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3/175)

 “어떤 소재인지 알 수 있을까요?”

북부의 찬바람과 어울리지 않는 갈색 머리의 미인이 포근하게 미소짓는다. 접수원을 미녀로 뽑는 건 북부도 마찬가지인가. 그렇게 미소짓는 여인에게 품 안에서 케이든에게 받은 쪽지를 꺼내 건넨다.

만년설 덮인 설산에서만 얻을 수 있는 광석이라던가, 서리 거인을 잡아야지 나오는 결정이라던가 귀찮은 게 잔뜩 적힌 쪽지. 케이든이 부끄러워하며 의뢰가 아닌 부탁을 할 레벨의 물건이 잔뜩 적혀 있는 쪽지를 받자 접수원의 얼굴이 환하게 빛난다.

산맥 초입에서 깔짝이다 떠나는 게 아니라 본격적으로 북부의 산맥을 헤집고 다니게 생겼으니까. 쪽지에 쓰여 있는 소재와 얽힌 의뢰만 가져와도 금화가 주머니째 굴러다니게 생겼다. 수수료 장사를 해 먹는 길드의 입장으로선 호박이 덩굴째 굴러온 상황.

 “의뢰를 정리해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숙박하시고 계신 여관을 알 수 있을까요?”

 “아직 숙소를 잡진 않았는데. 추천하는 곳이 있을까?”

 “그렇다면 골짜기의 염소들 여관을 추천해 드릴게요. 음식 솜씨는 별로지만 방은 깔끔하게 치워 두는 곳이니 상급 모험가라도 불편하지 않게 머무를 수 있을 겁니다. 길드에서 나가신 뒤 왼쪽으로 걷다 보면 커다란 염소 뿔 간판이 걸려 있는 건물이죠.”

방긋 미소짓는 접수원에게 쪽지를 돌려받고 길드 밖으로 나섰다. 혼자서 처음부터 끝까지 발로 뛸 생각은 없으니 의뢰를 받는 김에 적당히 부려 먹을 중급 모험가들을 고용해야겠지. 탐색꾼부터 짐꾼까지 고용할 생각을 하니 문득 한세아의 인벤토리가 떠오른다.

중복 보상이 되어 버려질 방송 채팅창과 방송국 게시판 접근권 말고 나도 인벤토리 하나 주면 안 되나.

이리저리 싸돌아다니다 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부럽기 그지없는 게 인벤토리 아닌가. 언젠가 보상에서 인벤토리를 던져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 회로를 돌리며 커다란 염소 뿔 간판을 찾아 걷는다.

 “여우를 좀 잡아 왔는데.”

 “가죽이 다 상했네. 맹수 잡는 화살로 쏜 건 아니지?”

 “이봐, 아무리 그래도 내가 그따위 실수를 하겠어.”

사람 사는 곳이 다 비슷하다고, 모험가 길드가 자리 잡은 곳은 탑이 있는 도시와 별다를 건 없었다.

짐수레를 끌고 온 상인이 통 안에 담긴 말린 과일 따위를 들어 올리며 관심을 끌고, 사냥꾼이 산맥에서 잡아 온 짐승 가죽을 가지고 흥정을 한다. 훈제 햄과 소시지, 큼지막한 사슴 뒷다리 따위가 걸려 있는 정육점과 고소한 향기가 폴폴 풍기는 커다란 화덕까지.

시장 풍경을 지나 염소 뿔을 솜씨 좋게 조각해 둔 여관을 찾아 들어갔다. 깨끗하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아주 말끔하게 치워진 홀과… 텅 비어 있는 테이블.

 “어서 오세요! 식사만 하실 건가요? 아니면 숙박?”

 “…숙박만, 가장 좋은 방으로.”

냉큼 뛰어나오는 종업원 꼬맹이가 음식 자랑을 하지 않는다니. 밥이 맛있다고 거짓말을 하다 뺨이라도 한 대 맞은 경험이 있는 걸까. 길드에서 들은 대로 음식 솜씨가 별로인가보다.

북부에서의 모험은 생각보다 귀찮은 면이 있다.

험한 산맥인 것도 귀찮은데 기온이 낮고 눈이 내리니 준비해야 할 게 한둘이 아니거든. 나 혼자서라면 맨몸뚱이로 돌아다녀도 상관없지만 소재를 찾기 위해 고용한 용병들은 나처럼 초인이 아니다.

