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이것은 『인벤토리』라는 것이다.
-인벤토리만 나오면 이세계물이네 ㅋㅋㅋ
-마망클립각떴냐!마망클립각떴냐!마망클립각떴냐!
-NPC들 인벤토리만 보면 좋아 죽긴 하더라
-나도 좋아 죽어 헤으응
중간에 껴 있는 곱상한 미청년조차 남장 여자라는 걸 알고 있는 시청자들이 화면에 잡힌 어여쁜 얼굴에 열광하기 시작한다. 추잡하다 못해 우스워진 채팅창을 보며 맥주를 한 입. 입안 가득하던 치킨 기름을 말끔하게 씻어내려 준다.
뜨끈한 치킨, 차가운 맥주, 인터넷 방송. 집구석에서 일주일은 나가지 않아도 될 환상의 삼신기를 갖춘 채 한세아의 방송을 본다. 지금이 5일 차니까, 대충 10일 정도 구르게 놔두고 복귀하면 되겠네.
이동 시간까지 생각한다면 7일 차쯤 출발해야 하니 아직 내게는 이틀의 시간이 남았다. 그동안 동영상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영화라도 몇 개 찾아볼까.
‘퀘스트 클리어 보상으로 전자 화폐는 안 주나?’
앉으면 눕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라고, 인터넷 창이 열리니 유료 결제가 마렵다.
동영상 플랫폼에서 뭐 좀 보려 하면 15초씩 기어 나오는 병신 같은 킹적의 검 광고가 두 개씩 붙어 있지를 않나, 보고 싶은 영화는 시간이 지났어도 몇천 원 정도의 돈을 내야 구매할 수 있으니까.
“일단 노숙이 반복될 것 같으니 이후로 방송은 끄고 진행할게요. 그래도 다음 방송 켤 땐 롤랑 센세가 돌아와 있겠지?”
[롤랑님이 10,000원 기부!]
아 귀찮아 죽겠는데 북부에서 살까
“그러면 마법사 한나 파티 바로 북부로 떠나는 거야. 아무튼, 이후로 밥 해 먹고 불침번 서는 것 말고는 내용 없을 것 같으니까 방송 끄고 좀 쉬었다가 혼자 진행한 다음 돌아올게요.”
-그냥 그레이스눈나 아이린마망 잠방하자
-한세아는 가고 눈나만 보여줄 순 없냐
-이과쉑들머하냐고 빨리 기술개발해
-한세아필요없는한세아방송
-오뱅알이라 하면 거짓말이고 ㅃㅃ~
한세아가 카메라에 대고 인사를 하자 아주 잠시, 다시 세상이 잿빛으로 변한다. 인터넷 창에 띄워진 한세아의 방송은 새카맣게 꺼져버렸고 채팅창도 고요해진 상황. 아무래도 일시 정지를 해 놓고 쉬다 온 모양이다.
인터넷을 할 수 있냐 없냐, 고작 이 한 가지만으로 모험가 롤랑으로 사는 삶이 확 달라졌다.
아무리 게임 속 세상이라 유저들을 위해 구현된 현대식 문물이 있다지만 완벽한 건 아니었으니까. 치킨이 있고 마카롱이 있고 상∙하수도가 있으며 청결 용품이 있다지만 인터넷이 없다는 것은 물이 없는 오아시스와 다를 바 없었다.
“아니, 슬슬 돌아올 때 되지 않았나? 북부가 그렇게 먼가, 아니면 의뢰로 받은 게 엄청 귀찮은 일인가? 벌써 일주일인데”
[별잃고뇌약간고친님 10,000원 기부!]
이샛기불안해서하소연하려고방송켰네
“야! 알면 공감하란 말이야! 니들 같으면 6★이 집을 나갔는데 불안한 마음이 없겠냐고. 너는 인간의 마음이 없어?”
-6★이 온 적도 없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주세요
-한세아는 게이머의 마음을 모른다… 메모…
-씨발아 니가그러면 우리가 머가됨
[관리자에 의해 삭제된 채팅입니다]
-아무튼 ㄹㅇㅋㅋ만 치라고
한세아가 방송을 켜지 않았을 때에는 다른 방송인의 방송을 보거나 동영상 사이트에 올라온 온갖 영상들을 보았다. 내가 살던 세상과 한없이 비슷하지만 다른 세상이라는 걸 그 덕분에 확신할 수 있었고.
비슷한 영화, 비슷한 웹툰과 만화, 비슷한 게임과 비슷한 유명인들.
