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2/175)

 “저기, 그, 이런 건….”

 “피부 고운 거 봐. 이대로 가면 밤거리에서 눈물 흘릴 아가씨가 한둘이 아니겠네요.”

이곳은 현대의 도덕 관념이 자리하는 곳이 아니다. 10살 이하의 어린애도 밥값을 위해 농사를 돕고 돈 없는 여자는 골목길에 기어들어 가 다리를 벌리는 게 당연한 중세 판타지 랜드. 고작해야 고급 술집에서 접대부 불렀다고 화를 낼 순 없겠지.

왜냐하면, 내 앞에 있는 케이든은 몰락 귀족 출신의 도련님이자 밑바닥 용병을 경험 한 ‘남자’니까.

 “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그런지 술맛이 좋네.”

케이든의 옆에 착 달라붙어 부담스러울 정도로 쫑알대는 두 여자와 달리, 내 곁에 있는 두 여자는 말없이 술을 홀짝이는 내 수발을 든다. 부드럽게 팔을 주무르고 안주가 될 작은 과일의 꼭지를 따는 그녀들.

명백하게 내가 누군지 아는 모양새다.

 “…아저씨가 신경 좀 써주라 했어?”

 “후후. 저희 입에서 나오는 건 웃음과 교성밖에 없어요.”

 “대답 고마워.”

말이 없어야 할 아가씨가 처음으로 내게 대꾸한다. 담긴 내용은 없지만 없다는 것 자체가 의미를 담고 있는 거지.

안 그래도 얼마 전, 존 스미스 그 양반이 모험가 길드에 대놓고 모습을 드러냈었다. 이름부터가 대놓고 가명이라고 주장하는 그 수상한 양반. 채팅창에서 뭐라고 했더라? 5★ ‘소리 없는 속삭임’ 존 스미스?

3★ 그레이스와 6★ 롤랑이 엮여 있었다.

4★ 케이든과 5★ 존 스미스도 엮여 있다.

문제가 있다면 사랑에 빠진 시골 소녀와 몰락 귀족을 자처하는 공녀님은 스케일이 다르다는 점이지. 언제가 될진 몰라도 케이든의 캐릭터 스토리는 좀 거창하게 진행될 것 같네.

 “네?! 떠난다니!”

 “그렇게 말하니까 날 보내버리는 것 같잖아. 개인 의뢰 때문에 잠깐 혼자 다녀올 곳이 있어.”

아가씨들 치맛자락 속에서 필사적으로 몸 뒤트는 케이든을 감상한 다음 날. 쇠뿔도 단김에 뽑는다고 이야기를 꺼내자 한세아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진다. 아무래도 나를 잡은 고기 취급하다가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려나.

 “별 건 아니고, 좀 멀리 가서 구해 올 물건이 있어. 우리 파티 수준이면 20층도 무리 없을 테지만 안전하게 19층까지만 오가면서 야영에 익숙해져 봐. 숙제라고 이야기했었지? 탑 안에서 밤을 새우는 것도 연습은 해 봐야지.”

 “저기, 그, 롤랑? 돌아올 거지?”

계속해서 엉뚱한 대답을 하는 한세아의 말에 씩 웃어주었다.

-빨리 구두라도 핥으라고

-돔황챠대공황이댜돔황챠대공황이댜돔황챠대공황이댜

-롤랑코인 상장폐지합니다~ 10★떡락했어요~

-안색 시퍼래지는거 존나웃기넼ㅋㅋㅋㅋㅋㅋㅋ

-제발눈나도같이떠나 제발눈나도같이떠나

아, 이거 재밌네.

내가 파티를 떠나기로 한 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었다.

장난을 치고 싶다는 짓궂은 마음이 가장 크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그 이유 하나만으로 움직이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가장 먼저 떠오른 이유는 한세아의 방송. 인터넷에서 본 다른 방송인들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몸으로 때우는 방송이 대다수였다. 반대로 한세아는 단 한 번의 게임 오버도 없이 승승장구하며 탑을 오르고 있고.