찾아내는 데 기술이 필요하고 채취하는 데 기술이 필요하며 보관하여 운송하는 일에도 또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니 상급 모험가의 장비가 왜 비싼지 이해가 갈 지경.

 “헤헤, 찾은 것 같습니다.”

 “벌써?”

 “이 산맥은 제 앞마당 같은 곳이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그러니 추가금은.”

 “약속한 대로 지급될 거다.”

반대로 말하자면 모든 게 돈으로 해결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필요한 재료는 비싸고 희귀한 재료지 구할 수 없는 전설 속의 재료가 아니니까. 원래 계획은 적당히 몸으로 때우며 의뢰를 해결하는 것이었는데―

 “밤에 텐트 치고 자기 좋은 장소면, 좀 평평한 공터를 찾아야 하나? 근데 그게 그레이스 언니 탐색으로 찾을 수 있어? 몬스터나 탑의 통로도 아니고 공터를 무슨 방법으로 찾아. 그냥 나올 때까지 돌아다녀야 하나?”

[노숙12년님의 5,000원 기부!]

어차피 밤도 안 오는데 햇빛 드는데서 자 안그러면 골병들어

 “노숙 12년 님, 감사… 생각해보니까 탑 내부는 밤이 안 오는데 나한테 랜턴을 판 상인은 뭐 하는 새끼지? 모닥불이야 밥 먹으려면 필수긴 한데.”

-한세아는 또 속았습니다

-NPC한테 눈탱이를 당햌ㅋㅋㅋ

-도시에서는 눈뜨고 코 베인다더니

-그걸 이제야 깨닫는것도 대단하긴해

-랜턴을왜사나했더니 몰라서샀어?

한세아의 방송을 보며 웹서핑을 하다 보니 그게 너무 재밌단 말이지.

눈 덮인 산맥을 뛰어다니며 주먹만 한 돌멩이를 찾아 헤매는 것과, 값비싼 숙소의 푹신한 의자에 앉아 술 한 잔 마시며 인터넷으로 동영상을 보는 것. 감히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저울의 추가 기울어져 있지 않나.

그래서 웃돈 주고 사람을 잔뜩 고용했다. 어차피 한세아와 함께 탑 위로 올라가면 여기서 펑펑 쓴 골드 정도는 가볍게 회수가 될 테니까. 가난한 것까지는 아니지만 경제 규모에서 확연히 차이가 나는 북부의 도시.

탑에서의 의뢰를 기준으로 가격을 잡고 거기에 프리미엄을 조금 얹어주니 일이 없어 손가락 쪽쪽 빨던 중급 모험가들이 발바닥을 핥을 기세로 달려든다.

 “이 정도면 할당치는 채운 것 같습니다. 돌아가시겠습니까?”

 “그래. 다른 녀석들도 슬슬 모아 왔을 테니까.”

중급 모험가가 들어가기엔 위험한 산맥의 중턱까지는 내가 들어왔지만, 조금 만만한 곳에는 돈으로 산 모험가들이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니고 있다. 돈 많은 상급 모험가가 시간을 돈으로 사기 위해 금화를 뿌리는 상황.

불법적인 일도 아니고 힘들고 위험한 일도 아니다. 평소에 하던 의뢰를 똑같이 진행해도 벌이가 두 배로 늘어나는 마법과도 같은 상황. 짤랑이는 골드 소리를 들은 모험가들은 그 누구도 막지 못한다.

돈으로 사람을 샀고, 돈으로 시간을 샀다.

땀 흘려 번 금화로 구매한 귀중한 북부의 시간. 그 값비싼 시간을 나는 만끽하는 중이었다. 안락한 숙소에 드러누워 북부의 특산물인 얼음 맥주와 닭튀김을 먹으면서.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맥주와 염지가 되어 매콤 짭조름한 후라이드 치킨.

중세의 시장에서 회오리 감자를 팔고 카페에서는 아메리카노와 뚱카롱을 파는 데 여관에서 K-치킨 정도는 튀겨서 팔 수 있는 게 게임 속 세상 아니겠는가.

 “김치 담그면 바로 들키려나…?”

돈을 펑펑 써서 필요한 물건을 후다닥 구해버린 다음 날. 곧바로 돌아가기는 아쉬워서 숙소에 처박혀 근처에 있는 맛집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방이 참 쾌적하고 깔끔하지만, 여관 주인의 음식 솜씨는 끔찍했거든.