하지만 전부 비슷할 뿐이지 똑같은 사람은 없었다. 한 달에 한 권씩 만화를 그려내서 공장장이라 불리는 HxH의 작가와 콧구멍에 나무젓가락을 꽂지 않는 고무 인간 같은 게 있을 뿐. 좋은 쪽으로 바뀌었든 나쁜 쪽으로 바뀌었든 무언가 하나씩 바뀐 세상.
그런 걸 하나씩 찾아보고 있으니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간다. 마차를 잡고 모험가의 도시로 이동하기 시작한 지금도 아쉽다는 기분이 들 정도.
“부탁하신 마차가 준비되었어요. 벌써 떠나신다니… 아쉽네요.”
“돈을 펑펑 썼으니 벌러 가야지.”
“하긴, 많이 쓰시긴 했죠. 이 동네에서 모험가가 모험가를 그렇게 많이 고용한 건 당신이 처음이자 마지막일걸요.”
케이든에게 부탁받은 광석과 결정 따위를 챙겨 모험가 길드로 향했다.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는 건 첫날 여관을 추천해 주었던 포근한 인상의 접수원.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 안에는 아쉬움과 욕망이 철철 흘러넘친다.
호구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금화를 펑펑 뿌린 상급 모험가가 일주일도 안 되어서 훌쩍 떠나버리니 아쉬울 수밖에. 엘리스를 대하던 느낌대로 뭐 하나 부탁할 때마다 금화를 하나씩 쥐여주었더니 부르기만 하면 여관방까지 찾아올 기세다.
그렇다고 해서 여자를 부르지는 않았다. 10년 만에 치맥을 뜯으며 인터넷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주색잡기에 빠질 순 없잖아. 알고리즘에 따른 추천 동영상 보느라 수면 시간을 2시간 이하로 줄였는데.
“케이든이 롤랑 빼돌린 거 아니냐고? 친구는 상상력이 참 이상한 방향으로 풍부하네.”
[완벽한사육님 5,000원 기부!]
케이든한테 의뢰 내용 알아내면 3만 원
“의뢰 내용? 우리 공녀님 되게 무뚝뚝해서 개인적인 내용을 말해 주려나. 아무튼, 시도는 해 볼까. 나도 탑에서 노가다만 뛰니까 솔직히 궁금하긴 하거든.”
애인을 보내는 것처럼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배웅해주는 접수원을 뒤로 한 채 마차에 올라타 다시 인터넷 방송을 켰다. 지금까지는 방송 없이 진행하느라 한세아가 뭐 하는지 볼 수 없었지만, 방송을 일주일 내내 쉴 순 없으니 노가리 방송이라도 킨 모양.
야영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인지 주섬주섬 텐트를 정리하며 한세아가 입을 바삐 놀린다. 침낭 말아서 인벤토리에 집어넣는 게 재미있을 리 없으니 오디오라도 채우는 거지.
그래도 오래간만에 시작된 방송이라 그런지 시청자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아 보인다. 화면에 그레이스와 아이린만 나오면 일단 좋아하는 놈이 태반을 넘어서 그런가. 마법을 이용한 야영과 사라진 롤랑에 대한 투정이 오가고 소소한 미션이 걸린다.
“저기, 케이든 씨?”
“무슨 일이십니까?”
그레이스와 아이린이 앞, 케이든과 한세아가 뒤. 쉴드와 보호막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이 앞뒤로 갈라진 대형을 유지하며 이동하는 와중 한세아가 케이든에게 작게 말을 건다. 아무래도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미션을 진행하려는 모양.
몇 번이고 반복된 야영 중 케이든과의 마음의 거리를 꽤 좁혔는지 대화를 나누는 게 퍽 자연스럽다.
물론 자연스럽다는 건 케이든 쪽의 이야기. 남장했다는 사실 때문인지 평소에는 무뚝뚝함을 넘어 사교성이 없다시피 한 수준이었으니까. 모험과 관련된 일이 아니면 한 마디도 꺼낸 적이 없거든.
…내가 케이든에게 갑옷과 관련된 의뢰를 받기 전, 그녀와 나눈 대화 중 사적인 대화는 단 하나도 없었다. 모험 아니면 용병, 레베카와 관련된 이야기뿐이었지.
“롤랑한테 부탁했다는 의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떤 건지 알 수 있을까요?”
“예, 그 정도야 뭐.”
숲길을 걷는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선남선녀 커플처럼 보이지만 하나는 남장 여자라니, 마법이란 건 참 대단하네.