치트키를 쓰고 죽지 않는 무적의 군세로 100% 승리하는 게임에 재미라는 게 있을까. 한반도 유구의 민속놀이에서도 쇼미더머니와 파워오버웰밍을 쓰면 10분 안에 질리기 마련.

스스로 해도 재미가 없는데 민속놀이 방송인이 치트키 쓰고 A.I. 상대하고 있어봐라, 누가 그런 걸 봐.

 “괜찮아, 롤랑 센세가 잠시 자리를 비워도 우리 파티는 5★ 보호막도 있고 4★도 두 명이야. 보호막으로 막고 케이든이 정리하면 19층은 문제가 될 것이 없어. 그걸 아니까 롤랑 센세가 19층에서 야영하라고 한 거고.”

-응코인떡락했어응코인떡락했어

-빼앗긴 가난 다음에는 빼앗긴 별이냐?

-누가보면 롤랑 뒤진줄 알겠다 정서불안급임

-아이린 말고 롤랑 호감작부터 하라고

-5★도 튀는데 6★이 안튈것같음?

두 번째는 일종의 당위성 부여다. 어젯밤 웹 서핑을 하다 보니 하소연하는 글이 있었거든. 5★을 만났는데 매우 까탈스러워서 미연시가 아니라 직장 생활하듯 비위를 맞춰주는데 자꾸 이탈하려 한다는 글.

심심하다는 이유만으로 접근한 6★ 씹고인물. 시청자들이 생각하는 롤랑은 재미를 위해 떠돌아다니는 대머리 빤쓰맨 캐릭터다. 한세아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달라붙어 있으면 이상하게 느껴지겠지.

 ‘인터넷이 되니까 이게 되네.’

인터넷 창을 통해 한세아의 방송을 본다. 인터넷을 통해 한세아의 방송을 볼 수 있으니 보상으로 받은 채팅창 기능이 의미가 없어졌네. 사진 기능 빼놓은 것처럼 하는 짓이 무슨 악덕 게임사랑 똑 닮았다.

DLC 팔이 다음에는 상위호환 중복 판매냐고 시발놈들아.

문득 전생의 히로인즈 크로니클이 떠올라 머리에 열이 훅 올라오네. 아무튼, 그 외에도 케이든 캐릭터 스토리 진행을 위해서, 어느 가문 공녀인지에 대한 호기심 등 다양한 이유가 있다. 그중 가장 큰 이유는 놀려먹고 싶어서라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롤랑의우람한철빠따님의 10,000원 기부!]

롤랑한테 반말 찍찍 내뱉을 때부터 알아봤다

 “아니 그건, 그건 롤랑 센세가 먼저 말한 거지! 아이린 언니랑 케이든도 존댓말 쓴다고? 그러면 그레이스 언니는 뭔데!”

-지가 두명 붙여놓고선 뭔데 ㅇㅈㄹ ㅋㅋㅋ

-단둘이서 술마시는관계지 뭐긴

-한세아 올려치기 ㅈ되네 그레이스랑 비비려듬?

-당신에게는양심도읎습니까?

-뭐긴 성격 좋고 몸매 좋은 눈나지

채팅창과는 다르게 도네이션과 미션 현황까지 알 수 있는 인터넷 창 덕에 기나긴 마차 여행이 지루하지가 않다. 도네이션을 받고 펄쩍펄쩍 뛰는 모습을 보니 왜 시청자들이 괴롭히는지 알 것 같단 말이지.

나의 탈주 선언에 손맛 좋은 샌드백이 된 한세아가 종알종알 떠들며 시장을 돈다. 숙제로 내준 야영 미션을 해결하기 위해 잠시 케이든이 일일 교사가 된 모양새. 그래도 시골 처녀 그레이스보단 용병단 출신 케이든이 야영은 더 잘 알기 때문이겠지.