후라이드 치킨, 양 갈빗대 구이, 쪽갈비, 양념 족발―

이게 판타지 세상의 눈 덮인 북부 대륙에서 먹을 음식이 맞나 싶은 녀석들. 물론 돈을 낸 만큼 맛도 잘 구현이 되어 있어 혀는 행복하지만 시켜 먹으면서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털가죽 옷을 입은 험상궂은 사냥꾼한테 금화를 던지며 족발을 삶아달라고 부탁하다니.

 “오늘이 며칠째지? 대충 5일 되지 않았나? 의뢰는 시간이 오래 걸릴 테니까 그래도 일주일이면 돌아오겠지? 19층에서 사냥하면서 합 맞추고 마법 익히는 것도 좋긴 한데….”

-혼자 장르 후피집으로 바뀌니까 존나 웃기네 ㅋㅋㅋ

-그래서롤랑어디감?그래서롤랑어디감?그래서롤랑어디감?

-근데 경치는 진짜 존나 이쁘다 한국 캠핑장은 비교도 안되네

-별 잃고 외양간도 못고쳤쥬? 나가리쥬? 좆됐쥬?

-이게 게임방송이야 노숙티비쀼쓩뺘쓩이야

[왕년에6성이랑파티였님의 10,000원 기부!]

어이 한씨, 개소리 말고 고블린이나 잡아

 “재수 없는 소리 흐즈믈르그….”

방송을 보니 한세아는 조금씩 초조해지는 모양. 내가 다시는 안 돌아온다는 불안감은 아니고, 방송인 겸 게이머로서 정체되어버린 진행 때문에 느끼는 불안감 같다.

탑에서의 노숙이 벌써 두 번째. 슬슬 텐트를 치는 법이나 불침번 따위에 익숙해지고는 있지만 같은 걸 반복하게 되면 방송인으로서는 애매하겠지.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없어서 그런지 전투가 조금 더 박진감 넘치게 되었다는 점이려나.

 “앞에서 투구사슴이 접근 중이야. 아무래도 우리 냄새를 맡고 흥분한 것 같은데.”

 “그럼, 제가 막아 세울게요.”

그레이스의 속삭임에 앞으로 나서는 아이린. 시청자들의 걱정 반 애정 반 뒤섞인 채팅 세례 속에서 새하얀 보호막이 투구사슴의 돌진을 막아 세운다. 두꺼운 나뭇가지를 수수깡처럼 부러트리는 맹렬한 돌진이라 해도 5★ 사제의 보호막에는 흠집조차 낼 수 없으니까.

퉁퉁, 대가리를 흔들어 보호막을 두들기던 녀석의 흉포한 시선이 옆에 있는 케이든에게 향한다. 예비 성녀의 보호막을 벽, 또는 커다란 바위 비슷한 것으로 인식한 녀석이 새로운 희생양을 찾는 것이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날카로운 뿔이 머리를 흔들 때마다 사람을 찢어버리기 위해 사납게 공기를 가른다.

 “흠, 이까짓 거!”

물론 4★ 검의 공녀가 고작해야 사슴뿔 따위에게 검술로 밀릴 리 없지. 부드럽게 움직이는 검이 사슴의 뿔을 옆으로 밀어내자 그 무게 때문에 단단한 대가리도 같이 돌아간다. 자연스럽게 일행들에게 노출되는 사슴의 길쭉한 목.

그것으로 호기로웠던 투구사슴의 짧은 생은 끝을 맞이한다. 턱에는 매직 미사일이 어퍼컷처럼 박히고, 앞다리의 안쪽에 화살이 박히며 동시에 목을 베고 지나가는 한손검에 의해서. 아주 잠깐의 교전 끝에 자리에 남게 된 건 투구사슴이었던 마석 한 조각.

 “지원 감사합니다. 이 정도면 텐트를 설치하기 좋아 보이는데 여기에 자리를 잡을까요?”

 “그게 좋을 것 같아요.”

마석을 인벤토리에 쏙 집어넣은 한세아가 케이든의 말을 듣고 인벤토리에서 텐트를 꺼낸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하지만 허공에서 사람보다 큰 텐트가 쑥쑥 튀어나오는 건 언제 봐도 신기하단 말이지.

카메라에 비친 일행들도 익숙해지진 않았는지 입을 작게 헤- 하고 벌린다. 텐트와 침낭을 받아 설치하기 위해 한세아 주변에 모여있는 게, 마치 먹이를 기다리는 새끼 새 같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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