진입해 다각다각 발굽을 울렸고, 날 잡은 한세아는 시청자들을 말로 후려치기 시작했다. 동료의 별이 많냐 적냐를 떠나서 마법을 잘 맞추는 건 사실이라서 마음먹고 패면 시청자들을 울릴 수도 있겠네.

타격감 좋던 샌드백이 벌떡 일어나 사람을 패기 시작한 기현상에 도축장에 끌려가는 가축처럼 울부짖는 시청자들.

간혹 이상성욕이 넘쳐나는 친구들이 더 때려달라고 헤으응거리긴 하지만 대부분 비참한 현실에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앞장서는 그레이스가 고블린 부락을 발견해 한세아의 방송용 대화를 끊을 때까지, 계속.

마차에서 내리자 익숙한 도시의 풍경이 나를 반긴다. 편도 이동에만 삼 일이 걸리는 지루한 마차 여행이라 해도 인터넷과 함께하면 별거 아니군.

상단과 함께 그레이스의 마을로 갈 땐 짐마차가 많아 느리게 이동했지만, 북부로 갈 땐 나 혼자 값비싼 마차를 타고 쉬지 않고 이동했음에도 삼 일이나 걸렸으니 꽤 멀리 다녀오긴 했지. 돈 주고 모험가를 고용하지 않았더라면 대충 3주일 정도 걸리지 않았으려나.

이동하는 데 걸린 시간이 6일이고, 돈으로 모험가를 산 시간이 4일이다. 배보다 배꼽이 커진 상황이지만 불만은 딱히 없었다. 정체를 숨긴 공녀에게 은혜를 입혀두는 일을 돈으로 때울 수 있으면 나야 좋지.

 “롤랑? 북쪽 다녀 왔다면서요, 뭐라도 사 왔어요?”

 “아쉽게도 먹을 건 없어.”

 “에이, 재미없게.”

늦은 오후 도시에 돌아와 모험가 길드로 향하니 카운터에 앉아 나를 반겨주는 엘리스. 염불보다는 잿밥에 마음이 있는 모양새지만 아쉽게도 그녀를 위한 물건은 사 오지 않았다. 이동에만 3일이 걸리는데 디저트 같은 걸 사 올 순 없잖아.

엘리스도 진지하게 원하는 건 아니었는지 딱히 아쉬워하진 않는다. 그녀는 동서남북 맛 좋은 음식을 섭력하려는 미식가가 아니라 그냥 머리 쓰느라 단 것에 환장하는 여자였으니까.

 “우리 파티원들은?”

 “어제 마석을 잔뜩 판매하고 갔다고 들었으니까, 오늘은 숙소에서 쉬고 있을걸.”

어쩐지 한세아가 방송을 켜지 않은 채 시간이 흐른다 했더니 혼자 뭐라도 하고 있나. 방송 각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 게임은 파야 할 게 은근히 많다. 동료와의 호감도 이벤트, 간단한 연금술, 도시 탐험 겸 맵핑, 장비 수리 및 손질까지.

방송 거리로 삼기에는 빈약하지만, 게이머로서는 할 수밖에 없는 콘텐츠들.

생각해보면 지난번 만월 늑대 퀘스트를 할 때 한세아가 늑대 유인 향 같은 걸 갑자기 만들어 왔었지. 간단한 연금술 같은 걸 퀘스트를 통해 유저에게 슬쩍 알려주는 모양이니 혼자서도 할 게 넘쳐나긴 하겠다.

 “나 없는 동안 무슨 일 벌어지진 않았고?”

 “평소랑 똑같죠 뭐. 탑 위에서 내려왔던 사람들 다시 올라가고, 게이트 이권 문제 때문에 마법사들이랑 말싸움하고. 아, 위에 있던 모험가 중 일부가 20층이랑 30층으로 내려가서 자리 잡은 일은 있네.”

 “20층에?”

 “10층짜리 게이트가 발견되었으니 20층짜리, 30층짜리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 마법사들이 고용한 모험가들 이끌고 내려왔다던데.”