시청자들에게 열심히 두들겨 맞으며 도네이션으로 훈수를 듣는다. 온갖 기행을 벌이는 게이머들이 많다 보니 탑을 오르진 않았지만 야영을 겪어본 사람이 꽤 되는 모양. 물론 아는 척하는 가짜일 수도 있고.

 “케이든 씨, 이 정도면 될까요?”

 “아, 네. 하루 이상 보내지 않을 테니 그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한세아의 방송용 카메라 드론이 비추는 세상은 이런 느낌이구나. 머리보다 아주 살짝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듯 촬영하는 시점. 화면 속에서 케이든의 지시에 따라 다들 야영을 준비하고 있었다.

몸 뉠 침낭과 바람 정도는 막아 줄 텐트, 밧줄과 잡다한 도구들과 건량. 다행인 점은 한세아의 인벤토리 덕에 부피가 커다란 텐트 따위를 무리 없이 챙길 수 있다는 점이겠지. 하마터면 행군 나가는 군인처럼 등짐을 메고 다닐 뻔했다.

 “텐트, 침낭, 밧줄, 나이프, 랜턴, 부싯돌…은 필요 없고. 또 뭐 있지 얘들아?”

-라이트 마법 배워놓고 랜턴은 왜?

-시청자가 아주 지 메모장이여

-벌레쫒는약 안만들어가면 지옥이다

-부싯돌 필요 없다면서 랜턴사는능지

-탑의 숲에도 벌레 많음? 못본거같은디

시청자에게 온갖 구박을 들으면서도 꿋꿋하게 제 할 일은 하는 그녀. 아쉬운 마음이 가득하지만 방송을 끌 시간이 되었다.

나도 일은 해야지.

몇 시간을 죽치고 앉아 인터넷 웹 서핑을 해도 엉덩이가 불편하지 않은 고급 마차. 마법이 잔뜩 발린 고급 마차가 다각다각 달려서 도착한 곳은 왕국의 북쪽이었다.

산맥이 험하고 몬스터가 잔뜩 있으며 북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만년설까지 나오는 곳. 히로인즈 크로니클로 따지자면 요일 던전에서 수속성 마력석을 캐는 필드 같은 느낌. 물론 인스턴트 던전의 배경까지 외우는 미친놈은 아니라서 정확히는 모른다.

대충 나오는 몬스터와 지형이 비슷하구나- 하는 정도.

“모험가 패, 확인되었습니다.”

그렇게 설렁설렁 발걸음을 옮겨 도착한 곳은 북부의 모험가 길드. 도시에 있는 모험가 길드가 탑에서 나온 마석과 채집물을 판매하는 길드라면, 북부의 모험가 길드는 북부의 오지를 탐험하며 나온 물건으로 먹고사는 길드다.

좀 더 야성적이고, 좀 많이 가난하지. 몬스터가 무한 리젠되어 마석으로 변하는 탑과 달리 북부의 산맥에 있는 몬스터들은 생태계 일부니 어쩔 수 없다.

 “상급 모험가 롤랑 님. 원하시는 의뢰라도 있으신가요?”

그런 가난한 동네에서 보기 힘든 상급 모험가가 떡하니 등장하자 사람들의 시선이 몰린다. 털북숭이 아저씨들이 보내오는 선망 어린 시선은 물론이요 간간이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한 놈들의 질투 듬뿍 담긴 시선까지.

모험가의 도시에서 동떨어져 있는 북부인 만큼 롤랑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모험가 길드인 만큼 상급 모험가에 대해서는 잘 알겠지. 게임 캐릭터의 몸뚱이를 가지고 개처럼 굴러야지 손에 쥘 수 있는 게 상급 모험가의 패니까.

 “찾으려는 소재가 있어서 북부에 왔거든. 겸사겸사 처리할 수 있는 일이면 좋겠는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