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1/175)

의뢰인이 요구한 마석을 따로 처분하고, 남은 채집물과 마석을 길드 카운터에서 처분하자 손에 쥐어지는 은화 주머니. 그 묵직한 감촉에 신기하다는 듯 케이든이 중얼거린다.

 “돈은 잘 모아둬. 상층으로 올라가게 되면 장비를 또 바꿔야 하는데, 거기서부터는 장비 가격이 어지간한 장원 가격이니까.”

 “장원이라뇨, 그 정도입니까?!”

내 말에 화들짝 놀라는 그녀. 공녀라는 칭호에 걸맞게 장원이 어느 정도 가격인지 아나 보네.

나는 원래 세상의 장원이 정확하게 어떤 구조인지는 모르지만, 이쪽 세상의 장원은 대충 알고 있다. 마도구를 잔뜩 갖춘 나만의 저택을 마련하기 위해 이것저것 알아보다 보니 지식이 대충 쌓였거든.

이 판타지 세상에서 장원이라는 건 돈 주고 살 수 있는 영지를 뜻한다. 농사를 지을 땅과 농사를 지을 농노들, 그리고 땅 주인이 머무를 저택과 영지를 돌볼 신전을 전부 합쳐서 거래하는 거지.

 “장비 하나가 장원 하나라니….”

 “호화로운 저택이 딸린 황금 밀밭 이야기가 아니야. 적당히 포도 따위를 키우는 작은 장원 이야기지.”

 “그래도 비싼 건 마찬가지 아닙니까.”

농사를 짓는 땅과 호화로운 저택과 농노들을 다 합쳐서 마법 걸린 갑옷 하나. 중급에서 상급으로 넘어가는 순간 장비 가격이 무슨 만화 캐릭터의 파워 인플레이션처럼 미쳐 날뛴다.

마법의 광석을 실로 짜내어 미스릴 천갑옷을 만든다던가, 가끔 등장하는 용의 가죽을 최상급 연금술사가 다루는 등 소재부터 귀족의 사치품에 버금가는 가격이니 당연할 수밖에. 그런 장비를 투구, 흉갑, 각반, 부츠에 무기까지….

 “롤랑 님의 그 갑옷과 무구도 그 정도입니까?”

 “그보다 더하지.”

사실, 이 갑옷은 게임 캐릭터가 된 내가 시작부터 가지고 있던 기본 스킨이다. 지급한 돈은 없지만 값어치로만 따지면 더 비싸지 않을까. 특수 능력 따위는 없지만 지금까지 흠집도 나지 않은 내구도를 자랑하니까.

거인과 와이번의 공격에도 흠 하나 없는 장비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으니 케이든이 슬쩍 내게 다가온다.

 “롤랑 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한세아가 아니라, 나한테?

무언가 심각한 이야기라도 꺼내려는 듯 보이는 케이든.

남장했다는 사실을 오픈하는 걸까, 아니면 검의 공녀라는 타이틀이 왜 있는지 설명하려는 걸까. 기대를 한 채 뚜벅뚜벅 거리를 걸어 조용한 공간으로 이동한다. 여관 따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값비싼 선술집으로.

방음 마도구가 준비된 밀실에서 비밀 유지비라는 이름으로 안줏값이 금화 한 개로 시작하는 양심 없는 가게. 그래도 외견이 화려하고 비싼 만큼 술과 안주가 맛이 있어서 가끔 방문하는 곳.

 “그, 여긴….”

 “길거리에서 할 부탁은 아닌 것 같던데. 걱정하지 말고 들어와.”

입구는 덩치 큰 가드 두 명이 문지기처럼 지키고 있고 고풍스러운 나무문을 열고 들어서면 양복을 곱게 차려입은 종업원들이 귀족 집안의 시종처럼 정중히 고개를 숙인다. 입구만 봐도 비싸 보이는 가게의 모습에 잠시 멈칫거리는 케이든.

검의 공녀라면서 이런 사치스러운 곳은 익숙하지 않은 건가?