하긴 그 정도는 게이머가 아니라도 생각할 수 있는 내용이다. 아무리 게임 속 세상이라지만 NPC들이 IQ 세 자릿수에 도달 못 하는 저능아 집단이 아니니까. 종교 경전에도 존재하지 않고 마법사들도 밝혀내지 못한 미지의 탑.

그런데 갑자기 10층을 훌쩍 건너뛰는 게이트가 생겼다면 어떤 생각을 하겠는가. 와, 편리하다! 에서 생각이 끝날까? 아니면 자신들이 발견 못 한 무언가가 아직도 남아 있다고 생각할까. 당연히 뭐라도 더 찾아보려고 눈에 불을 켜지 않겠는가.

이 세상의 마법사들은 미지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과학자에 가까운 부류니까. 조수 부려먹는 꼴을 보면 과학자 겸 대학교 교수 같은 느낌이기도 하고.

―마탑 가입했는데 이게 맞냐?

[책상 위에 쌓여 있는 연구 서류.JPG]

[끓는 시약 앞 졸고 있는 조수들.GIF]

랩실온거가튼뎅;;

┗어우 PTSD온다

┗현실에서는방구석겜돌이인내가이세계에선이공계대학원생?

 ┗방구석 겜돌이 할래 그냥 ㅋㅋㅋㅋ

┗마탑은 노예제를 폐지하라

 ┗어허 고객님의 자발적인 선택이었습니다

딱히 내 세상, 그러니까 한세아의 플레이 데이터만 그런 게 아닌지 하소연하는 글도 꽤 많다. 마법이나 연금술에 관심이 있어 탑에 오르지 않고 제자가 되는 길을 선택해버린 불쌍한 희생양들.

청소년이 범죄를 저지르면 소년원에 가듯 대학생이 큰 잘못을 저지르면 대학원에 간다던데, 히어로즈 크로니클 갤러리의 일부 유저들은 무슨 무슨 죄로 저렇게 잡혀가 버렸다.

한세아의 방송을 통해 알 수 있는 미래시는 메인 시나리오와 탑 등반뿐. 도시의 사소한 설정이나 판타지 대륙의 전체적인 정세는 알 수 없으니 몸으로 때우면서 알아가는 수밖에. 연금술 시약을 몇십 시간 고아가며 두덕리 온라인을 즐긴다던가, 마법 실험을 진행하며 밤을 꼴딱 새우며 마법사님의 수발을 든다던가.

 “하긴, 그 양반들이라면 20층의 나무를 다 밀어버려서라도 뭘 찾으려 들겠지.”

 “마법사들은 은근히 집요한 구석이 있으니까.”

 “은근히?”

 “모험가 길드 접수원으로서 마법사들에 대한 과도한 비난은 삼가야 하는 거야~”

오래간만에 엘리스와의 농담 따먹기를 끝내고 길드 밖으로 나왔다. 일행들이 알아서 쉬고 있다면 나도 적당히 쉬면서 인터넷이나 마저 봐야지. 한세아가 게임을 종료했다가 들어올 때마다 바깥의 시간이 한 번에 확 흐르니, 봐야 할 콘텐츠는 무궁무진하게 증식하고 있거든.

닭 다리를 뜯고 맥주를 마시는 동안 웹툰의 최신화가 하나 늘어나 있는 기적 같은 일. 예수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것보다 한세아가 늘려주는 사이버 콘텐츠가 내게는 더 절절하게 와 닿았다.

―한세아 탑에서 야영하는 거 보면 마음이 짠해

바닥에서 돌은 골라내면서 가지는 정리 안 하는 게 슬퍼…

길 걸어 다닐 땐 방해되는 나뭇가지 잘라내고 다니는데

야영지 정리하고 함정 따위를 설치할 생각도 못 하는 지능이 슬퍼…

인터넷에 푹 빠져 잠시 멈췄던 짠해좌로서의 활동을 진행하고 길드를 나섰다. 이러면 시간도 늦었으니 시장에 가서 안줏거리와 주전부리를 사는 게 좋겠네. 닭꼬치나 닭강정을 먹으면서 인터넷이나 봐야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누군가가 나를 불러세운다.

