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8/175)

마지막 세 번째는 한세아의 CC 셔틀 선언에 힘입은 패시브 ‘레인저식 함정술’. 스킬 이름 그대로 간이 덫과 함정 따위의 지식을 얻으며 설치뿐만 아니라 해제와 관련된 지식도 얻게 해 주는 패시브.

 “그래도 그레이스 언니가 우리 파티의 든든한 탐색꾼으로서 기습 공격 따위를 사전에 다 막아주니까, 탐색으로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하거든? 사람이 기초가 튼튼해야지 이것저것 일 벌이면 이도 저도 안 되는 거 알잖아.”

아무래도 한세아의 선택은 탐색형 패시브 스킬인지 고민 끝에 다시 입을 연다. 계속 갈팡질팡하던 그녀가 하나를 딱 고르니 시청자들도 호응하는 분위기. 물론 끝까지 다른 걸 주장하는 놈들도 있었지만 한세아는 그런 여론에 휘둘리지 않는다.

 “응? 아까 봤던 채팅도 그렇고 4성, 5성짜리 탐색꾼 새로 뽑을 자신이 없어. 그레이스 언니랑 끝까지 가려면 상층에서도 통하는 최고의 탐색꾼 이여야지.”

비장한 얼굴로 선언한 한세아가 주먹을 불끈 쥐고 과장된 동작으로 허공을 탕! 두드린다.

 “응? 왜 그래. 벌레라도 있, 혀엿?!”

 “그레이스 언니? 언니야말로 왜 그래.”

 “아, 아니…. 뭔가 기분이 이상해서.”

그러자 귀여운 소리를 내며 손을 쥐락펴락 움직여보더니 제 팔뚝을 살살 쓰다듬는 그레이스. 스킬이 추가된 여파가 저렇게 반영되는 건가?

요상한 신음을 흘린 그레이스가 말없이 숲을 걷는다.

-아니방금소리뭐임

-야생이아니라 그 크흠크흠

-시원하게 말하고싶은데 정지당할거가틈

-클립땄냐?클립땄냐?클립땄냐?클립땄냐?클립땄냐?

-방송이 19금인 이유가 HOXY?

 “아, 이때다 하고 선 넘다가 다 죽는 거야. 채팅 조심해서 쳐.”

물론 카메라 드론 앞에서 신음성을 흘린 만큼 시청자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지. 벌써 움짤 반복 재생이니 음성 파일 추출이니 채팅창이 돌팔매 맞은 말벌집처럼 난리가 났다.

그레이스도 이유를 모르는 신음성을 냈다는 게 조금 쪽팔리는지 말없이 랜턴을 들고 숲을 걷는다. 한세아는 급발진으로 선을 넘는 시청자 때문에 바쁘고, 아이린과 케이든은 늘 그렇듯 말없이 조용하니 자연스럽게 고요해진 숲.

그레이스가 3★에서 4★이 되었고 패시브 스킬을 하나 얻었으며 ‘견습 레인저’에서 ‘숲의 추격자’로 칭호가 변경되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시스템적인 이야기일 뿐, 파티에서는 크게 변한 것 없이 언제나처럼 각자의 숙소로 뿔뿔이 흩어졌다.

 “…롤랑?”

그런 줄 알았는데.

 “무슨 일이야, 그레이스?”

 “아니, 저녁에 시간 비면 같이 식사나 하자고 불렀지.”

숙소로 향한 줄 알았는데 슬그머니 돌아와 내 곁으로 다가온 그레이스. 아무래도 아침에 봤던 릴리 뎁 때문인지 뺨을 붉히며 데이트를 신청해온다. 거절할 이유가 없어 고개를 끄덕이니 해맑게 웃으며 내 옆에 선다.

원래는 방에서 술이나 마시며 인터넷을 보려 했지만, 미녀와의 데이트를 거절할 순 없지. 채팅창을 슬쩍 보니 조용해진 게 한세아는 여관에 올라가서 곧바로 방송을 종료한 모양.

슬슬 돌아다니는 사람이 많아진 거리로 나서자 그레이스가 부드럽게 내 팔을 잡아 이끈다. 아무래도 생각해 둔 가게가 있나 보네. 팔뚝에 느껴지는 말캉한 감촉을 만끽하며 그녀가 이끄는 곳으로 자연스럽게 몸을 튼다.

 “…여기서 먹게?”

 “지난번에 먹었던 술이 맛있더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하는 그레이스. 그녀가 자연스럽게 이끈 곳은 내가 한세아와 그레이스에게 잡아준 숙소, 운수 좋은 놈팽이 여관이었다. 그녀가 술에 취해서 나를 덮쳤던 그 장소.

그런 장소에서 대놓고 밥이 아니라 술맛을 이야기하는 데 눈치 없이 굴 생각은 없다.

 “그래? 정말 맛있긴 했지.”

 “…읏?!”

여관 안으로 들어가면서 슬쩍 등허리에 손을 올리자 뺨을 붉히며 작게 신음을 내는 그녀. 패시브 스킬이 탐색 능력만이 아니라 모든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었는지 흠칫거리는 게 느껴진다.

태연한 척, 익숙한 척하지만 실제로는 예민하고 약해빠진 몸뚱이. 그날 이후 쌓여 있던 욕망이 릴리 뎁 때문에 터진 것인지 예민해진 감각 때문에 터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환영할 수밖에 없다.

늘 그렇듯 아름다운 종업원들의 시선을 받으며 잔뜩 들뜬 놈팽이들이 시끄럽게 고함을 지르고 있는 1층의 홀. 지나가던 종업원에게 지난번 먹었던 술을 똑같이 시킨 뒤 마주 앉은 그레이스를 빤히 쳐다본다.