가드를 지나쳐 안으로 자연스럽게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자 망설이면서도 따라 들어오는 그녀.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밀실 안으로 쏙 들어갈 때까지 입을 열지 않는 모습은 명백히 생각을 정리하는 모양새. 방 입구에서 기다리는 종업원에게 자주 먹던 요리와 술을 시키고 가만히 앉아 기다려준다.

 “…먼저, 이렇게 흔쾌히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레베카가 소개해 준 사람인데 당연한 거지. 부탁할 게 뭐야?”

뻣뻣하게 굳어서는 허리를 딱 세우고 양손을 주먹을 쥔 채 무릎 위에 올려둔 자세. 아무리 봐도 생활관에 방금 들어온 신병처럼 보이는 모습에 대체 무슨 부탁을 하려고 저리 뜸을 들이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말 꺼내기가 어지간히 어려운지 우물쭈물하는 사이 요리와 술이 세팅될 정도. 하기야 친분을 쌓지도 않고 사무적인 관계로 지냈는데 냅다 부탁하기엔 마음이 쓰이겠지.

 “의뢰를, 하나… 맡기고 싶습니다.”

 “의뢰? 나한테?”

기나긴 고민 끝에 케이든의 입이 열린다. 남장도 공녀도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시작하는 그녀.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녀가 왜 망설였는지 알 것 같았다. 나와 케이든의 관계는 일종의 도제 관계와 비슷하거든.

한세아의 파티는 만월 늑대를 잡으며 잠재력을 증명한 루키들이다. 거기에 레베카가 롤랑이라는 인맥을 통해 증명된 게 하나 없는 케이든을 밀어 넣었다. 달리 말하자면 낙하산으로 들어와 모험을 배우는 처지에서, 제 스승에게 의뢰를 보낸다니?

대장장이의 제자가 스승에게 ‘검 한 자루만 만들어 주십쇼, 돈은 드립니다’ 이딴 말을 했다가는 대번에 골통이 깨질 것이다. 물론 친분에 따라 상관없을지도 모르지만….

 ‘얘랑 나랑 친하지를 않아서….’

남장을 유지하느라 나를 피해 다니는 게 케이든의 평소 모습이다. 남자끼리 질펀하게 술을 마시거나 하면서 친분을 다진 적이 없다는 거지. 레베카가 소개해 준 평범한 용병이었다면 그냥 값비싼 창녀 하나 안겨주고 바로 친해질 수 있는데 하필이면 남장여자 공녀님이다.

 “저는 몰락 귀족 출신으로 가지고 나온 무구들이 있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그 무구에 걸린 마법이 망가졌다는 거죠.”

 “소재를 채집해달라? 그런 의뢰를 상급 모험가에게 바로 꽂을 정도면 꽤 비싼 장비인가 보네.”

 “지금의 저에겐, 중급 모험가 케이든에겐 과분한 장비죠.”

목을 축이듯 술을 홀짝 마시는 케이든. 역시 공녀답게 우아하게 술잔을 든 그녀가 부끄러움을 토해내듯 말을 이어나간다. 무뚝뚝한 만큼 위계질서에도 엄격하던데, 그 위계질서를 본인이 어기게 생겼으니까 좀 창피한가 보네.

그게 돈 이야기라면 더욱 창피할 수밖에 없다.

 “상급 모험가의 의뢰비는 비싸. 이리저리 알아봤으면 너도 알 텐데?”

 “예, 알고 있습니다.”

의뢰를 맡기고 싶다는 게 아니라 부탁을 하고 싶다는 말은 돈을 곧바로 지급할 수 없다는 이야기와 마찬가지다. 몰락 귀족 출신이든 정체를 숨긴 대귀족의 딸이든 돈 때문에 아쉬운 소리를 하면 창피하겠지.

가문에서 챙겨 나온 무구는 모종의 사유로 당장 수리해야 하는데, 수리하려면 값비싼 재료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재료는 고작 용병단 신입, 중급 모험가 따위의 벌이로는 엄두도 못 낼 고가의 재료들.

 “그렇기에 이제야 부탁드리는 겁니다. 모험가로서의 케이든의 값어치를 담보로 걸고 의뢰를 부탁드리고 싶어서.”