앞쪽에서는 그레이스와 아이린이 요리와 관련된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고 있는 것 같지만, 아무래도 미션 때문인지 카메라 드론이 곧바로 돌아와 케이든과 한세아를 찍기 시작한다.
“제가 물려받은 마법 갑옷이 하나 있습니다. 원래는 이 검과 짝이 되어야 할 녀석이죠. 제 실력과 비교하면 과분한 물건인데… 모종의 사유로 인해 고장이 났거든요.”
“그걸 롤랑이 고칠 수 있나요?”
“고칠 때 필요한 재료를 모아올 수 있죠. 북부 지역에서 나는 마법 결정과 원석이 필요합니다. 초급 모험가는 물론이고 중급 모험가 중에서도 베테랑이 아니면 발 디딜 엄두도 못 내는 곳에서 나오는 녀석으로.”
마법 갑옷이라는 케이든의 말에 한세아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한다. 그야 이야기를 들어보면 4★ 캐릭터가 전용 장비를 들고 나타나게 생겼으니 게이머로서 기쁠 수밖에 없지.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히어로즈 크로니클 이야기 중 대다수는 ‘장비 가격이 생각보다 비싸서 노가다를 오래 해야 한다.’라고 투덜대는 중. 그런 와중에 일반 장비도 아니고 마법 갑옷을 고칠 수 있다면 엄청난 이득이다.
-또혼자 게임 날로먹네
-이쯤되면 롤랑한테 계정 넘겨라
-여기 맛집이네 회가 싱싱하네
-누구는 누더기 천갑옷인데 마법 갑옷?
-1가구1롤랑 배급해줘 제발
움찔거리며 치솟아 오르는 한세아의 입꼬리가 얄미웠을까. 케이든의 남장에서 어색한 부분을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던 시청자들이 곧바로 폭도로 변해 난동을 피우기 시작한다.
한세아와 김석현이 20층을 향해 달려가고 있고, 게임 고수라 불릴 수 있는 고인물들이 10층을 넘어 김석현의 뒤를 뒤따르고 있다. 다르게 말하자면 대부분의 유저들은 이제 10층에 발을 디뎠거나 아직 전투에 익숙해지는 중.
한세아의 방송을 보고 모험가 길드에서 중고 갑옷을 싼값에 빌려 입었다는 거지. 누구는 초보자용, 그것도 중고 누더기 갑옷을 입고 고블린을 잡고 있는데 방송인은 길 가다 찾아온 6★ 사기캐가 4★ 캐릭터의 마법 갑옷까지 챙겨주면 배알이 꼴릴 수밖에.
“어허, 내가 얼마나 고생 중인데 날로 먹는다느니 횟감이 싱싱하다느니… 죄송, 이건 내가 생각해도 선을 좀 넘었네. 어차피 욕먹을 거 뻔뻔하게 나갈게요. 우리 집에는 황금롤랑 있다. 느이 집에는 롤랑이 없제?”
타격감 좋은 샌드백의 찰진 반격에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울부짖는 시청자들. 인터넷을 싹싹 뒤져봐도 아직 나 이외의 6★은 등장하지 않았다고 하니 저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내가 예상하기에 나 말고 6★은 두 명 더 등장할 것 같은데.
왜냐하면, 찬란하게 빛나는 6개의 별 이벤트에서 그림자로 가려진 실루엣이 세 개였거든.
평상시에 신캐가 등장하면 5★과 4★이 하나씩 등장하는 게 히로인즈 크로니클의 패치 방식. 하지만 찬란한 별 이벤트에서는 최초 태생 6★의 등장 때문인지, 없는 천장으로 게이머 등골을 빨아 먹을 작정이었는지 한 번에 세 캐릭터가 등장할 예정이었다.
세 명 전부 남자인지, 셋 중 하나인 롤랑만 남캐인데 내가 재수 없게 당첨된 것인지는 모른다. 그땐 진짜로 눈이 뒤집혀서 정보를 찾아볼 생각도 안 하고 분노의 5,700자를 담은 매크로 프로그램에 진심이 되어버려서.
솔직히, 남캐 뽑아서 꼴 받는데 다른 놈이 여캐 뽑았다고 자랑하는 글을 보고 싶지 않기도 했고.
“우와…. 채팅창 렉 걸리다 터진 건 처음이네. 살면서 먹을 수 있는 욕 여기서 다 먹게 생겼다. 그것도 글로벌하게 욕을 먹을 것 같은데, 이거 채팅창 얼리고 외국어 긁어보면 막 패드립이고 이런 거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