 “왜?”

 “맛있을 거 같아서.”

 “아, 진짜아….”

내가 대놓고 자신을 놀린다는 걸 알아차려서 그런지 뺨따구가 퉁퉁 부어오르는 그녀. 아무리 여유가 넘치는 멋진 여자 같은 걸 연기하려 해도 경험이 없는데 가능할 리 있나. 약간의 음담패설만으로도 평정심을 잃어버리면서.

물론 레베카처럼 미친년보단 저런 순수하고 놀려먹기 좋은 모습이 낫지. 할 말이 없어서 그런지 입술을 꾸욱 다물고 스테이크를 썰어 오물거리는 모습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스테이크를 썰고 술을 마시며 별거 아닌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계속.

 “왜 그렇게 계속 쳐다보는 거야?”

 “말했잖아, 맛있을 것 같아서 본다고.”

 “…….”

내 말에 육즙이 자르르 흐르는 스테이크를 씹는 둥 마는 둥 대충 삼켜버리고 급히 식사를 마쳐버리는 그녀. 계속 놀림당해서 그런지 예민해진 감각 때문인지 입가심으로 술을 벌컥 들이켜더니 곧바로 눈을 휘둥그레 뜬다.

 “큽, 케헥-”

 “뭐야, 왜 그래?”

 “아니… 몰랐는데 술이 평소보다 더 독해진 것 같아서.”

한세아가 자신을 각성시켜 스킬을 하나 추가했다는 사실을 알 리 없으니 기분 탓이라고 넘기는 듯한 모양새. 온몸이 예민해진 것인지 목구멍을 넘어가는 알코올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게 좀 웃기긴 하다.

물론 사람은 적응의 동물인 만큼 예민해진 감각도 컨트롤하기 시작하면 익숙해지겠지. 그러니까 오늘 최대한 즐겨야 하고.

남은 술을 벌컥 들이켠 그레이스의 곁으로 가 자연스럽게 허리를 휘감고 부축한다. 잡을 것도 없이 잘록한 허리가 손바닥 안에 들어오자 한층 거칠어지는 그녀의 숨결. 목구멍을 넘어간 독주부터 맞닿은 피부까지 전부 찌릿하게 느껴지는 걸까.

 “벌써 취한 것 같은데, 올라가자.”

 “아니, 나….”

 “같이, 올라가자.”

 “…응.”

숙소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품 안에 쏘옥 들어오는 그레이스. 물론 종업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있는 허풍 없는 허풍 다 떨어대는 소란스러운 손님들의 관심은 이쪽을 향하지 않는다.

그 틈을 타 슬그머니 내려가는 나의 못된 손. 허리를 휘감고 있던 손을 아래로 내려 보기 좋게 부풀어있는 엉덩이를 슬쩍 쥐어본다.

 “흐, 흐으읏-?”

 “피곤해서 그런지 술기운이 많이 올라왔나 보네.”

 “로, 롤랑 너어어-”

대체 얼마나 예민해진 것인지 눈물까지 글썽이는 그녀. 새하얀 피부가 발갛게 달아오르는 걸 보며 팔뚝에 힘을 줘 그녀를 부축했다. 거의 들고 가는 수준으로 계단을 한 걸음씩 올라가자 비틀거리면서도 제 발로 걸으려 하지만 벌써 풀려버린 다리로는 무리.

등 한 번 쓰다듬고 엉덩이 한 번 꼬옥 쥐었다고 다리가 풀리다니, 뭐 얼마나 예민해진 거야?

그래도 반응이 격렬하니 놀리는 재미가 있네. 높지도 않은 계단을 오르고 그 짧은 복도를 걸으며 엉덩이를 꾹꾹 쥐어짤 때마다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허리. 그 중독적인 감촉에 계속 손을 움직이자 결국 그레이스가 폭발한다.

 “어, 언제까지 괴롭힐, 세흐음-!”

품 안에 안겨 올려다보는 자세지만 찌릿하고 눈을 흘기는 그녀. 물론 눈가가 촉촉해지고 뺨이 발갛게 달아오른 상태로 노려다 봐야 무섭기는커녕 남자를 흥분시킬 뿐이다. 그러니 그레이스의 미약한 반항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고개를 숙여 입을 막았다.

입술로, 입술을.

꽤 독한 술을 벌컥 들이마셔서 그런지 아직도 입술에 남아 있는 알싸한 알코올 향기. 그 탱탱한 아랫입술을 입술로 꾸욱 깨물어 본 뒤 입술과 혀로 그녀의 입을 잘근잘근 짓씹으며 가지고 놀았다.

한껏 예민해진 건 입술도 마찬가지인지 그것만으로 점점 숨이 가빠지는 그녀.

 “헤엑… 헤엑…. 자, 잠깐만.”

츄읍하고 음란한 소리를 내며 입술을 떼자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그녀. 방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조차 까먹은 채 갓 태어난 새끼 사슴처럼 바들거리는 다리로 내게 기대어 온다.

이쯤 되면 취하고 산소가 부족한 머리로도 이상하다는 걸 느끼는지 팔을 살랑살랑 휘저어 보이지만, 이쪽은 이미 시동이 걸린 상태. 품 안에서 뜨겁고 달콤한 향기가 훅훅 피어오르는 데 참을 수 있는 남자가 있겠냐고.

힘없이 팔랑거리는 팔을 붙잡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위해 벽으로 그녀를 밀어붙여 기대도록 만든다. 벽과 나 사이에 껴서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는 그레이스가 더운 한숨을 길게 내뱉는다.

 “잠깐 기다려 달라니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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