 “롤랑 님? 벌써 돌아오셨습니까?”

 “케이든이냐. 부탁했던 물건은 전부 구해 왔다.”

볼일이 있었는지 거리를 혼자 걷고 있던 케이든이 나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뜬다. 갑옷의 주인인 만큼 자신이 부탁한 물건의 가치를 알고 있기에 벌써 돌아온 나를 보고 놀랄 수밖에.

마부 길드에 비싼 돈 주고 대여한 최고급 마차가 아니었다면 쉬엄쉬엄 움직였을 테고, 그러면 이동 시간은 3일보다 더 늘어났을 것이다. 가는 데 5일, 재료를 모으는 데 어림잡아도 일주일, 돌아오는 데 또 5일.

케이든이 생각하기엔 적어도 삼 주일 뒤에 나를 볼 거라 계산했겠지. 솔직히 부탁받은 물건이 찾기 좀 까다로웠으니까.

 “그 많은 걸, 이렇게 빨리 모으시다니….”

 “북부 모험가들의 실력이 괜찮더라고.”

 “그 정도입니까?”

돈만 주면 물건을 확실하게 물어온다는 점에서 아주 뛰어났지. 솔직히 나도 생각보다 빠르게 일이 끝나서 당황했으니까. 위험 지역에는 내가 직접 갔으니 나머지는 내가 직접 움직인 것보다 느리게 모일 줄 알았는데… 머릿수로 밀어붙여서 전부 구해 올 줄이야.

원래대로라면 평판을 위해 생색을 내지 않겠지만 상대는 남장한 공녀님. 거기에 정보 길드의 아가씨들이 눈여겨보고 있는 사람이다.

 “금화를 쥐여주니까 이틀도 안 되어서 산맥을 싹싹 긁어 오던데.”

 “…금화?”

 “혼자서 구하기엔 많은 양이길래 모험가들을 고용했지. 물건은 숙소에 있으니 내일 전해 줄게.”

내 말에 케이든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해간다. 금화라는 단어에 꽂혀 작게 중얼거리는 걸 보니 대충 노림수가 먹혀들어 간 것 같았다. 공녀로서의 케이든은 알 수 없었지만, 용병과 모험가로서의 케이든은 알 수 있는 것.

바로 돈의 무게다.

용병과 모험가는 동전에 목숨을 건다. 실력 없는 초짜들이 목숨을 담보로 걸고 죽어 나가면서 버는 돈이 동전이거든. 남장하고 세상에 나선 귀족 집안 아가씨에겐 그 장면이 매우 충격적이지 않았을까.

용병단에 몸담고 모험가가 되어 중급 모험가가 되어도 손에 쥐는 돈은 은화. 그런데 친분이라고 부르기엔 부끄러울 정도로 얕은 관계의 남자가 자신의 부탁을 위해 몇 개의, 몇십 개의 금화를 흔쾌히 사용한 상황.

 “그, 감사합니다. 정말로.”

 “뭐 어때. 동료가 하는 부탁인데 그 정도쯤이야.”

 “동료, 군요.”

돈으로 살 수 있는 건 사 두는 게 좋다. 인간의 노동력부터 마음에 쌓아 둘 수 있는 빚까지. 원래 게임 할 때도 다들 그렇게 하지 않던가? 상점에서 파는 것 중 중요한 건 반드시 구매하고 아닌 건 패스하고. 인권도 도덕심도 현대와는 많이 다른 판타지 세상이라 가장 확실한 게 금화니까.

아무튼, 은근히 부담감을 팍팍 주는 내 말에 케이든의 표정이 묘하게 바뀐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자신의 무리한 부탁이 과도한 지출로 이어졌다고 생각하는 건가.

얘가 아직 상급 모험가의 벌이를 모르네.

 “걱정하지 마. 벌어둔 게 꽤 있으니까. 영 마음에 걸리면 상층에 가서 돈 잔뜩 번 다음 갚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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