 “담보가 케이든, 너라는 거네.”

끄덕거리는 곱상한 얼굴을 보니 잠시 음란마귀가 머리를 차지한다. 약점을 잡힌 남장 여자 공녀님이라니, 내가 노예를 사들이는 악덕 귀족이 된 기분인데.

머리를 살짝 흔들어 취기와 함께 올라온 음란마귀를 털어낸다.

케이든이 하는 말은 성적인 노리개가 되겠다는 뜻이 아니라 모험가로서 한나 파티에 몸을 담겠다는 뜻이니까. 배움을 받은 뒤 레베카의 용병단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내가 관리하는 파티에 뼈를 묻겠다는 의미의 담보.

귀족 출신 아가씨라서 그런지 사고방식이 귀족적이다. 이건 용병과 모험가의 마인드가 아니라 주인을 모시는 기사의 마인드다. 용병도 모험가도 대우에 따라 이적하고 고용되는 인력 시장이니까.

 “예. 제가 담보입니다. 제 검, 쓸만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실력에는 당당한, 하지만 아쉬운 소리를 하기에 부끄러운 모순적인 태도. 자세는 꼿꼿하고 눈은 번뜩이지만, 호흡은 떨리고 피부는 조금 달아오른다. 아무리 봐도 선임 장난에 시달리는 곱상한 이등병처럼 보이지만… 알갱이가 아가씨라면 이야기가 좀 다르지.

음란마귀가 도망친 머리에 장난기가 훅 솟아오른다.

 “쓸만하지. 고작 소재 몇 개로 너 같은 녀석을 얻으면 좋은 거래고.”

 “…감사합니다.”

 “뭘, 감사할 것까지야. 말하기 힘들었을 텐데 오늘은 푹 쉬자고.”

푹 쉬자는 내 말에 자리에서 슬쩍 일어나려는 케이든. 그런 그녀에게 어디 가냐는 듯 손을 저어 만류한 뒤 테이블에 배치된 벨을 울린다. 남장 여자에게 꼭 해보고 싶은 장난질을 위해서.

 “아, 그럼.”

 “음? 어딜 가려고. 용병답게, 모험가답게 푹 쉬어야지.”

 “네?”

엉거주춤하게 자리에서 일어서다 만 케이든을 맞이하는 건 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오는 여자들. 저잣거리의 창녀들과 달리 사교회의 아가씨처럼 얇은 드레스를 차려입은 채 방 안으로 슬그머니 들어온다.

엉거주춤 서 있는 케이든의 팔을 부드럽게 감아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히는 두 명, 내 쪽으로 와 양옆에 앉는 두 명. 엉겁결에 미녀 두 명 사이에 끼게 된 케이든의 표정이 볼 만 하다.

이거지!

인터넷도 뭣도 없는 세상을 10년간 살면서 늘어난 건 이런 유흥거리에 대한 갈망뿐이다. 그러니까 레베카 같은 거랑 친해질 수 있었기도 하고.

 “저…, 롤랑 님?”

 “저 곱상한 도련님이 칼 한 자루 차고 중급 모험가까지 올라간 유망주야. 개인적인 인맥으로 상급 모험가와 대규모 용병단주와 연이 닿아 있는 알짜배기 도련님이지.”

 “어머? 피부가 고와서 귀족 도련님이나 마탑의 마법사님인 줄 알았는데.”

케이든의 남장은 완벽하기 그지없다. 문제는 그 완벽함에 미모도 들어간다는 거지. 가챠 캐릭터로서의 아름다움이 남장을 통해서 가려지지 않은 상태. 누가 봐도 선 부드러운 미청년이니 아가씨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라붙는다.

화류계 종사자 겸 정보 길드와 연이 닿아 있는 아가씨들답게 눈치 하나는 빠르다. 접대 반, 놀림 반이라는 걸 곧바로 알아차린 모양새. 돈 많은 귀족 옆에서 비위를 맞춰주는 역할 대신, 곱상하게 생긴 미청년 골려 주는 역할을 맡았는데 싫어할 리 있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